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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랑 놀랑

잡지는 정성이고 협상이며 약속입니다

 


1. 

잡지는 정성입니다.

단 한 장의 사진을 위해 때론 자신을 수십 가지 자세로 비트는 사진가의 땀이 없이 잡지는 표정을 지을 수 없습니다. 시골구석이라도 마다 않고 발길을 내딛거나, 수십 가지의 자료를 헤집는 글쓴이의 땀 없이 잡지는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마지막 디자인을 결정하기까지 수많은 구상을 쏟아내야 하는 디자이너의 노력 없이 잡지는 안정된 자세를 취할 수 없습니다.

한번 읽은 원고를 두 세 차례 살펴봐야 하는 교정․교열도 정성입니다. 마침표 한 개 때문에 마감이 두세 시간 밀려도 다시 필름을 뽑아내는 고집스러움도 실은 정성일 뿐입니다.


잡지는 약속입니다.

잡지는 창간호가 발행되는 때부터 독자들과 수많은 약속을 맺습니다. 주간지든 월간지든 발행주기와 발행일은 가장 기본적인 약속입니다. 발행일은 잡지에겐 생존과 관계되며 또한 자구책이기도 합니다. 유사한 잡지들과 경쟁하는 마당에 하루 이틀 늦게 서점에 놓인다면, 그만큼 독자들의 관심을 적게 받습니다. 

잡지의 약속은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곳곳에 있습니다. 창간될 때 들고 나온 제호며, 글씨체, 표지를 구성하는 방법 등은 하나의 약속이 됩니다. 기획할 때 만든 꼭지 이름이며 성격, 진행방식 등도 약속이 됩니다.

 

디자인 편집에도 약속이 있습니다. 전체 분위기를 어떤 흐름으로 갈 지, 꼭지마다 어떤 특성을 두고 디자인 할 지 등 그 모든 것이 약속입니다. 기사 작성 또한 약속의 연속입니다. 책이름이나 영화 제목은 어떻게 표기 할 지, 인용기사는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지 등 그 모든 것이 약속입니다.


가장 중요한 약속은 편집방향입니다. 그만큼 지키기 어렵기도 합니다. 잡지의 다른 약속들은 규정과 방침으로 유지할 수 있으며, 약속이 지켜지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편집방향은 확연히 눈에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한 꼭지 한 꼭지가 모여 만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수백 개 조각으로 이뤄진  모자이크에서 한 개의 조각이 바뀐 것을 눈치 채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이 세월을 두고 지속된다면 모자이크는 전혀 다른 그림이 돼 있습니다. 잡지가 방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약속이 일관성을 지향하듯, 잡지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따라서 잡지의 약속은 매호를 다른 내용으로 채워가면서도 그 잡지가 태어날 때 가졌던 목적을 잃지 않고 바로 커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 일관성은 글 읽는 이들로부터 신뢰를 얻게 되는 기반이며, 그 신뢰는 곧 독자들로부터 생명을 얻는 밑거름이 됩니다.

잡지가 글 읽는 이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면 존재 그 자체를 인정받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잡지는 약속을 갖고 태어났다가 약속을 잘 지키는 것으로 생명을 유지하며, 약속을 하나 둘 어기면서 그 생명력이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잡지는 협상입니다.

잡지를 만드는 과정은 협상에서 시작해 협상으로 이뤄집니다. 거기엔 잡지를 만드는 모든 이들이 참여합니다. 글 쓰는 이, 사진 찍는 이, 편집하는 이, 제작하는 이, 유통하는 이…. 최근엔 이것으로도 모자라 잡지를 읽는 이들이 참여하기도 합니다.  


한 꼭지를 마무리하는 데도 협상은 이뤄집니다. 꼭지에 실릴 글, 꼭지에 필요한 사진 혹은 그림, 이 두 요소로 적절하게 구성할 디자인, 이 세 영역이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해 적절한 협상이 필요합니다. 기본적으로 글 쓰는 이는 자신이 고생해서 작성한 글이 한 줄도 빠짐없이 실리기를 희망합니다. 사진가나 일러스트레이터는 자신의 사진이나 그림이 제대로 부각되기를 바랍니다. 디자이너는 좋은 편집을 위해서는 사진이나 글이 조금 희생되더라도 불가피하다고 말합니다. 이 세 영역은, 이 세 영역을 맡은 이들은 단 한 꼭지를 두고 협상해야 합니다.


이런 한 꼭지 한 꼭지의 협상이 모여 이번엔 잡지의 협상이 이뤄집니다. 잡지의 내용을 좀 더 실속있게 짜려는 편집장과 유통에 좀 더 보탬이 되는 내용을 넣었으면 하는 영업자, 제작과정에서 안정된 일정과 충분한 기술을 발휘하려는 제작자간에 협상이 이뤄집니다.


사람끼리의 협상은 어느 협상이든 쉽지 않습니다. 일만을 두고 벌이면 좋겠지만, 감정을 걷어내고 일만으로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잡지는 매번 정해진 시기에 발간됩니다. 100% 만족했든, 80% 만족했던 그것이 협상의 결과입니다. 

잡지를 두고 누구와 무엇 때문에 협상을 하든, 그때마다 기준은 글 읽는 이입니다. 잡지에 생명을 주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잡지는 정성과 약속과 협상이 공존합니다. 이 공존의 원칙은 명확합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협상을 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성을 들입니다. 어떤 협상도 약속을 깨는 방향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때론 그것이 불가피하여 타협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약속을 저버리는 결과로 이어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약속을 저버리면 글 읽는 이들이 떠나며 궁극에는 잡지의 생명이 사라지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2.  

