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니를 뽑는다. 그동안 내 몸에 난 사랑니는 모두 세 개다. 그 가운데 오른쪽 아랫부분에 난 이는 지난 2001년 5월에 뽑았다. 그리고 이제 오른쪽 윗부분에 난 사랑니를 뽑을 차례다.
치과 의자에 몸을 뉘였다. 두 손을 가지런히 마주 잡고 배꼽 부위에 모았다. 의사가 다가와 앉았다. 먼저 마취를 한단다. 아플 거란다.
지금부터 내 몸은 접근하는 모든 것들에 경계를 늦추지 않을 것이다. 아주 작은 접근도 무척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다. 몸은 가능한 움직이지 않는 게 낫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 움직인 만큼 의사의 손도 놀랄 것이고, 그만큼 또한 통증이 뒤따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도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평온을 유지하면서.
움직이지 말아야 할 것은 몸뿐만이 아니다. 의식도 마찬가지다. 그 예민한 촉수로부터 의식이 멀어지지 않으면 몸에 닫는 모든 접근은 고통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늘 몸과 의식은 실패하고 만다. 거의 본능에 가깝게 몸과 의식은 아주 예민한 것에도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작 치과 치료를 받는 동안 벌어지는 다툼은 의식하지 않으려 하는 내 마음과, 본능처럼 반응하는 내 의식 그리고 몸과의 싸움이다.
뽑아야 할 사랑니 부근에 뭔가 따끔한 것이 느껴졌다. 일순간 몸이 잔뜩 굳어졌다. 의식도 붙잡고 있던 마음을 어느새 뿌리치고 그곳에 집중돼 있다. 마음이 다가가 다시 달랜다. 몸에 가해지는 것들에 신경 쓰지 말라고. 널 죽이진 않으니 그냥 다른 즐거운 것을 떠올리라고. 그러나 이미 설득하긴 늦었다. 마취 마늘이 박혔던 당시의 따끔한 통증이 언제 또 이어질지 알 수 없다.
예민해진 의식은 그러나 첫 번째 바늘이 꽂히고 난 후부터가 고통이다. 언제, 어느 부위에 두 번째 바늘이 꽂힐지 알 수 없는, 아니 두 번째 바늘을 꽂기는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어떤 접촉에 대해서도 경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몇 번 다른 집기들이 몸이 닿을 때마다 바늘이 아닌가 싶어 속았다. 아마도 집기는 주사 바늘 꽂을 장소를 찾던 중이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마주잡은 두 손의 손가락엔 힘이 들어간다. 어깨도 무거워지긴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마음은 살아, 잊지 않고 손을 달래고 어깨를 달래고 의식을 달랜다. 마음까지 예민해져 버렸다면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그렇게 몇 번 하는 사이에 다시 따끔한 무엇인가가 꽂혔다. 몇 십분의 1초 정도의 찰나였다.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몸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혀다. 혀는 입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감시한다. 입을 벌리는 순간, 입안에 들어오는 것들은 모두 혀가 우선 접촉한다. 그 움직임은 마음의 통제까지도 무시한다. 아니 마음은 혀의 원초적 본능을 따라잡지 못한다. 빨리 진찰을 하려면 혀는 가능한 그 현장으로부터 물러나 얌전히 있어야 한다.
혀가 걸리적 거릴수록 그 좁은 입안에서 벌어지는 치료는 더딜 수밖에 없고, 그 시간만큼 의식과 몸은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혀는 독립된 몸처럼 그 현장에 접근하려 부단히 애쓴다. 그래서 마취 주사 바늘의 아픔에 잠시 자리를 놓친 마음이 가장 먼저 찾는 것은 혀다. 그리고 혀의 움직임을 느끼는 순간, 이 방어 본능에 놀란다. 혀를 내두를 수 없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만큼.
마취주사의 약효가 몸에 전달되는 것 또한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마취된 부위에서 사랑니를 뽑는 것 자체에 대한 통증과 고통은 없다. 여전히 혀는 그 놀림을 멈추지 않지만, 이미 의식이 죽어버린 몸은 평온하다. 심지어 마취로 인해 제 몸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감각도 사라졌다.
그렇게 20여분 동안,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치과 치료를 마쳤다.
그 시간동안 부단히 경계했던 의식과 몸을 생각하며, 그 몸과 의식을 붙잡기 위해 애쓰던 마음을 생각하며, 나는 고문 받던 이들을 떠올렸다. 몸에 가해지는 고통과, 그 고통이 두려워 긴장하던 의식, 그리고 그런 몸과 의식을 안정시킬 만한 여유도 갖지 못했을 마음이 없어 평정도 하지 못했을 고문 희생자들의 한 순간을 떠올렸다. 생뚱맞게. 고문희생자들이 더불어 당했을 인간의 존재 저변을 지탱하는 자존감의 훼손은 맛보지 못했음에도.
무엇이든 진심으로 동감하고자 한다면, 단어로 인식하지 말 일이다. 가능한 오감을 통해 기억과 고통과 경험을 세세히 나눠 그 알갱이 하나하나로 공감할 일이다. (2005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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