남원읍을 벗어난 버스는 24번 국도를 5분쯤 달리다 삼거리를 맞이한다. 그곳에서 직진하면 순창, 우회전하면 대산면이다. 집으로 가는 버스는 언제나 우회전이었다. 그 어느 때부터 막연한 소원이 생겼다. 삼거리에서 우회전 하지 않고 직진하는 버스를 타고 싶었다.
아니 버스가 아니더라도 직전하는 저 길을 따라 가보고 싶었다. 순창으로 가는 길은 삼거리를 지나 1킬로쯤 가면 살짝 우로 굽은 길을 올라 고개를 넘는다. 고개 왼쪽엔 야산 봉우리가 있고, 오른쪽 산자락은 풍악산으로 항해 그 길은 유일한 길처럼 보였다. 그 고개 너머, 길을 따라가면 어떤 세상이 있을지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남원에서 살던 14년 동안 단 한번도 가지 않았던 그 길, 27년의 시간동안 담금질만 한 끝에 마침내 넘었다. 그 고개를 넘는 일은 이번 자전거 여행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첫 번째였다.
고개를 넘기전 높새는 2단*7단으로 조정했다. 평상시 타던 3단*7단으로 넘기엔 경사가 제법 있었다. 고개 정상에 올라갈수록 2단*6단, 2단*5단으로 체인 기어를 조정했다. 8시43분. 높새는 27년 동안 가졌던 작은 소원 하나를 이뤄냈다. 그 소원을 축하하듯 이내 24번 국도는 내리막길을 안겼다. 높새는 신나게 달렸다.
소원의 고개를 넘어섰지만 고내 너머의 세상은 고개 이전의 세상과 다르지 않았다. 2차선 도로에 주변엔 논밭이었다. 초등학교 교가에 나오는 풍악산의 등산로를 확인한 게 수확이었다. 7시 간 정도면 내가 살던 동네를 조망하며 걸을 수 있는 풍악산을 종주할 수 있었다.
고개 너머의 길은 대산면을 벗어나면서 제법 높은 고개를 넘었다. 1킬로 남짓한 길을 2단*5단을 놓고 페달을 밟았다. 간혹 걷는 게 더 빠를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빨리'가 목적은 아니었으니 굳이 걸을 이유도 없었다. 그런 고행을 마치고 나면 늘 잊지 않고 나오는 선물은 내리막이다. 선물은 짧지만 달콤했다.
고개를 두어 번 오르고 나니 순창군 적성면이 나왔다. 아직 순창까지는 10킬로가 조금 못 남았다.
면소재지에 가기 전 길은 다리로 바뀌고 그 아래로 섬진강이 흘렀다. 다리를 건너고 나니 방치된 듯한, 제법 긴 다리가 마음을 끌었다. 다리에 잠시 높새를 세우고는 섬진의 물줄기와, 강물에 비친 숲들을 보며 마음을 닦았다. 전국 강 가운데 4위 안에 들지 않아 맞이한 이 평화가 차리리 섬진에겐 행복일 듯 했다. 불과 세 시간 전에 구례의 섬진가를 떠나왔는데, 이제 섬진의 상류에 서 있느니 신기하기도 했다.
적성면 소재지로 향하는 단풍나무 물든 길에서 한 할머니를 만났다. 지팡이에 기댄 채 한 걸음에 10센티를 이동할까 싶었다. 할머니는 교회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신을 알현하기엔 무척 긴 여정이 될 법했다. 할머니를 뒤로 두고 달려가니 교회까지는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쯤에서 뒤돌아보니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뒤에 묶어둔 내가 가방을 매고는 할머니를 태워드렸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적성초등학교 운동장에 자란 커다란 플라타너스를 보면서도 생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지난 5월 업무로 순창을 들린 적이 있었다. 그때 순창을 막 벗어난 길가에 단풍나무 가로수가 제법 어울려 있었다. 당시 차를 운전하던 지인이 가을에 이곳에 오면 좋겠다고 했다.
이번 자전거 여행의 두번째 목적은 그 은행나무 길을 달리는 것이었다. 순창읍내를 막 벗어나 그 은행나무 가로수를 만났다. 그러나 은행나무엔 이미 바람이 세차게 지나간 듯 했다. 잎이 진 너무들이 많았고 잎도 노란빛을 강렬하게 발산하지 못했다.
두번째 목적이 아쉽진 했지만 낙담할 일은 아니었다. 곧바로 만날 세번째 목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순창을 벗어나 담양읍내까지는 10킬로쯤 나은 지점에서 담양군 영월마을이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세번째 목적인 메타쉐콰이어길이 펼쳐졌다.
메타쉐콰이어길은 담양의 명물처럼 알려져 있다. 실제 담양에 가면 메타쉐콰이어길 관광지가 있다. 그러나 그 길은 1킬로미터가 못 된다. 또한 관광객들이 많아 운치가 떨어진다. 메타쉐콰이어길의 운치를 보려면 담양 순창을 연결하는 24번 도로를 따라가봐야 한다.
메타쉐콰이어길은 2차선길인데 길 양쪽에 늘어선 나무의 가지들이 도로위 하늘을 모두 덮었다. 그런 모양이 담양읍까지 거의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 길에서 자전거를 '달리는' 것은 몰지각한 일이다. 이 풍광을 음미하려면 자전거가 달리는 속도도 너무 빠르다. 갓길만 여유롭다면 이 길에서는 자전거를 끌고 걸어야 한다. 그 멋진 풍광은 비록 갓길이 거의 없어 자전거 타기에 열악한 도로를 만나서도 끊이지 않았다.
담양의 관방제림에 와서야 세 가지 목적을 가진 여행은 끝났다. 시간은 12시. 남원에서 순창을 거쳐 담양까지 오는데 3시간 30분 정도 걸렸다.(2010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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