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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0+31

내 몸의 반란, 구안와사



얼굴 반쪽은 나를 잊었다

홀로 감지 못하는 오른쪽 눈, 함께 열리지 않는 입술 오른쪽

찡그려도, 웃어도 얼굴 반쪽은 무표정했다.


미동도 없는 반쪽 얼굴에

십여 개의 침이 꼿꼿이 섰다


의지를 내리려 한다

다시 움직여라 한다


그렇게 사흘


입술 언저리에 떨림이 인다

잠깐, 아니 그보다 더 짧게

이번엔 눈언저리다 더 미세한 떨림이 온다


그게 희망이 된다

침상을 둘러친 하얀 커튼보다 더 밝은 빛이다



갑작스러웠다. 황당했다. 12일 오후, 얼굴이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는데, 입술이 벌에 쏘인 듯 퉁 부어 있는 느낌이었다. 한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마비가 되고 있었다. 그 전날, 뒤통수가 마비된 듯한 느낌이 왔었다. 그러다 말겠거니, 매달 마감 무렵이면 그랬으니, 저녁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저녁을 먹고 돌아와 예감이 이상해 취재 때 만났던 한의원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얼굴이 한쪽이 마비되고 입이 돌아가려고 하는 것 같아요

“어느 정도예요?”

- 왼쪽이 다 그래요.

“구안와사라는 병이에요. 그러다가 입이 돌아가요”

- 어떻게 하면 되죠?

“일단 따뜻한 수건으로 얼굴을 마사지 하세요.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저한테 오세요.”


회사에서 기사를 쓰다말고 수건을 빌려 얼굴을 마사지했다. 입술이 돌아간다면? 상상을 해보는데 별로 감이 오지 않는다. 황당해서 그러리라. 마음도 담담했다. 집에 일찍 들아와 수건을 얼굴에 덮었다. 졸지에 바보 되나! 기분이 엇갈렸다. 한 시간 여 동안 누워서 따뜻한 수건을 얼굴에 올려놓으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대로 입이 돌아갈 수도 있다는데, 자고 일어나면 입이 돌아가 있지 않을까. 그러면 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치유되지 않는다면, 기자 생활도 끝이겠군. 그럼, 이참에 시골로 내려가야 되는 건가.


13일. 아침 일찍 역삼역 근처에 있는 한의원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병이 더 도지지나 않은지 걱정이 된다. 서둘러 병원에 가고 싶은데, 마음만 바쁘다. 병원에서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환자인 나는 내심 불안한데, 의사는 시종 담담했다. 의사는 <말> 얘기며, 기타 시시콜콜한 얘기를 꺼냈다. 원인은 피로가 아닌가 싶단다. 구안와사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든 발병할 수 있다고 한다. 한 일주일간은 더 악화될 수도 있고, 입이 돌아갈 수도 있단다. 한 달 정도 지나면 80%정도가 회복된단다. 80%? 그럼 20%는 뭐지? 몇 가지 간단한 검사를 하고, 침을 맞았다.


무척 오랜만에 병원 신세를 졌다. 중학교 2학년 때 이후 처음이다. 침을 맞아보기도 생전 처음이다. 침을 맞는 동안 눈을 감고 누웠다.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얼굴이 마비되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마음이라도 편안히 갖자.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다.


안면마비 증상은 오른쪽 곳곳에서 나타났다. 병원에 올 때까지도 왼쪽이 마비된 줄 알았는데, 어젯밤에 왼쪽 얼굴에 수건을 올려두었던 수고가 무색했다.

마비는 정확히 얼굴을 반으로 갈라 일어났다. 신경이 마비되다 보니 찌르면 아픈 감각은 있는데 피부가 움직이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입이다. 오른쪽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밥 먹는 일도 수월하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씹다가 음식이 이와 입술 사이로 들어가면 도무지 빼낼 재간이 없다. 그러니 왼쪽으로만 씹게 된다. 밥을 먹고 나면 입술이 부르튼 듯하다. 웃지도 못한다. 웃으면 왼쪽 입술만 올라가 얼굴이 흉하다. 웃을 때마다 그 흉한 모습을 가리겠다고 자연스럽게 손이 따라 올라갔다.


오른쪽 눈도 감가지 않았다. 왼쪽 눈과 감으면 살짝 눈동자를 덮을 뿐, 혼자서는 감기지 않는다. 그러니 교정지를 오래 보고 있지도 못한다. 자꾸 눈물이 흐른다. 오른쪽 얼굴의 다른 부분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신기한 것은 이마까지도 마비되어, 평상시에 잡혀 있던 주름도 사라져버렸다.


