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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내 사람네

백두산3 - 대륙, 중국에 가다

 


2006년 7월 14일, 오후 1시 20분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오후 2시 10분경 장춘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연길에 사는 조선족인 현지 가이드를 만났다. 이윽고 일행은 관광버스에 올랐다. 약 6시간의 여정이 잡혔다. 버스는 이름을 모르는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그리고 그 어딘가로 - 일정표로 보면 임업국 호텔이 중국에서의 첫 숙박지였으나 중국에 대한 지리적 이해가 전혀 없는 모든 곳이 ‘어딘가’였다 - 달렸다.


차창을 통해 본 중국의 첫 풍경은 익숙했다. 그것은 한국의 시골이었다. 들판에 자라는 풀들이며, 나무들까지 모든 게 익숙했다. 다른 것을 찾자면 무척 한적한 시골이라는 점, 고속도로에 차들이 별로 없다는 점,  들판이 굉장히 넓다는 점, 그리고 그 들판에 펼쳐진 옥수수밭이 한없이 넓어 보인다는 점 등이었다.
특히 옥수수밭은 그 넓이는 시야로 끝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고, 길이는 버스로 30여분동안 달리는 내내 펼쳐진 정도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그곳 옥수수밭에서 생산된 옥수수는 동물 사료용과 북한주민들의 식용으로 쓰인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점은 그 드넓은 수수밭을 기계농이 아닌 수작업으로 재배한다는 점이었다.


몇 가지를 제외하곤 낯익은 시골풍경에서 서서히 한국의 시골과 시간적 거리가 느껴졌다. 한국의 90년대 혹은 80년대 시골 정도의 풍경이 창밖에 펼쳐졌다. 그와 같은 시간적 인식은 시골 풍경사이로 간간이 나타는 민가들에서 떠올랐다. 마을을 이루듯 모여 있는 20여호 남짓한 집들은 대부분 그 모양이 단조롭고 비슷했다. 단층짜리 블록집에 기와 정도를 얹힌 집들, 거기에 창문 두세 개가 전부였다.
다시 두어 시간이 지나 간간이 나타난 면 단위 정도 돼 보이는 마을에서도 낯선 풍경은 계속 됐다. 도로를 사이로 늘어선 집들은 2~3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집은 블록집 같았고, 무엇보다 가게인 듯한 상점들이 내건 간판들에서 세련됨은 찾을 길이 없었다.


면 단위의 마을을 두세 군데 지났을 무렵, 갑자기 달리던 버스가 덜컹하고는 크게 흔들렸다. 펑크가 났다. 그동안 달려온 거리는 약 세 시간 정도. 앞으로 갈 길 역시 세 시간 정도가 필요한 지점이었다. 그때부터 가이드는 부산해졌다. 약 세 시간 동안, 버스 안에서 들여다본 시골 풍경이 중국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지만, 이 펑크를 쉽게 고칠 수 있을 듯 싶진 않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가이드는 펑크를 수리하는 대신, 임시 버스를 불렀다. 일행은 두어 시간을 기다려 임시차를 타고 다시 여정을 밟았다.
 
그러나 그때 쯤에는 이미 서서히 하루 해가 지고 있었다. 임시 버스는 관광버스보다 작았다. 그래도 다들 큰 불평없이 첫날의 저녁을 보내는 중이었다. 날은 어두워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맛도 사라졌다. 일행들 간에는 아직 이름과 참여 동기 정도만 간단히 소개한 인사를 나눈지라 달리 무엇을 주고받을 말도 없었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잠뿐이었다.


얼마 쯤 잤는지 깨어보니 여전히 버스는 어둠속에서 길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잠시 뒤 이번에는 지금가지 본 동네 가운데 가장 큰 동네가 나타났다. 이제는 도시라는 이름을 붙일 만했다. 5층 이상을 넘는 건물도 많았다. 가이드는 무산이라고 했다.

무산. 낯익은 이름이었다. 소설가 이기영이 쓴 소설 ‘두만강’에 나오는 지명이다. 그때부터 내 시선은 어둠 속 창밖으로 향했다. 어둠이 짙고 가로등이 없어 불것은 어둠뿐이었지만, 그래도 이 도시의 지형을 알고 싶었다. 그때부터 십여년 전에 읽었던 소설 ‘두만강’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러나 꺼낼 수 있는 단어는 ‘항일투쟁’ 정도였다. 그만큼 세월에 묻혀있던 기억인데, 예기치 못하게 무산이라는 곳을 지나고 보니 언뜻 떠오른 것이다.


소설가 이기영은 남한에는 크게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이기영은 1895년에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이후 일제시대에 남한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고향’이라는 일제시대 최고의 리얼리즘 작품을 펴내기도 했던 인물이다. 해방이후 이기영은 북한으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꾸준히 작품활동을 펼쳤다. 일제시대 우리 민족의 수난과 항일 투쟁사를 그린 대하소설 ‘두만강’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90년대 초반까지도 그가 월북작가라는 것 때문에 그의 명성과 작품은 남한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나마 내가 이기영과 두만강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대학교 때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리얼리즘 문학을 공부한답시고 풀빛 출판사에서 나온 이기영 전집을 구해 읽었기 때문이다.


버스가 무산을 지나면서 그때부터 중국의 여정에서 만난 도시들은 항일투쟁을 하던 이들의 족적을 느끼고자하는 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그런 계기는 중국 도착 첫날 숙소인 임업국 호텔에 밤 11시에 도착하는 것으로 접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백두산을 하산한 다음날인 넷째 날 다시 중국의 몇몇 도시들을 지나면서 이산된 민족의 현실을 느끼면서 다시 떠올랐다.


