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언제 결혼할 거야?”
나이 서른이 넘어서면 녀남을 불문하고 심심찮게 듣는 얘기다. 딱히 누가 그런 질문을 즐겨 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먼저 결혼해 아이를 한둘 둔 친구들로부터도, 조금 얼굴을 익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도, 가족들로부터도 그런 질문은 어렵지 않게 듣는다. 듣는 대상은 나 혼자지만, 그 대상을 향하는 눈초리는 한둘이 아닌 것이다.
그처럼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많다보니 이제는 그게 오히려 다행이다 싶다. 오래된 질문일수록 습관처럼 넘길 수 있고, 또 그에 맞게 한두 마디 예비로 답변을 준비해두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한두 마디 농담으로 슬쩍 비켜나가는 재주도 갖게 됐다.
그런데 그런 면역성도 좀처럼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바로 명절 때 벌어지는 ‘온 가족 일치단결 프로젝트, 명절 대공세’다. 이번 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설날 아침, 어머니께 세배를 드렸다.
“올해는 꼭 결혼 해라이!”
어머니가 내놓은 덕담이다. 나는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슬쩍 뭉개고 말 심산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곧바로 다음 말을 내던졌다. 거의 준비된 자세였다.
“너는 왜 결혼을 안 할라고 그러냐? 내가 속 안 썩힐 테니까 결혼하라니까? 어떤 며느리가 들어와도 상관 안 할께!”
나는 피식 웃었다. 역시 계산된 대응법이었다. 그러나 내 대응은 무기력했다. 어머니는 이전보다 조금 더 집요해졌다.
“너 내가 중신설끄나이? 학교 선생님이 소개하는데, 나이는 서른이고 중학교 선생을 하고 있단다. 집안도 좋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나 아버지 모두 내게 결혼하라는 얘기를 전혀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신들이 싸움을 잦게 하고, 또한 별거 상태이기 때문에 결혼하라는 얘기를 자신 있게 꺼내놓지 못했다. 그러면서 내심 내가 결혼하지 않는 게 당신들의 싸움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어머니 생각 딴에는 이제 내가 결혼을 안 할 이유가 사라졌다고 본 듯싶었다. 그래서 이제는 구체적인 대상까지 언급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 한들 내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나서기도 뭐했다. 그런 문제에서 최선의 방어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면 결혼해야 한다는 얘기는 어머니 혼자만의 주장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친분 관계를 떠나 발생하는 일이다. 따라서 당사자에겐 괴롭힘에 해당되는 일임에도 누구라도 서슴없이 나서서 한 마디씩 거든다.
그런 환경에서 논리적으로 그런 얘기들이 왜 괴롭힘인지, 왜 결혼만이 능사가 아닌지 등등을 설명하기가 무척 어렵다. 이미 당연지사로 거론하는 마당에 무슨 이유가 통하겠는가! 또한 정작 결혼하라고 말하는 이들은 악의를 갖고 있지 않는데, 화를 내고 대응할 수도 없는 법이다. 그러니 침묵 이외에 무엇도 선택할 것이 없다.
어머니가 꺼낸 결혼이야기는 옆에 있던 막내 누나가 거들더니, 오후에 어머니집에 들른 큰 누나 역시 지지 않고 한 마디 던졌다.
“한서방(큰 매형) 큰 형님은 정환이 중신 선다고 난리라니까! 지난번 아버지 장례식 때 와서 정환이를 엄청 좋게 봤나봐. 인물도 훤칠하고 직장도 좋다며 중매를 서야겠다고 한다니까. 여자는 고등학교 선생인데, 서른 좀 못 되었을 듯싶다던데.”
나를 좋게 보는 것이야 사실 여부를 떠나 즐거운 일이지만, 이처럼 구체적으로 상대방까지 정해놓고 덤비는 데는 역시 뾰족한 대책이 없다. 더욱이 어머니와 막내누나까지 거들고 나서는 데서야 영락없이 협공을 당하는 판이 됐다. 하긴 둘째 누나가 시집에 간다고 시골 내려가서 다행이지 싶다. 둘째 누나 역시 언젠가 중매를 서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역시 구체적인 대상을 염두해 둔 모양이었다.
설날의 역습엔 침묵 다음으로 시간이 약이다. 올해 역시 틈틈이 만날 때마다 결혼하라는 독촉을 받겠지만, 이처럼 협공을 받는 일은 올 추석까지는 유예 될 듯싶다. 그때까지 묵묵히 내 갈 길을 가리라. 아니다! 음력 5월에 어머니 생신이 있다. 그래서 가족들이 벌이는 집단 괴롭힘은 현재진행형이다. 아마 이 괴롭힘은 결혼을 한 후에도 이어질 것이다.
“정환아! 애 하나만 낳아라!”(20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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