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숲은 내밀했다. 그저 저희들끼리 연두빛 언어를 주고받으면서도 소란 떨지 않았다. 가끔씩 말 걸어오는 바람에 슬쩍 존재를 나타낼 뿐이었다. 그때마다 땅에 내린 그림자를 그만큼 옮겨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루 그루로 만나 숲을 이뤘음에도 그 공을 뽐내는 이도 없었다. 어느 귀퉁이에 초록이 부족하다 싶으면 이내 양 옆에서 무성한 잎으로 빈 하늘을 감싸 안았다. 그런 내밀한 언어들마저도 단지 숲이었다.
애초 인간이 숲에 길을 낸 것은 어쩌면 숲의 내밀한 언어를 배우고자 함이었을지 모른다. 그 첫 길은 나무 나무가 슬쩍 자리를 비워둔 틈과 틈으로 이어졌다. 숲의 언어를 듣고자 온 이가 차마 나무를 꺾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길은 때로 바위를 넘고, 나무들을 에둘러 뻗었다. 첫 길에 들어선 인간은 자연스레 온 몸으로 숲의 언어를 들었다. 어깨를 스치는 나뭇가지와 발등을 감싸는 낙엽과 심장까지 씻어내는 청정한 숲들의 숨결까지 모두 몸으로 받아 들었다. 그 길에 선 인간은 곧 숲이었고 또한 자연이었다.
인간이 숲의 내밀한 언어를 잃어버린 것은 인간의 길에 속도의 욕망이 쌓이면서부터였다. 에둘렀던 길은 한두 그루를 잘라내며 직선의 자유를 얻었다. 어깨를 스치는 나뭇가지를 거세함으로써 직선의 자유는 높이의 해방까지 확보했다. 그러나 그 해방과 자유가 함께 불러들인 것은 난청이었고 난시였다. 눈앞에 숲이 있으되 숲의 의미를 몰랐고, 숲에 들고서도 숲에 든 이유도 깨닫지 못했다. 그나마 그 정도는 다행이었다. 인간의 욕망이 자본을 만나고 난 후엔 아예 숲을 도려내 버렸다. 숲길이 의미와 이유를 망각하고 곧 그 숲마저 없애버리는, 잔혹한 배반사였다.
강원도 홍천군과 인제군의 접경지대에는 방태산이 있다. 애초 방태산을 감싸안은 것은 사람도 아니었고 길도 아니었다. 오로지 땅의 키에만 승복하며 사는 물이었다. 방태산의 바깥쪽 허리를 휘감아 난 물길은 내린천이란 이름을 달고 흘렀다. 방태산의 안쪽은 숲으로 숲으로 이어졌다. 그 발길이 내닫다 숨이 가쁘면 계곡을 내고 골을 만들었다.
방태산의 숲과 골에는 정감록에서 삼둔사가리로 명명한 오지의 땅들이 있다. 월둔, 달둔, 살둔을 일컬어 삼둔이었고, 명지가리, 연가리, 적가리, 아침가리를 모아 사가리라 했다. 속세에서 난리가 나더라도 이곳에 들면 능히 피난을 할 수 있다는 곳이었다.
아침가리는 바로 그런 골 가운데 하나였다. 산이 깊어 아침 한나절에 잠깐 해가 들 때 밭을 갈아야 한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으로 전해져 온다.
1
스물 세 명의 일행이 월둔교를 건너 방태산 숲으로 들기 시작한 때는 아침 7시가 약간 넘은 무렵이었다. 이미 두어 시간 전부터 햇살은 여명마저 훌쩍 걷어낸 터였다. 서울에선 이부자리를 걷어낼 시간도 월둔에서는 한 나절이었다. 서너 군데의 감자밭을 지났다. 산나물을 채취하러 가는 이웃 주민들의 이동도 한동안 이어졌다. 이제 일행만이 숲으로 자취를 자꾸만 감추는 길 위에 남았다.
