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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내 사람네

백두산4 - 백두산에 들다



중국 도착 둘째날인 7월 15일. 오전 6시 숙소에서 짐을 챙겼다. 어제 저녁 펑크가 났던 관광 버스는 새벽녘에 숙소에 도착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는 버스에 올랐다.

중국에서 백두산을 오르는 길은 이른바 서파와 북파 두 갈래로 나뉜다. 지금 일행이 가는 곳은 서파쪽 산문이다. 송강하 시내를 벗어난 지, 10여분 되자 버스는 산속으로 들어왔다. 2차선 도로는 양쪽으로 쾌 높이 자란 나무숲을 거느린 채 큰 굴곡 없이 뚫렸다. 오가는 차들도 별로 없이 한가로움마저 느껴졌다.


가이드는 오늘이 백두산 야생화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라고 했다. 그래서 중국 공안 당국 등 고위직들이 많이 올 것이라 했다. 한때 경찰차가 호위하며 지나가던 일단의 자가용 무리를 가리키며 공안쪽 사람이라 했다. 또한 곳곳에 도로에서 빠져 임도처럼 난 길가주변에는 공안요원이 배치되었는데, 모두 고위직 관리들을 위한 준비라고 했다. 고위직 차량이 지나갈 때 혹시 다른 차량이 방해되는 일이 없도록 할 요량이라는 것이다.  


도로 양 옆으로 난 숲은 좀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짐작한 것이지만, 이 숲부터가 백두산 자락이었다. 산자락의 기울기가 평지처럼 된지라, 산 속에 닫혀 있는 꼴이었다. 옆이든 앞이든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무만 보였다. 우리나라의 산이라면 때로는 계곡을 끼고 때로는 터널을 통과했을 도로건만 완만한 고갯길을 빼고 나면 변화를 읽을 수 없는 길이었다. 버스는 그렇게 두어 시간을 달렸다. 그리고 내린 곳. 이른바 백두산 서파 여행의 출발지인 산문에 도착했다.


이곳부터는 교통통제가 이뤄졌다. 일반 차량으로는 이동할 수가 없었다. 백두산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 했다. 일행은 내려 표를 끊고는 본격적인 백두산 여행을 위해 산문 안에서 운영하는 버스로 갈아탔다. 그 버스를 타고 다시 산속으로 들어갔다. 길은 여전히 숲속에 있고, 여전히 버스는 백두산 자락을 달렸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주변의 나무들이 조금씩 키가 작아지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산문에 도착하기까지의 버스여정도 그랬지만, 산문에서 갈아타고 이어진 버스여정도 길긴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백두산에서 달리고 있긴 한데, 이 정도 오랜 시간 달린다면 도대체 얼마나 넓은 곳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행을 태운 버스가 30여분을 달렸을 즈음, 나무들은 눈에 띄게 키를 낮췄다. 군데군데 고사목도 눈에 띄었다. 나무들이 사라진 틈틈이 풀밭이 들어섰는데, 곳곳에서 야생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 가운데 몇몇이 ‘야!’하는 소리를 냈다. 이 여행의 명칭은 ‘백두산 야생화 트레킹’이다. 제목에 ‘야생화’라는 명칭이 들어있으니 드디어 여행의 목적이 이뤄지려는 순간이다.


그쯤에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도저히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카메라를 꺼내들고는 버스 앞쪽으로 갔다. 운전석 바로 옆에는 다른 일행의 가이드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서 있었지만, 다행히도 내가 설 자리는 만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버스 앞 창으로 보이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2년 여전 노르웨이 여행을 갔을 때 지금처럼 버스 앞, 안내석에 앉아 창밖 풍경을 찍었는데 그때 찍은 사진들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사진들이 됐다. 백두산을 오르는 버스에서 보는 이 풍경들이 훗날 그렇게 남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버스가 아무리 달려도 백두산 꼭대기라고 짐작해볼 만한 봉우리는 좀처럼 그러나지 않았다. 다만, 차츰 야생화들의 출연이 잦아졌고, 그 무더기들의 넓이도 점점 커졌다.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를 제외하고는 그 사이로 난 풀밭은 야생화들의 차지가 돼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버스가 경사진 고개를 돌자, 나무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넓은 초록색 평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평원이었다. 평원 곳곳에는 노란 야생화들이 모더기를 이루며 곳곳에서 자랐다. 버스는 어느새 초록빛 초원으로 이뤄진 구릉에 지그재그 난 길을 따라 올랐다.