7월 17일 아침 9시 호텔을 나섰다. 백두산 트레킹을 끝내고 나니 모든 게 끝난 느낌이다. 그럼에도 아직 백두산을 벗어나지 않았다. 호텔에서 장백폭포까지는 30여분 남짓한 거리였다. 일행은 백두산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소천지를 둘러보았다. 오밀조밀한 자작나무숲 사이로 난 소로를 따라 5분쯤 걷자 아담한 연못이 나타났다. 소천지였다. 둘레를 한 바퀴 도는데 5분 정도면 충분한 크기였다. 소천지 주변으로는 자작나무들이 자랐는데, 고요한 물가에 제 모습을 비춰 소천지의 정취를 돋우었다.
 


소천지는 백두산 트레킹의 후식같은 맛이었다. 후식은 간단하듯 소천지도 간단했다. 그만큼 백두산을 떠날 시간은 빨랐다. 서파에서 천지로 올 때 버스를 탔듯이, 소천지에서 북파로 갈 때도 버스를 탔다. 버스는 서파와 비슷한 길을 10여분 달렸다. 이제 셋째 날의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된다. 이도백하를 지나 연길로, 연길에서 다시 용정을 둘러 본 후 연길로 돌아와 연길공항에서 심양까지 비행기로 이동하면 하루가 끝난다.


이 여정에서 다시 첫째 날 느꼈던 항일투쟁과 민족의 현실을 엿볼 수 있었다. 연길시내 역시 20여 년 전의 한국을 보는 듯 했다. 더욱이 길거리의 간판은 대부분 한글이 겸용이었다. 한글 겸용은 교통표지판도 마찬가지인데, 연길에 그만큼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연길에서 점심을 먹은 후 찾은 곳은 용정이다. 용정은 노래 선구자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용정에서 먼저 방문한 곳은 일송정이 있는 근처였다. 일송정과 푸른솔이 있는 산은 흔히 볼 수 있는 뒷동산처럼 야트막했다. 일행은 시력이 웬만한 사람이면 그 형체를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현재 심어진 푸른솔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일제가 푸른 솔을 없애버렸는데 90년대 후반에서야 그것을 복원하게 됐다는 것이다.
버스는 이어 혜란강을 건너 용정에 있는 대성중학교에 들렀다. 시인 윤동주가 다니던 학교이고, 통일운동가 문익환도 다니던 학교다. 학교에 들러 안내원의 설명을 받으며 항일운동과 대성중학교의 관계 등을 들었다. 그 무렵 용정이란 이 낯선, 그러나 소설 두만강에서 많이 들어 낯익은 이 도시의 이름에 감회가 스며들었다.


한반도가 식민지로 되면서 생존을 위해 투쟁을 위해 이 허허벌판의 낯선 땅에 온 사람들은 바로 조선인이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는 시인 윤동주가 되었고, 어떤 이는 통일운동가 문익환이 되었다. 그러나 용정에는 윤동주도 문익환도 되지 못한, 될 수 없었던 수많은 민족들이 남았고, 그네들의 2세 3세는 이제 용정을 고향이자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와서 땅을 개척하던 이들이 고통은 얼마나 깊었을까! 그런데 왜 이곳에 사는 조선족들에 대해 남한은 무엇을 했을까! 드라마 ‘주몽’에서 옛 조선의 유민들을 부여 등의 국가에서 방치하듯,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어도 해방이전의 조선의 유민들에 대한 관심은 왜 없는 걸까!


그런 몇 가지 질문을 쏟아 놓으며 옛 조선의 유민을 보호하겠다는 주몽의 꿈은, 단지 고대시대의 현실에 대한 도전만은 아닌 듯싶었다. 주몽의 꿈은 지금 이 시대에도 필요한 것이다. 연길에서 온 조선족에 대한 남한 일부 사람들의 차별과 배신은 얼마나 아픈 상처가 될 것인가.


용정의 감회에 젖을 무렵 버스는 멀리 옆으로 해란강을 두고 연갈로 되돌아왔다. 그 길에 가이드는 ‘펜서비스’를 했다. 먼저 ‘서시’를 암송했다. 시를 암송할 때 마침 버스는 용정시와 그 주변을 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 전망을 보면서 윤동주의 서시에 하늘과 별이 언급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다음에는 선구자 노래도 불렀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혜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노래 가사가 가슴에 착 달라붙었다. 일송정과 혜란강이라는 얼마 전에 직접 보았던 지명을 들은 이유도 있겠지만, 백두산 트레킹을 포함해 용정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멀리로의 야트막한 산맥같은 산들이 보여주는 선구자의 고단함을 느끼는 듯 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어 보는 것이 주는 느낌엔 한계가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다 2006년 1월 인터넷 한겨레에 ‘겨레를 속여 온 친일노래 ‘선구자’‘라는 제목의 글을 읽게 되었다. 요지는 이렇다. 작곡자 조두남은 윤해영이 직사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윤해영은 일제 시대에 만주에서 친일시인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선구자의 원곡은 ’용정의 노래‘이고, 당시에 ’선구자‘라는 말은 “만주국의 건국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선구자 노래에 감동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한겨레 글을 읽고는 선구자의 노래는 잃었다. 그럼에도 진실로 역사의 선구자가 돼 만주벌판에서 제국주의와 싸우던 평화운동가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듯한 투쟁의 현장은 굳이 잊을 이유도 잃어버리지도 않았다. 버스는 다시 연길로 돌이와 몇 군데 쇼핑 상점을 둘러 본 후, 연길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심양으로 왔다. 심양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약 40여분을 달려 심양시내에 있는 샹그릴라호텔에 도착했다. (200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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