숲길에 들기 전에 일행은 몇 가지 약속을 챙겼다. 길잡이꾼보다 먼저 앞서지 않고, 뒷막이꾼보다 뒤로 쳐지지 않기. 통신도 무용지물인 곳에서 발길과 목소리 외에는 일행을 찾을 방법이 없으니 불가피한 구속이자 최소한의 약속이다. 이번 산행에서는 무엇보다 두 사람이 버팀목 같은 역할을 한다. 길잡이꾼은 적당한 발걸음을 유지해야 한다. 너무 빨리 내딛으면 갈수록 후미와 간격이 벌어진다. 또한 쉴 참을 놓치면 그만큼 일행의 몸은 부담을 느낄 것이다. 뒷막이꾼은 일행 가운데 가장 발걸음이 무거운 사람과 속도를 맞추어야 한다. 혹여 뒤쳐진 사람을 놓친다면 이 오지에서 좋지 않은 일을 당할 수도 있다.
이제 비로소 길이 숲에 들었다. 길을 따르는 일행 또한 숲에 들었다. 숲길의 초입은 숨가프지 않았다. 대지는 바다로부터 하늘에 닿으려 수직으로 족히 오륙백 미터는 올라왔을 법한데 내색도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나 일행은 배낭을 한번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다시 길을 나섰다. 길은 고개를 들고 경사를 만들었지만, 아직 일행 가운데 딱히 고통스러워하는 이는 없어보였다.
길은 여전히 가끔씩 타협하듯 고개를 틀며 숲으로 숲으로 머리를 감췄다. 숲길 한쪽으로는 행로를 찾지 못한 물이 잔잔히 흘러내리기도 했다. 골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길도 두어 번 가로질렀다. 작은 징검다리들이 발길을 도왔다. 어디서부터가 산행의 시작일까 궁금할 무렵에 이미 일행은 산에 깃들었다.
2
좌우로 몇 번 휘돌고 난 후 첫 번째 오르막이 눈앞에 펼쳐졌다. 구룡덕봉의 턱 밑쯤 되는 곳이다. 여전히 길은 임도였지만 길가의 나무들은 모두 서너 걸음씩 물러난 터였다. 그늘보다는 햇살이 주인이 된 지 오래였다. 이 고개만 넘으면 앞으로 몇 시간은 오르막을 만날 일이 없다. 6월의 햇살엔 한줌의 물기도 없었다. 아침 햇살인데도 여름햇살 못지않게 따가웠다.
그럼에도 일행은 제 나름대로 햇살을 피했다. 애초부터 선글라스와 모자를 준비한 이들에게는 또다른 패션의 장이었다. 선글라스를 쓴 모습은 한껏 멋까지 돋군 셈이었고, 밀짚모자는 주위의 부러움까지 함께 썼다. 아쉬운 대로 손수건을 머리에 감싼 이들 또한 독특한 멋을 풍겼다. 누구에게도 오르막에 비치는 햇살이 반갑지만은 않을 듯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행들의 뒤로는 거대한 초록숲이 어깨를 펴고 있었다. 마치 일행들은 그 초록의 숲으로부터 간신히 빠져나오는 미물들 같았다.
일행은 월둔교로부터 두어 시간을 걸어 오르막의 꼭대기에 올랐다. 그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왼쪽으로 난 오르막길은 구룡덕봉에서 멈춘다. 일행이 갈 길은 앞쪽으로 난 내리막길이다. 그쯤이 명지가리였다. 명지거리에서 일행은 그늘을 찾아 배낭을 풀었다. 몇몇은 간식으로 준비한 오이를 먹었다. 길잡이꾼부터 뒷막이꾼까지 모두 한 자리에서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길을 접어갔다. 이제부터의 길은 당분간 내리막이다.