그만큼 내 손도 바빠졌다. 버스 창이 깨끗하지 않아 사진이 잘 나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지금 보는 이 풍경은 버스 안이 아니라면 찍을 수도 없었다. 대부분의 여행이 목적지는 ‘찍는 것’이 가능하지만, 목적지까지의 과정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게 돼 있다. 이 여행도 그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드디어 버스가 멈췄다. 산문을 출발한 지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버스에서 내린 일행 앞에 이번엔 긴 계단이 드러났다. 그 계단이 백두산 천지로 향하고 있다는 것쯤은 굳이 설명이 없이도 알 수 있었다. 계단에서는 이미 앞서 온 관광객 수십 명이 계단을 오르내렸다.


우리 일행도 그 계단을 밟을 기회가 주어졌다. 애초에는 천지는 내일 보고, 오늘은 다른 곳들을 둘러볼 계획이었으나 날씨가 좋아 천지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약 한 시간 후에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천지를 오르기로 했다.


나는 일행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그리 가파르지 않았으나 계단이라는 그 이유로 부담이 없진 않았다. 더욱이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는 길이니 약간의 부담이 더 얹혀졌다. 계단을 약 5분여 쯤 올랐을까 싶을 때, 가슴이 갑갑해졌다. 머리도 약간 어지러웠다. 주저앉아 쉴 정도는 아니었지만,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점은 느꼈다. 그 증상은 조금 더 지나서 깨닫게 됐다. 고산증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는 2500미터 되는 고지대를 갑자기 오르고 있으니 몸이 놀랄만 하긴 했다. 다행히 고산증은 심해지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며 꼭대기까지 이어졌다.
약 20~30여분 쯤 계단을 올랐을 때 천지를 보고 있는 관광객들이 바로 지천이었다. 나 역시 몇 걸음을 마저 올랐다.


눈앞에 꽤 넓은 푸른 호수가 펼쳐졌다. 그 호수는 큰 바위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몇 년 전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을 보았는데, 그때는 가뭄이어서 그랬는데 분화구는 거의 빈 상태였다. 제주의 지인이 분화구 끝에 노루가 노니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음에도 그것을 찾는데 한참 시간이 걸릴 만큼 먼 거리였다. 그러나 지금의 천지 물가는 그리 몰지 않았다. 규모로 보자면 분화구 저 끝은 무척 깊을 만한데, 그만큼 천지물이 많이 차올라 있었다. 천지물가가 가깝긴 했지만, 물가로 내려가는 사람은 없었다. 비탈의 결사가 심하기도 했겠지만, 아마도 중국 당국에서 그것은 제한하는 모양이었다.   


사진으로 많이 봐서 인지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웅장한 천지는 과연 민족의 명산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했다. 더욱이 하늘까지 쾌청했다. 지리산만 오르더라도 구름의 변덕이 심해 멀리 전망을 보기가 어려운데, 천지 위 하늘은 높게 뭉게구름만 띄웠을 뿐이었다.

천지 수면에는 가끔 눈으로도 확연히 볼 수 있는 바람길이 드러났다. 바람길은 그 자체로 천지 역시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서파에서 올라 천지를 보고 있는 이곳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이기도 하다. 경계를 나타내는 5호 경계비가 이곳에 세워져 있고, 저 북쪽 천지 건너편 능선에 6호 경계비가 있어 이 경계비를 연결한 일직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중국이 국경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국경이라고 하지만 북한이나 중국이나 총을 든 경계군은커녕 북한군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북한쪽으로 몇 걸음 가서 천지를 조망한다고 말리는 사람들도 없었다.


30여분 남짓 천지 물가에 앉아 아마도 다시는 오기 힘들 이 장소에 대해 생각했다. 11년 전의 꿈을 이룬 천지의 모습을 어떻게 담아둘까 싶어 카메라 셔터가 바빴다. 그러나 광각 렌즈가 아닌지라 천지의 모습이 다 담겨지지 않아 안타까웠다.

