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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내 사람네

백두산6 - 그로부터 한 달

 


 

그 날로부터 한 달이 됐다. 그럼에도 한 달이란 시간적 거리는 큰 의미가 없다. 지난주에도 그 날은 어제였고, 오늘도 그 날은 어제다. 오히려 요즘엔 그 날이 오늘이 돼 버렸다.

그 날, 백두산을 걸었다. 이틀간의 백두산 여행 여정 중 첫날은 그야말로 ‘관광’이었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인 5호 경계비 근처에 올라 백두산 천지와 주변 봉우리를 조망했다. 평원에서 만난 수천 수만 송이의 야생화, 허리를 깊게 밴 듯 좁고 깊은 금강대협곡을 들러보았다. 그쯤에서 백두산 여행이 끝났다면, 한 달이 지난 지금 그날이 어제가 되고 오늘이 될 까닭이 없었다.


백두산의 진미는 둘째 날 비롯됐다. 둘째 날 우리 일행은 서파에서 북파까지 천지 주변의 능선을 따라 트레킹에 나섰다. 서파 주차장에서 시작해, 마천우(2459), 청석봉(2662)을 지나, 2691미터의 백운봉을 돌아 오른 후 녹명봉(2603)을 넘어, 천지의 물이 흘러내리는 달문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천지 둘레의 3분의1 정도를 직접 걷는 셈이다.


일행이 산에 오른 시각은 아침 8시였다. 그리고 천지물가인 달문에서 노닐다가, 장백폭포를 조망하며 숙소로 돌아온 시각은 오후 6시 무렵이었다. 그 10시간 동안 밟은 데는 백두산뿐이었고, 오직 백두산만을 보았다.

그 10시간 동안, 백두산은 나를 하안거에 든 승으로 만들었다. 백두산은 그 존재만으로 수행에 들게 했다. 심지어 그 생김새를 끊임없이 달리하며 초행자로서 나태에 빠질 수행을 경계했다.


수행의 계기는 구름이 먼저 만들었다. 전날 천지를 아무런 부끄럼없이 보여준 백두산. 그러나 트레킹의 첫 걸음은 구름으로 뒤덮였다. 거센 바람에 밀려 비탈진 능선을 타고 오르는 구름은 때로 예닐곱 걸음 앞서 걷던 일행까지도 숨겨버릴 정도였다. 천지를 볼 욕심에 앞서 천지 쪽으로 난 벼랑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구름이 걷혔다. 동시에 그동안 전혀 드러내지 않던 천지가 푸른빛을 머금은 채 봉우리 아래로 펼쳐졌다. 천지는 어제 보던 때와 달랐다. 바라보는 장소가 바뀌니 배경이 되는 봉우리들이 달랐고, 봉우리가 다르니 천지 주변의 굴곡도 달라졌고, 굴곡이 달라지니 천지의 생김새가 바뀌었다. 그런 변화는 대여섯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천지 못지않게 나태한 수행을 경계해 준 것은 고원이었다. 해발 2000미터 이상은 더 이상 수목이 자랄 수 없는 수목한계선. 이 고도를 넘는 땅에는 수목 대신 초원이 펼쳐졌다. 완만한 둔덕을 서너 개씩 두며 펼쳐진 고원은 광활(廣闊)의 말뜻을 눈으로 확인시켜줬다. 고원은 트레킹 내내 묵묵히 왼편을 맡으며, 때로는 눈을 붙잡고 때로는 가슴을 확 트이게 했다.


고원의 초록과 천지의 푸름의 틈을 좁혀준 것은 천지 주변 곳곳에 핀 야생화였다. 바위틈에서 바람을 피하며 핀 하늘매발톱은 재치를 보였다. 맨 땅, 그곳도 곧장 천지 물가로 뻗은 비탈에 선 호범꼬리는 기개를 품고 있었다. 떼를 지어 다북눈썹처럼 핀 노란만병초는 포근함이 넘쳤고, 무리를 떠나 홀로 핀 두메양귀비는 그윽함으로 돌산의 무뚝뚝함을 달랬다.  


백두산의 구름과 바람, 백두산의 천지와 봉우리, 백두산의 초록빛 고원, 백두산의 다색다종 야생화…. 그들로 인해 단 열 시간의 하안거에 든 승은 수행하는데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집과 사무실의 두 꼭지점을 지하철로 연결하면 하루의 큰 동선과 공간이 충분히 표현되는 일상, 업무로 고민하고 갈등하다 뒷골이 당기면 그때서야 자신을 들여다보는 그런 일상. 그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야 굳이 백두산을 오르지 않더라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백두산은 각별했다. 백두산에서는 나무도 꽃도 산에 올라 산이 되었다. 그 산에 오른 사람도 산일뿐이었다. 그런 백두산에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산에 오르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경계 짓지 않는 그 너른 품이야말로, 산에 오른 그 무엇도 아름다워지는 이유가 되며, 산에 오른 그 누구도 존귀해지는 이유가 될 뿐이었다. 거기에는 생명과 비차별과 공존이 있었다.

수행을 끝마친 지 보름쯤 지났을 무렵, 수행 느낌을 몇 줄 글로 풀었다. 그 마지막은 이랬다.


산은 

생명이고 평등이며,

또한 평화다


오늘, 

또 한 사람이 산이 된다

나무와 꽃과 물과 더불어

생명이 되고, 평등이 되고, 평화가 된다

산, 

백두가 된다

   

지금도 그 날 찍은 사진들을 보며 그 날을 오늘로 만든다. 그리고 슬쩍 엉뚱한 농 한 마디를 던져본다. 

“무거운 이들은 세상을 느낄 수 없고, 즐길 수 없다. 고로 세상이 될 수 없다.”

무거움, 그것이 몸무게만을 뜻하겠는가!  (200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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