어느새 일행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루었다. 앞서는 이들은 줄곧 앞쪽에서 걸었다. 뒷막이꾼과 벗하며 걷는 이는 시종 그 걸음으로 일행을 따랐다. “이 산길을 즐기며 천천히 걷겠다”는 것이었다. 앞뒤를 막론하고 둘이 걸을 때는 나란히 걷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길이 넓다는 점이 그러 장면을 허락해 주었지만, 동행인들이 원치 않는다면 그럴 이유도 없는 연출이었다.
애초 생각보다 내리막길이 제법 오래 이어졌다. 일부러 경사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평지와 다를 바 없을 정도의 내리막이었다. 그 내리막을 돌고 돌아 내려올 때쯤 왼편으로 수양버들이 군락을 이루었다. 계곡물 소리도 흘러들었다. 그쯤에서 기억을 떠올렸다. ‘이쯤 어딘가에 약수가 있다.’ 그 기억은 비교적 정확했다. 한 10분쯤 내려가자 계곡이 길 옆으로 바짝 붙었다.
그 길가로 희미하게 계곡으로 내려가는 쪽길이 보였다. 쪽길로 내려가 계곡을 두리번거려 약수터를 찾았다. 약수는 계곡의 한 켠에 있는 움푹한 웅덩이에서 뽀글거리며 솟아났다. 지난해 어떤 이는 ‘철분이 많이 함유된 탄산수로 설탕만 타면 사이다나 다름없는 약수’라고 했다. 일행의 후미에 섰던 대여섯 명과 함께 약수 맛을 보고는 다시 길을 따라 붙었다. 일행 가운데는 어디서 구했는지 지팡이로 쓸 만한 막대기를 든 이들도 제법 있었다. 등산용 스틱의 대용품이었다.
얼마쯤 지나자 일행의 양 옆으로는 터널 같은 숲길이 펼쳐졌다. 숲은 차 한 대 다닐 정도의 공간을 빼고는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갓 세상을 본 듯한 활엽수들은 연한 살결로 하늘거렸다. 일행은 숲이 열어주는 길을 따랐다. 산에 왔으되, 평지를 걷기보다 더욱 쉬운 길이었다. 토닥거리듯 재잘거리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던 일행에게 어느새 여유가 묻어났다.
처음 등산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산길을 걷는 데만 몰두한다. 첫 길이니 우선 몸이 힘들어서이기도 하고, 일행을 따라 가는 일도 힘드니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을 몇 번 타다보면 주변을 기웃거릴 여유가 생긴다. 그쯤 되면 산길만 보는 것이 아니라 길가의 나무를 보고, 앞쪽의 숲을 보며 주변 능선들을 통해 산세를 가늠하기도 한다. 비로소 풍광이 시야에 잡히는 법이다. 일행에게도 그런 여유가 생겼다.. 숲길에서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옆으로 드러난 능선에 가득 찬 초록에 탄성을 자아냈다. 방금 지나온 길 뒤로 쏟아질 듯 펼쳐진 녹음에도 감탄사를 보탰다.
3
명지가리에서 내려선 지 두어 시간이 지날 무렵 일행들 앞에는 다리 앞길을 싹둑 자른 계곡이 나타났다. 두세 군데 징검다리가 보이긴 했지만 물이 넘쳐 그냥 건널 수는 없었다. 그때 앞서던 일행들이 다투어 신발을 벗더니 물에 발을 담갔다.
“아이 차가워!”
곳곳에서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목소리들이 솟아올랐다. 열 걸음 남짓만 걸어가면 건널 물길이었지만, 몇몇 이들은 그 차가움을 즐겼다. 먼저 길을 건넌 이들은 발에 묻은 물기를 닦고 다시 신발을 신었다. 뒤늦게 당도한 이들 가운데 몇몇 역시 물에 발을 담갔다. 차마 물에 담글 엄두가 나지 않는 이들은 돌 서너 개를 더 놓아 보강한 징검다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틈에는 두어 명의 도우미가 끼여 손을 잡아 안전하게 건널 수 있게 도왔다.
