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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내 사람네

사려니 숲길의 봄비




봄비다. 3월 2일, 제주 자전거 여행의 둘째 날은 봄비가 열었다. 라면으로 아침을 먹고 용포형이 준 바지를 입었다. 우비를 걸치고 배낭은 작은 것으로 바꾸었다. 높새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마을을 벗어나 공사중이라 텅 빈 2차선 도로를 따라 달렸다. 빗줄기는 드세지 않았지만 얼굴로 치고 들어왔다. 고개에 다다라 멈췄다. 이렇게 하루를 달릴수 있을까. 
 

애초 이번 자전거 여행은 3월 5일까지 제주도 해안을 한 바퀴 돌 계획이었다. 그러나 첫 날을 보내고 난 저녁에 슬그머니 일정을 바꾸었다.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았다는 기록은 남겠지만 너무 직선의 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첫날 일정에 오름여행을 넣은 것이다. 

이런 생각과 날씨가 둘째 날 일정을 바꾸었다. 용포형의 도움을 받아 제주도 동쪽에서 갈 만한 곳을 물색하다 산굼부리와 사려니 숲길을 들러 주변을 도는 길을 잡았다. 그런데 그 길마저 비가 막아섰다. 떠난 지 채 10분이 되지 않아 곶자왈 작은학교로 되돌아왔다.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엔 높새는 두고 우산을 챙겼다. 학교에서 산굼부리까지 4킬로미터  남짓이라 쉬엄쉬엄 걷다 올 생각이었다. 

마을 오솔길을 따라 걷다 2차선 도로로 발길을 잇대었다. 봄비에 어울리는 부슬비다. 주변엔 사람이 없다. 고즈넉하다. 종종 도로를 따라 차들이 지나갔다. 길가에 있는 조그만 목장엔 말들이 한가롭게 거닐다 이내 숲으로 들어간다.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산굼부리에 도착했다. 산굼부리에도 비는 내려 깊은 분화구엔 구름이 반 이상 잠겼다. 그 깊이를 볼 수 없으니 입장료 6천원은 제 값을 못한 셈이다.  

이제 발길은 사려니 숲길로 잡았다. 산굼부리를 걸어오던 길에 버스정류장을 발견했다. 어쩌면 사려니 숲길도 갈 수 있겠다 싶었다. 산굼부리 매표소 직원에게 물으니 사려니 숲길로 바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했다. 

버스로 10분 정도 달리니 사려니 숲길 입구가 나왔다. 안내소 직원은 물찻오름은 통제하지만 약 10킬로미터는 걷기가 가능하다고 했다. 


사려니 숲길. 비는 흩날렸다. 그로부터 세 시간 남짓, 어느 여행보다도 여유있게 걸었다. 뒤따르는 사람은 먼저 보내고, 마주오는 사람은 지나치며 혼자의 숲길을 만들었다. 길은 평지는 아니었지만 경사랄 것도 없었다. 때론 시멘트로 때론 흙으로 덮힌 숲길은 어느 길 못지않게 운치가 넘쳤다. 제주도의 어느 올레길보다도 아름다웠다. 녹음이 우거진 계절이었다면 더욱 아껴가며 걸을 법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마음도 흥겨워졌다. 다른 무엇을 할 필요가 없는 하루, 문득 생각해보니 금요일이었다. 


붉은오름 쪽으로 숲길을 벗어날 무렵 길 옆으로 삼나무가 숲을 이뤘다. 사려니 숲길을 벗어나자 이내 차들이 빠르게 오가는 남조로였다. 세 시간 가량의 숲길 산책은 이상한 나라를 다녀온 느낌이었다. 예정에 없던 걷기는 그렇게 끝났다. 예정에 없던 시간이 예정보다 더욱 값진 하루를 만들었다. (2012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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