천비를 구경하고 내려갈 쯤 일행과 합류했다. 일행은 계단길을 버리고 잠시 평원으로 들어섰다. 평원길을 삼삼오오 걷던 일행은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준비해온 군것질거리를 내 놓았다. 그 가운데는 누군가 준비해온 양주도 한 병 있었다. 이제 만난 지 채 24시간이 안된 일행들이지만, 백두산 천지를 보고난 후 마음의 거리가 그만큼 가까워졌다. 그래서 한잔 씩 돌리는 양주잔에 아무런 부담없이 손을 내밀었다.


오후 한시가 넘어 일행은 다른 관광지로 이동했다. 교통편은 역시 산문에서 타고 온 버스였다. 후에 알았는데 중국에서 운영하는 백두산 관광은 나름대로 생태보호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산문에서부터 일반 차량의 통행을 금지하고, 전용버스로 움직이게 하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버스는 백두산 관광지를 서로 연계하고 있었고, 그 비용은 산문 매표소에서 일괄적으로 받았다. 따라서 백두산 내에서 몇 군데 여행지를 둘러보려면 일행의 숫자에 따라 크고 작은 버스가 수시로 준비됐다.


다시 30여분을 달려 금강대협곡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오늘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점심은 협곡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했다. 식당은 한국 관광객이 많다는 것을 알리듯 간판에 ‘계곡 야생 산나물 놀색식당’이라고 한국어로 쓰여 있었다.(‘놀’은 ‘녹’의 오자다) 꾸밈은 마치 포장마차처럼 초라했다. 그러나 나온 음식은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야생 산나물이니 비빔밥을 해 먹으며 ㄴ좋으련만, 딱히 비빔밥으로까지 만들기에는 조금 뭔가 어색한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전분을 얇게 구운 곳에 대여섯 가지의 야채를 섞어 쌈을 싸 먹는 음식은 맛이 괜찮았다.


약 한 시간여의 식사를 마친 일행은 금강대협곡으로 관망했다. 백두산 어느메 산자락인 것만은 분명한데 역시 감이 잡히진 않았다. 협곡으로 가는 일은 이미 나무판으로 길을 잘 닦아 놓았다. 두 사람이 걷기엔 조금 좁다 싶은 넓이로 산책로처럼 만들 숲속의 길이었다. 그리고 길가 군데군데에는 묘하게 자란 나무들에게 사연을 붙인 명패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나무는 서로 다른 종류의 나무들의 뿌리와 아랫 줄기가 서로 얽혀 있었다.


입구에서 10분여 남짓 걷자 나무들만이 자라는 곳에 무척 깊은 협곡이 불쑥 나타났다. 협곡 아래엔 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물의 양은 많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그 물을 제대로 가늠하지 어려울 정도로 협곡은 깊었다. 아울러 일행이 서 있는 곳에서 협곡을 사이에 둔 다른 편의 산까지도 거리가 꾀 됐다. 협곡 이쪽 편은 거의 바위로 이뤄지다시피 했다. 그러나 반대편 쪽은 간혹 흙이 드러났다. 협곡을 보기위한 산책길은 이제 협곡을 따라 이어졌다. 협곡은 나무들에 종종 모습을 감췄다. 그러다 전체를 볼 수 있는 전망이 드러나는 곳이면 사람들이 전망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협곡의 종간중간에는 절묘하게 깎인 바위들도 협곡에 또다른 신비를 더했다. 그리고 그런 바위에 곡예를 하듯 용케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나무들 또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금강대협곡을 관광하는 길은 크게 보면 삼각형을 이뤘다. 출발한 꼭지점에서 보이는 대변이 협곡을 관망하는 길이었다. 산책길은 협곡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이어졌다. 그럼에도 나무길은 산 나무를 그대로 품었다. 길이 놓일 곳에 있는 나무는 그대로 길에 두었다. 전망대가 놓일 곳에서 자란 나무는 전망대 지붕이 감싸 안은 채 생명을 유지시켜 놓았다. 나름대로 자연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당국의 노력이 엿보였다. 30여분 간 이어지던 협곡가의 산책길은 이제 협곡을 뒤로하고 입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방향을 틀기 전 협곡으로 이어지는 길 공사는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좀더 길게 협곡을 조망할 수 있게 하려는 듯 했다.