그러는 사이 다시 일행의 첫머리와 후미가 만났다. 한 자리에 모인 후, 다시 길을 접으면 또다시 길게 늘어지는 일행의 발길은 한 시간 쯤 간격으로 상봉했다 헤어지곤 했다.
아침가리길엔 딱히 이정표가 없다. 굳이 이정표로 삼자면 구룡덕봉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길이 있고, 네다섯 시간쯤 지나면 만나게 될 옛 조경동분교 터 정도였다. 그래서 어디에서 쉬자는 얘기를 할 만한 이정표를 찾기가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지난해 가을에 찾았던 한번의 기억만으로 일행을 길라잡이 하고 있는 참이다.
다행히 길이 잘 나있고 큰 갈림길이 없기 때문에 걱정은 없었다. 그럼에도 최소한 세 번 정도 이정표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번째는 명지가리 언덕이었다. 구룡덕봉과의 갈림길도 있지만 언덕을 오르는 후미의 일행들과 한번쯤 묶어 주어야 이후 내리막을 걷는데 앞뒤 간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정표는 점심식사를 할 장소다. 아침가리에서 이십여 명이 넘는 일행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리저리 보아도 지난 가을에 점심을 먹었던 곳이 제격이었다. 길잡이꾼이 그 장소에서 선두 일행을 붙잡아둘 수 있게만 하면 됐다. 길잡이꾼에게 “몇 개의 작은 다리를 건넌 후 조금 긴 다리가 나오면 다리 오른쪽으로 제법 넓게 바위들이 펼쳐진 곳”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점차 오전 끝 무렵이 다가오자 일행의 앞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두 번째 이정표를 함께 찾기 위해서다. 다리를 막 건널 쯤 선두와 만났다. 다리 위에는 산악자전거를 타고 나선 라이더 세 명이 우리 일행과는 반대 방향으로 길을 잡고 오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점심식사 장소를 찾았다. 두 번째 이정표까지도 잘 찾은 셈이다.
4
점심은 도시락으로 미리 준비했다. 아침식사를 했던 광원식당에서 마련했다. 일행이 준비한 빈 용기에 밥과 반찬 서너 가지를 담았던 터 였다. 애초 식당에서는 손님이 많아 도시락 싸는 것을 꺼려했으나 몇 번 부탁을 했더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식당 주인은 도시락 값을 계산하는데 2만원을 더 드리겠다고 했더니 기어이 8천원 정도만 더 받았다. 상술보다는 시골의 정이 묻어나는 맛을 잠시 느꼈다.
도시락에 곁들어 준비한 것은 쌈밥이었다. 금요일 오후에 서울에서 장볼 때 산 상추와 쌈용으로 나온 참치캔을 반찬으로 내놓았다. 삼삼오오 앉아 식사를 마친 이들은 다시 제각기 휴식을 즐겼다. 몇몇은 제법 물이 고인 계곡물에 물수제비를 날렸다. 도시락과 함께 술잔도 돌았지만, 술을 즐기는 이들이 많지 않아 소주 두 병이 채 비워지지 않았다. 이제 반은 넘게 왔으니 조금 더 여유있게 가자고 했다. 남은 라면국물을 빈 용기에 넣는 방법으로 해결하고서 계곡을 빠져나와 다시 길로 올랐다. 여전히 뒷막이꾼은 뒷정리까지 하며 마지막으로 계곡을 벗어났다.
아침가리길이 경사를 낮추는 품새는 길 바닥의 경사가 아니더라도 옆으로 흐르는 계곡과의 높이로 봐서도 알 수 있다. 한동안 아침가리길은 계곡과 숨바꼭질을 하듯이 좌에 놓였다 우에 놓였다를 반복했다. 그 교차점에는 작은 시멘트 다리가 놓였다. 아침가리길이 점차 낮아져 물과 어깨를 견준다는 것은 그런 다리를 건널 때마다 확인된다.