14일. 점심을 먹고 났는데 얼굴이 더 아픈 듯 했다. 저녁에 구로동에 공연 취재가 한 건 있는데,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제 외고로 넘기라고 했을 때 넘기는 건데 그랬나 싶었다. 그때라도 외고로 넘길까 싶어, 아는 자유기고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는다. 할 수 없이 4시에 회사를 나섰다. 한의원에 들러 한약을 받았다. 한약을 먹기는 처음이다. 한약을 먹는 동안 먹지 말아야 할 음식들이 많았다. 돼지고기와 닭고기 밀가루 음식. - 개고기와 소고기는 괜찮단다. 술은 당연히 금주다.


16일. 여전히 목이 아팠다. 뒷머리도 마비된 것 같았다. 일주일까지는 더 악화된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대로인 듯싶다.


17일.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병원에 갔더니 담당의사가 나가고 없다. 다른 의사에게 침을 맞았다. 침을 놓는 곳이 다르다. 전에 의사는 귀밑과 입술, 이마 근처에 서너 개씩 놓았는데, 이번엔 눈가와 입술 주변을 집중해서 놓았다. 그 의사 역시 <말>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나도 이름을 들어 알고 있는 사이였다. 목이 아픈 얘기를 했더니 진찰실로 오라고 한다. 따라갔더니 누우라고 하고는 추나요법으로 목뼈를 고쳐준다. 의사가 목을 늘리더니 갑자기 한 곳으로 틀자, 뚜두둑 소리가 났다.


20일. 오른쪽 얼굴에 뭔가 움직임이 있다. 오른쪽 입술도 떨림이 있다. 그러나 무조건적 반사 같은 움직임이다. 오른쪽 볼에 힘을 주면 뭔가 미미하지만 힘이 가는 듯하다. 그러나 내가 움직이려는 의지를 보이면 그 떨림은 곧 사라져 버린다. 어떤 때는 눈 밑에 자잘한 움직임이 보이기도 한다. 이게 희망이 될까!


21일. 병원이 너무 멀어 회사 쪽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그동안 치료비를 계산하는데 의사가 안 받겠다고 해, 찾아가서 치료비를 내겠다고 하고 돈을 지불했다. 생각보다 많이 나오진 않은 것 같긴 한데, 치료비를 제대로 받은 건지 모르겠다.


22일. 집에서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가끔씩 거울을 통해 본 얼굴에 조금 기운이 돈다. 아주 미미하지만, 움직임이 보인다.


23일. 한참 망설이던 끝에 회사 가까이 있는 한의원을 찾았다. 지난주에 갔던 한의원의 의사가 권해주던 곳은 작은 듯해 다른 곳으로 갔다. 그곳 한의사는 60대 정도 되어 보였다. 안면 마비 때문에 왔다니까 맥을 짚는다. 그리고는 약을 먹어야겠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 지은 약을 먹고 있다니까 그럼 침이나 맞으라고 한다.

그런데 침을 놓는 이는 다른 의사였다. 왠지 초보같은 한의사였다. 기분이 약간 찜찜했다. 침을 놓는데 장난이 아니다. 침을 놓는 게 아니라 이건 침으로 얼굴을 쑤시는 거다. 아팠다. 고함을 칠 수도 없고 아픈 기운을 느끼면서, 내가 몸이 아프다는 게 정말 짜증났다. 이 좋은 날 이런 아픔을 견디며 이렇게 누워있어야 하나. 그런데 뚜렷하게 원망할 대상이 없다. 피곤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았는데 누구를 탓한단 말인가.


아픈 침이 하나씩 얼굴에 박힐 때마다, 스스로 몸을 버리려 했다. ‘내 몸이 아니다. 지금 아픈 곳은 내 몸이 아닌 다른 곳이다.’ 스스로 최면을 걸며 십여 대를 맞았다. 그런데 이번에 침을 놓은 의사는 지난번 의사들하고 또 다른 곳을 놓는다.

침을 맞은 채 누워 있는데, 자꾸 어깨가 굳는다. 긴장되었나 보다. 30여분 되었을까. 침을 맞은 후, 한의사에게 얼마나 지나면 낫느냐고 물었다. 한 두어 달은 가야 한단다. 그러면서 약을 먹어야 한단다. 순간 내 기분이 상했다. 약을 팔려고 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의사는 다시 맥을 짚어 보더니 “젊은 사람이 왜 이리 성격이 급해. 뭐 그리 신경 쓸 게 많아” 한다. 치료비로 보험 카드를 제출했는데 4천원이 나왔다. 지난번 병원보다 8백원이 비싸다. 나오면서 이곳에 다시 안 오겠다고 다짐했다. 