협곡에서 빠져나와 입구로 돌아온 길에서는 다시 뿌리와 줄기를 서로 얽혀 자란 나무들을 보았다. 이번에 본 것은 그동안 본 것의 결정판이었다. 아까시 나무 등 4~5종이 한데 뭉쳤다. 그 나무는 울타리를 둘렀는데, 그 울타리에는 수백 개의 붉은 나무판이 매달렸다.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중국인 상인이 파는 붉은 패였다.


일행은 다시 이동했다. 목적지는 고산화원이었다. 이번엔 차량이 바뀌었다. 20인승쯤 돼 보이는 소형버스였다. 다시 20여분을 이동해 고산화원에 도착했다. 고산화원은 말 그대로 야생화가 핀 곳이다. 백두산 내부 도로 인군에 사람들이 내릴 수 있는 인도를 만들어 근처에 핀 야생화를 조망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야생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시 버스에 오른 일행의 목적지는 왕지였다. 현재는 관광객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가이드는 운전사에게 부탁했고, 운전사는 동의했다. 물론 그 동의에는 팁이 한몫했다. 운전사로서는 혹여 왕지를 방문한 것이 발각되면 벌칙을 받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가라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왕지가 당시엔 관광객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곳임은 분명했다. 승합차는 주변 도로에 다른 차들이 없는 곳을 확인하고는 잠시 후진 해 왕지로 가는 샛길로 방향을 틀었다.


버스가 멈춘 길에서 내린 일행은 가이드를 따라 왕지로 갔다. 그러나 왕지보다 먼저 만난 것은 수천 수만 그루의 야생화였다. 버스에서 내려 풀밭 사이로 난 나무로 된 산책로를 조금 걷자 멀리 평원이 나타났다. 그 평원이 온통 야생화였다. 그동안 버스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본 야생화밭과는 비교되지 않는 야생화 평원이었다. 일행은 그곳에서 무척 흥분했다. 버스로 백두산을 오르면서 느꼈던 ‘야생화 트레킹’의 진수는 이곳에와서 그 타이틀을 내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이드는 그 감격의 시간을 단축하려 했다. 몰래 찾은 관광지이니 빨리 나갔으면 싶은 모양이었다.

그때 한국에서 온 여행사 이사가 여기까지 왔으니 왕지를 가보자는 거였다. 가이드는 서너 번을 어렵다고 주장하다가는 결국 빨리 돌아오는 조건으로 왕지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왕지로 가는 길은 아직 미지였다. 야생화 평원을 가르며 지나자 곳곳에 나무산책로를 만드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 산책도 공사가 끝나고 나면 이곳에 대협곡처럼 관광지가 될 듯했다. 산책로가 끝난 곳에도 길은 있었다.
그러나 앞서 걷던 일행은 그 길을 버리고 갑자기 풀섶으로 들어갔다. 왕지로 가는 지름길을 찾으려 했다. 풀섶의 풀들은 사람들의 키를 단숨에 넘었다. 풀과 꽃과 사람들이 한데 엉키며 숲을 걷던 일행은 어느 야산 자락에 들어섰다. 이윽고 잠시 비탈진 숲을 내려가자 연못이 나타났다. 왕지였다.


왕지는 아무런 개발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저 왕지가 생긴 때도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겠거니 싶었다. 웬만한 저수지 크기 정도 되는 큰 못이 이런 산 속에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럼에도 왕지 물에 손을 담글 수는 없었다. 물가에 접근하기엔 풀숲이 너무 깊었고, 무엇보다도 가이드가 되돌아가자며 서둘렀다. 그곳에 그런 못이 있었다는 정도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의 시간만큼 머문 후, 일행은 되돌아왔다. 버스로 되돌아오는 길은 모두들 발걸음이 바빴다. 다시 야생화가 가득한 평원을 가로질러 버스로 돌아오기까지, 이곳을 오지 않았다면 백두산의 또다른 모습을 알지 못하고 지냈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일행을 때운 버스는 이제 서문으로 달렸다. 달리는 도로에서 잠시 소나기를 맞았다. 그러나 백두산과의 첫 만남은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오후 6시, 약 7~8시간의 둘째날 일정은 그처럼 마무리됐다.
(200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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