지금까지 올라온 모든 원고를 퇴짜 놓았습니다.

잡지 마감 일정표를 보면 갈 길은 바쁜데, 주 직업인 직장을 봐도 연말이 다가올수록 이것저것 챙길 것들이 늘어나는데, 완료된 원고를 담을 바구니는 여전히 비어있는데, 고생하며 취재하고 머리 쥐어짜며 작성한 원고들을 모두 퇴짜 놓았습니다. 


낯선 거리를 몇 번째 휘돌며 취재원 찾기도 어렵고, 어렵사리 찾은 취재원도 제대로 얘길 해주지 않고, 취재를 끝마치고 나서도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원고로 또 고민이 이어질 듯 합니다. 그 모든 과정이 빨리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솟구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하루하루 어김없이 '착실히' 흘러갑니다. 이대로만 꼬박꼬박 흘러가주면 애초 잡았던 일정들은 충분히 넘길 수 있습니다.   


이곳 카페에 올라오는 글들도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그만큼 모두들 바쁘고 무엇인가 한두 개씩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들이 쌓이고 쌓이고 쌓이는 중입니다. 200개의 글이 올라오기까지도 며칠 남지 않은 듯합니다.

카페에 글이 바쁘게 쌓이니 저 또한 바빠집니다. 최근에는 매일 서너 개의 문자 메시지가 핸드폰을 울립니다. 때론 문자로 답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통화로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제 이곳 카페를 드나드는 일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한번, 점심 때 짬을 내서 한 번,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까지 두세 번 카페를 드나듭니다.


카페도 바쁘고, 글쓰는 이들도 바쁘고, 그것을 지켜보는 이도 바쁘고…. 

이 바쁜 시간에 엄동설한을 뚫고 봄을 알리려 겨우 고개를 내민 새싹과 같은 원고들에게 무참히 퇴짜 놓고 있습니다. 

그동안 들어온 원고들이 애초 기획 방향이 맞지 않으면서 자꾸 타협하려 합니다. 처음이니까, 이런 잡지도 처음이고, 기사 쓰는 것도 대부분 처음이니까 이 정도면 됐다고 타협하려 합니다. 고생하고 있으니까, 처음 해보는 일이고 별로 대가도 크지 않은 일이니까  이 정도면 됐다고 타협하자 합니다.


글을 쓰고 있는 분들이 스스로와 타협하고, 제가 글 쓰는 분들과 타협하고, 제가 스스로와 타협하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침내는  

우리 모두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잡지와 타협하려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까요?

그럴까요? 이쯤에서 타협할까요?


3. 

지난 8월 우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잡지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했습니다. 딱 그 정도의 고민으로, 말문을 텄고 서로 만났습니다. 이후 몇 차례 회의에서는 그 고민에 뼈를 세우고 살을 붙였습니다. 어떤 용도로 쓰일 지도 모른 채로 기획안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식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첫 걸음을 떼는 이들이라면 으레 겪는 통과의례일 뿐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할 이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어 달 동안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좀 더 모양새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의무처럼 몇 개의 취재거리를 안고 헤어졌습니다. 


무더위는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는 가을마저 뒷모습입니다.


그동안 저는 석 달을 보내면서 8월의 첫 꿈에 몇 가지 생각들을 보탰습니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잡지의 원형을 탐구했습니다. 아직은 미미하지만 그 여정에서 ‘지역’과 ‘소통’과 ‘아줌마’라는 세 가지 단어를 주웠습니다. 그동안 흔히 보았던 이 단어들을 어찌 모으면 빛을 발할 지 그 틈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잘 된다면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잡지의 생각, 잡지의 철학이 다듬어지게 됩니다. 이 생각이 다듬어지면 잡지의 약속이 더욱 굳건해집니다. 


지역(민)과 만나는 방식도 이번보다는 좀 더 현명한 방식이 있을 듯 합니다. 지금처럼 맨땅에 헤딩하지 않아도 우리가원하는 취재원들을  발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지역’과 ‘소통’이 이뤄지는 계기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직 우리의 약속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지만, 다음에 이 잡지를 만든다면 30%정도는 성형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한 켠에 모아 둡니다. 우리가 이번에 정성을 다하고 협상을 잘해서 잡지의 약속을 무난히 지켜낸다면 그 다음은 무엇일지도 생각합니다.

비록 허망한 꿈일지라도 부지런히 생각을 굴립니다. 하루아침에 이뤄진 꿈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서둘러 생각들을 정리할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불쑥 불쑥 솟아나는 생각들을 두고 두고 살피면 그만입니다.      

  

어쩌면 이 좋은 꿈도 시대를 잘못 만나 생명을 꺾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곧 닥칠 전지구적 경제 한파에 잡지의 꿈은 아무런 주저함 없이 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이번에 만든 잡지가 땅 속에 단단히 박힌 씨앗이 되면 희망은 남습니다. 씨앗은 비록 한두 해 쉬더라도 생명을 다시 북돋는 때를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  


4.  

우리에게는 20여 개의 크고 작은 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 밭에서 각자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이제야 밭을 매는 이들도 있고, 수확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대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지금처럼, 좀 더 걷기를 기대합니다.

지금처럼, 몸으로 마음으로 부딪치기를 바랍니다. 

지금처럼, 스스로와 타협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그것만이 우리에게 맑은 빙점을 지닌 메시지를 가슴에 남겨줍니다. 왜 잡지가 정성이고, 약속이고, 협상인지 그 이유를 몸이 깨닫게 해 줍니다.


한 달 후,

잡지와 만나는 자리에 여러분 모두가 함께 하길 바랍니다.   (2008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