병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의료소비자의 입장에서 병원을 싫어한다. 병원은 목숨을 두고 ‘흥정’을 벌이는 곳이라는 편견이 있다. 그 흥정이라는 것이 무척 전문적이다. 그래서 의사에게 매번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이 약 먹으면 효과가 있는데 먹을래 안 먹을래. 그러면 누구든 거부 못한다. 낫는다는데. 수술도 마찬가지다.

이 과정에서 의사들은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 환자가 의료소비자라는 생각은 아예 없는 듯하다. 오늘 찾았던 한의원의 한의사에게서 그런 권위를 느꼈다.


24일. 얼굴이 많이 좋아졌다. 눈 밑에 피부가 조금씩 움직인다. 다른 한의원을 찾는 과정에 말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선배는 지난번에 추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들을 취재했다. 병원은 수유리에 있었다. 미리 전화로 연락을 하고 찾아갔다. 한의사가 맥을 짚어보더니, 속에 화기가 있단다. 그러면서 구안와사는 환자들이 못 참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침을 맞는 게 좋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한의원은 월~수만 근무하기 때문에 다른 병원에서 침을 맞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의사는 침을 놓아주고는 약을 주겠다고 했다. 신경을 풀어주는 귀한 약인데, 그냥 주겠다고 했다. 역시 침놓는 곳은 달랐다. 이번엔 팔뚝에도 침을 놓았다. 가끔씩 잘못 맞으면 피가 흐르기도 했다.


침을 맞고 약을 받아 나오는데, 의사가 진료중이라 인사도 못하고 나왔다. 진료비도 받지 않았다. 약은 그렇다 쳐도 침 맞은 비용이라도 낼 생각이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의사가 준 약은 10cc정도가 든 조그만 병 다섯 개였다. 잠들기 전후에 공복에 5cc씩 마시라고 했다. 5일분이었다.


27일. 이틀 동안 병원에 가지 못했다. 다행히 얼굴은 호전되고 있다. 점심을 먹고는 처음 갔던 병원의 한의사가 일러 준 한의원에 전화를 걸었다. 원장이 받았다. 이름과 달리 원장은 여성이었다.(나중에 알고보니 이유명호씨였다. 이게 인연이 돼 훗날 원고청탁을 하기도 했다.) 병원이 이사중이라 두 시 정도에 오라고 했다. 진찰은 좀 더 자세히 이뤄졌다. 아플 당시에 체했느냐, 과음하느냐, 과식하느냐 등등의 질문을 했는데, 모두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얼굴에 맞고 뒤통수에도 몇 방을 맞았다. 얼굴 마사지도 잠깐 했다. 의사 왈, “얼굴에 감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낫지 않는다.”


28일. 토요일이다. 오전에 회사에 출근을 했는데, 12시 무렵 머리 뒤통수가 아프다. 지난 번 병이 왔을 때와 같은 증상이다. 곧장 퇴근해 집에서 잠을 잤다.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어제 병원에 들르기 전부터 그랬다.

어쩌면 몸의 또 다른 곳이 아픈 것은 아닐까. 구안와사는 그 중의 한 가지 증상이 아닐까. 며칠간 계속 된다면, 머리 속을 진단해야 하지 않을까. 얼굴은 예전에 비하면 무척 좋아졌는데, 다시 도져 오는 뒤통수의 증상이 마음에 걸린다.


29일. 이 글을 쓰느라고 컴퓨터를 치는데 여전히 뒷머리에 감각이 없는 듯하다. 이대로 가다간 다음 달은 일을 제대로 못할 것 같다.


30일. 얼굴은 상당히 호전됐다. 오른쪽 눈이 혼자서도 감긴다. 예전엔 왼쪽 눈을 감아야만 따라서 감겼다. 그러나 여전히 뒤통수가 아프다. 침을 맞으러 갔는데, 뒤통수에 10여 개를 꽂았다. 얼굴에도 맞았다. 그래서인지 치료비가 6천원이 됐다. 의사 왈. “얼굴이 무서우니까 나으면 자주 웃어요.”


31일. 다시 뒤통수와 얼굴에 침을 맞았다. 이번엔 발가락에도 맞았다. 침을 맞고 나서 이번엔 머리에 뜸을 놓았다.

아픈 일은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았다. 괜히 걱정만 하실 것 같았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이라 했다. (19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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