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랑 술 마시고 싶다.’
마감 디데이 하루. 퇴근하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밤 12시가 넘어 퇴근했다. 동료기자랑 버스를 타고 안암동까지 왔다. 동료를 보내고 다시 택시를 타야 했다. 1시. 집에 가는 버스는 이미 끊겨 버렸다.
택시를 기다리는데 횡단보도를 건너는 한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거리가 멀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선 택시가 쏘아내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비춘다. 몸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잠깐…. 여자는 횡단보도를 건너 버린다.
‘여자랑 술 마시고 싶다.’
다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생각한다. 여자가 있어야 한다. 술이 있어야 한다. 어디서 구하나.
여자…. 택시를 타던 곳, 안암동에서 5분이면 이른바 '미아리 텍사스촌'이 나온다. 걸어서 5분이면 족하다. 횡단보도를 두어 개 건너면 된다. 그러나 미아리에 있는 여자는 내가 찾는 여자가 아니다. 지금까지 그랬지만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혹여 취재가 아니라면. 매일 밤 남자들을 지배하는 그들 미아리 여인들을 어찌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찾는 여자가 아니다.
‘여자랑 술 마시고 싶다’
여자…. 섹스는 아닌 듯 싶다. 언젠가 소모임을 함께 했던 여자 후배가 있었다. 학교 후배가 아니니 잘 알지 못 했다. 다만 독특한 생활습성을 지녔다는 것뿐. 그 후배를 포함해 몇몇이 송년회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피드백 놀이를 했는데, 그 후배가 내게 쓴 글에 섹스 얘기가 나온다.
“외로운 사람 같아요. 매우 쓸쓸해 보여요. 속마음을 터놓지 않는 건. 후천성 애정결핍증 같아요. sex를 많이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텐데. 그런 면에선 소심해 보이기도 하구…. 조금 더 먼 곳에 있는 자신을 느껴 보세요”
그 때 다른 사람들도 날 그렇게 봤다. 말이 없어서 그랬을까! 그는 섹스의 긍정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아마 이 후배 말을 따르자면 지금 원하는 게 섹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하고는 조금 다른 무엇 같다. 내 마음이 갈구하는 것은.
‘여자랑 술 마시고 싶다’
술…. 소주도 아닌 것 같고, 양주는 애당초 나하곤 거리가 멀다. 맥주다. 술이 날 마시도록 말고, 그저 분위기에 취해 술을 마시고 싶다. 작은 글라스에 조금 조금 술을 따르고. 가볍게 잔도 부딪히며.
‘여자랑 술 마시고 싶다’
여자랑 술을 한두 잔 마시고, 얘기를 하고 싶다. 뭔가 얘기를 하고 싶다. 얘기를 들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다 서로의 대화가 끊기면 그 사이로 흐르는 음악에 잠시 취해도 좋다. 김광석은 그랬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라고.
“그 노래로도 그리움이 씻겨지지 않으면, 받을 사람 없는 편지로도 지워지지 않으면, 나는 벌거벗은 여인의 사진을 보며 그대와 나누지 못했던 사랑 혹은 눈물 없이 돌아서던 그대 모습을 너무 쉽게 잊을 수 있어.“(「너무 깊이 생각하지마」 김광석)
그래서 또 한잔 나눠도 좋다. 깊이 생각하지 말고.
‘여자랑 술 마시고 싶다’
여건이 된다면 춤을 추고 싶다. 땀이 나도록 헤드뱅잉도 하고 한없이 느린 리듬에 혼자서 추어도 좋다. 내가 추어도 좋고, 여자가 추어도 좋다.
이런 상상을 하다가 택시에서 내렸다. 술집이라고는 동네 어른들이나 들어갈 만한 곳들뿐이었다. 여자를 찾으려면 수유리 역에 내렸어야 한다. 아니면 처음부터 돈암동으로 갔거나, 좀 더 내처 노원역으로 갔거나.
집에서라도 술을 마실까! 그러나 1시가 넘은 시간, 문을 연 슈퍼도 없다. 더욱이 여자는 없다. 어둑한 골목길을 터벅이며 걸었다.
술 때문에 아침부터 편집장에게 깨지고 마지막엔 선배에게 뼈있는 한마디까지 듣고 밤 1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고작’ 여자랑 술 마시고 싶었다. 내가 왜 혼나야 하는지 몰랐던 것처럼, 그냥…. 집은 텅 비어 있었다. (1999.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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