다리가 확인해주는 또 다른 점은 자연의 흐름과 인간의 기술이 만난 부조화였다. 아침가리길에 놓인 대여섯 개의 시멘트 다리 가운데 대부분은 다리의 한쪽 귀퉁이가 허물어진 상태였다. 물이 불어나 흐를 때 다리 밑으로 흐르지 않고 다리의 한 귀퉁이를 허물고 지나간 결과다. 물살이 거센 탓도 있지만, 다리를 놓을 때 물의 흐름을 잘못 가늠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게 부서진 다리 세 개를 지났다. 그때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손을 내밀어 일행을 도왔다. 이제 길은 거의 평지까지 내려왔다 싶었을 무렵, 왼쪽 숲에 수백그루가 늘어선 자작나무밭이 나왔다. 자생적이라기보다는 누군가 일부러 키우는 중인 듯 했다. 흰 줄기가 단연 으뜸인 자작나무는 지난 가을 단풍이 들 때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자작나무숲을 지나자 이제 오른편으로는 밭으로 이용하기에 딱 좋은 평지가 펼쳐졌다. 지난 가을 수백 그루의 단풍나무가 떼을 지어 심어져 있었는데 그새 모두 팔려나간 모양이었다. 이윽고 아침가리길에 든 지 처음으로 인가를 만났다. 예전에 조경분교가 있던 터로 근처에는 서너 집 정도 살만한 정도의 밭이 듬성듬성 드러났다. 이곳의 지명이 아침가리다. 큰 계곡에 걸맞게 제법 큰 다리가 놓인 곳에서 일행은 다시 멈췄다.
5
이제 흙길에서 시멘트 길로 바뀌었다. 일행은 후미가 도착할 때까지 길가에 제각기 편한 자세로 휴식을 취했다.
대여섯 명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몇몇은 조금 지친 기색이 보였다. 길보다는 한 여름같은 햇살에 지친 모양이었다. 다시 남은 오이를 나눠먹고 물을 마시며 기운을 가다듬은 일행은 선두부터 길을 올랐다.
이제 좋은 때는 다 간 셈이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길은 한동안 오르막이다. 지나온 것처럼 환상적인 숲 터널도 없다. 햇살을 가릴 여지가 없는 셈이다. 길바닥도 흙이 아닌 시멘트다. 길이 경사를 더해 갈수록 삼삼오오는 점차 한두 개의 점으로 흩어졌다. 모두들 제 기운껏 발길을 내딛었다. 서로들 나누는 말수도 줄어든 듯 했다.
기실 길 위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짐이 되는 법은 없다. 함께 나선 순간 이미 서로들의 필요에 의해 동행이 된 셈이다. 설령 걸음이 조금 늦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짐이 아니라 우리의 일정이 그만큼 늦어지는 것뿐이다. 아마도 조금 늦은 사람은 그 순간에 자기보다 걸음이 빠른 일행을 보며 우리의 일정이 그만큼 빨라지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게 모자라고 채우는 과정이 곧 길을 동행하는 것이므로 빠른 이든 늦은 이든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
오르막을 한참 오르다가 오프로드에 나선 수십 대의 4륜구동 차량을 만났다. 각 차량에는 장애인을 한두 명씩 태웠다. 어느 오프로드 동호회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나들이를 나서는 행사 중이었다. 우리 일행 가운데는 차들이 지날 때마다 손을 흔들었고, 차에 탄 장애인들도 함께 웃으며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지난 가을 이 오르막을 오를 때는 고비라는 느낌이 들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래도 참을 만했다. 그보다 이 오르막길의 굽이는 사람을 지치게 하기에 딱 좋았다. 저 굽이만 돌면 분명히 끝날 것 같은 산세인데, 굽이를 돌고나면 다시 길이 이어졌다. 그런 상황이 대여섯 번 이뤄지고 나서야 비로소 오르막이 끝았다.
오르막의 정점에 다다를 무렵 일행이 가진 물도 바닥났다. 오미도 떨어진지 한참 되었다. 그 무렵에서 언제 끊긴지 알 수 없던 시멘트길이 다시 나타났다. 이제 내리막길이라는 징표다.
아침가리길은 홍천군 내면과 인제군 기린면을 잇는 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각각의 초입에는 고개를 한 개씩 두고 있다. 마치 접시 끝부분이 약간 치켜 올라간 후 가운데는 평지를 이루듯 아침가리길의 단면도가 그러했다. 그 가운데 인제군에서 아침가리로 가는 길은 경사가 몹시 가파르다. 아침가리에서 올라온 시멘트길이 그러했듯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로 가는 내리막 또한 그에 상응하는 경사를 가졌다.
일행 가운데는 내리막을 걷는데 뒷걸음으로 걷는 이들도 있었다. 길 주변 산에는 사람 키의 수십 배는 돼 보이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는 또다른 맛이었다. 내리막을 얼마쯤 지나 다시 앞쪽 일행을 뒤쫓았다. 이제 세 번째로 이정표를 잡아주어야 할 곳이 멀지 않았다. 세 번째 이정표는 방동약수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 길은 길이 거의 끝날 무렵에서 오른쪽으로 난 비탈길이었다. 그러나 대로에 붙은 쪽길이라 모르는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바로 입구에 비석이 있지만 그 역시 무심코 지나면 인식하기 어렵다.
나무숲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비탈밭이 보일 무렵 길잡이꾼 일행이 보였다. 그리고 선두에 막 다가설 무렵 방동약수길이 나왔다. 첫 일행을 그쪽으로 안내하고 20여분쯤 지나자 후미의 일행들이 나타났다. 그로써 아침 7시 20분에 월둔교를 건넜던 일행은 오후 4시 무렵에 방동약수에 도착했다. 짐작했던 시간보다는 오래 걸렸지만, 딱히 어느 누가 뒤쳐지거나 오래 쉰 적도 없는 듯해 내 짐작이 조금 빡빡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무사히 긴 여정을 마쳤다.
에필로그
아침가리에 인간이 낸 첫 길에도 이제 제법 속도가 붙은 터였다. 굳이 돌아가는 ‘불편’을 감수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산길은 재잘재잘 휘기보다 직선의 자유를 제법 길게 확보했다. 혼자 걷기엔 여유로운 폭도 갖추었고, 계곡과 만날 땐 시멘트 다리를 놓아 굳이 계곡 물에 맞춰 몸을 낮춰야 하는 수고도 덜었다.
그럼에도 아침가리 길은 직선의 자유에 완전 투항하지는 않았다. 길은 비록 나무의 흐름을 갈라놓긴 했지만 숲의 흐름까지 방해하진 않았다. 덕분에 길은 계곡을 넘나들면서 놓았다. 두어 사람이 나란히 걷자면 나뭇가지가 어깨에 올라 말을 건네는 때가 제법 이어졌다. 하늘을 가린 채 머리와 머리를 맞대고 그늘을 내려 나그네에게 친절을 베푸는 길도 적지 않았다. 몇몇 4륜구동차를 제외하고는 속도의 전도사들인 자동차의 접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속도의 욕망이 아직은 덜 스며든 곳, 자연과 벗하려는 인간의 심성이 조금씩 고개를 드는 곳. 그만큼에 아침가리가 있었다. 그 욕망과 심성의 기로에서 아침가리는 그 무엇도 먼저 선택하진 않을 것이다. 선택은 늘 인간의 몫이었다. 다만, 다른 모든 자연이 그렇듯 아침가리 또한 인간이 선택한 그 후에 그에 상응하는 그 무엇을 취할 것이다. (2007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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