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비가 내립니다. 다시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한답니다. 8월초 선배가 전남․광주 지역취재를 떠날 무렵에도 태풍은 한반도에 상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선배에겐 또다른 태풍이 마음속에 다가오고 있었나 봅니다. 7월, <말> 모꼬지에서 밤새워 술을 마시고는 외롭다고 했었지요. 그 외로운 마음 한편에서는 지난 80년대 마저도 외롭게 만들 태풍이 불고 있었나 봅니다.
그저께 형수를 만났습니다. <말> 10월호를 챙겨 들고 강진 촌놈과 함께 성내역으로 갔습니다. 원고 마감한다고 선배 소식도 제대로 묻지 못해 미안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씻을까 싶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책이 나오거든 찾자고 했었습니다. 애초 생각은 형수랑 아이들하고 저녁이나 할까 했습니다. 그래 집 근처에서 고기나 먹자고 강진 촌놈과 약속했습니다. 형수는 혼자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다른 곳에 맡겨 두었다고 했습니다.
<말>을 형수에게 건넸고, 형수는 그 자리에서 몇 쪽을 읽었습니다. 고기와 소주를 시키고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아무래도 선배에 대한 얘기가 많았지요. 그 동안 변호사를 선임하면서 어려웠던 일이며, 선배가 잡혀가기 전까지 술을 마시며 괴로워하며 겪었던 갈등이며. 그럼에도 형수는 당차 보이더군요.
“양쪽에서 자기(선배)를 안 놓아준다고 했다. 둘 다 포기하라고 했는데, 그러면 자기가 죽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랬다. 그러면 죽으라고.”
얘기가 무겁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냥 편하게 듣고 싶었습니다. 형수 역시 얘기를 편하게 했습니다. 예전에 술을 마시고 늦은 시간에 집에 쳐들어간 적 밖에 없는데도, 무척 오래 전에 보았던 이들처럼 얘기를 나눴습니다.
선배는 형수와 얘기를 많이 나눈 듯 했습니다. 형수는 선배가 이미 ‘간첩’활동에 대해선 예전에 접었을 거라 했습니다. 저간의 이런저런 행동들이, 말들이 형수에게 그런 믿음을 주었던가 봅니다.
저는 선배가 조만간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얕은 희망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형수를 만나는 날, 낮에 다른 월간지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우연히 제가 받았는데, 언젠가 국가보안법 관련 기자모임에서 선배랑 함께 만났던 그 선배입니다. 국정원을 출입하는 그 기자는 저를 알아보고는 선배에 대해 5분 가량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면서 그 선배가 그러더군요.
“98년 10월 이후 별다른 혐의가 없다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 이야기도 형수에게 들려주었습니다. - 이 글을 쓰고 난 후, 들은 소식으로는 선배는 기소되었다고 하더군요. 이별이 다소 길어질 듯합니다.
아울러 형수에게 <말> 분위기도 들려주었습니다. <말>에서 선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 사람들, 특히 윗분들일수록 더욱 그렇다고.
형수랑은 11시 무렵까지 함께 했습니다. 형수는 그 무렵 누군가 찾아와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번 사건을 달리 해석하는 사람들이 대책을 세우겠다는 자리인 듯한데,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듯 했습니다.
형수랑 선배랑 함께 술 한 잔 함께 하자는 약속은 그날도 결국 지키지 못했습니다. 예전엔 제가 아파서 미뤘는데, 이번엔 선배가 긴 침묵을 두고 떠나버려, 또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수랑 마지막에 나눴던 얘깃거리는 <말>이었습니다. 그 동안 선배가 <말>에 쏟았던 관심만큼 형수도 <말>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더군요.
마감을 거의 끝낼 무렵이었나 봅니다. 형수가 사무실로 찾아왔었습니다. 그리고 30분쯤 지나 선배의 책상 위에 올려진 짐을 비우라고 국장이 얘길 하더군요. 다른 두 기자들이 빈 박스에 책이며 자료를 정리했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기자가 그러더군요. 벌써 짐을 치우냐고. 그러나 짐을 치우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잠시 짐을 치우던 기자들이 담배를 피우러 나갔을 때, 데스크가 나머지 자잘한 짐들을 하나하나 치웠습니다.
그때, 이번 사건이 곧 선배와의 이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배가 ‘공소보류’로 나온다 하더라도 사무실에서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전에 이미 선배의 사직서를 받았음에도 말이지요. 내 맘 때문에 그렇게 비쳤을까요. 데스크의 손놀림은 무척 더디었습니다. 저는 마감할 원고를 채 정리하지도 못했으면서도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감상적이라고 할까요. 뭔가 씁쓸함이 마음을 쓸어 내렸습니다.
선배가 간첩이라는 게 사실임을 알았을 때, 누구보다 단호하고 신속하게 대처했던 데스크였습니다. 그런 그이가 1년 가까이 함께 뜻을 맞추어 오던 선배에게 깊은 ‘배신’을 당해 채 마음에 상처도 지우지 못했을 텐데, 물건을 주섬주섬 거리는 모습이란 단순히 슬픔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70년대가 감싸안지 못했던 80년대를 쓰다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항만이 생존이고 정면돌파 외에는 달리 대안이란 게 없었던 그 80년대, 그 어떤 ‘무기’라도 서슴치 않고 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를 말이지요.
물건이 다 챙겨지고, 제가 자청해 짐을 바깥에까지 날라다 주었습니다. 형수에게는 별로 할 말이 없었습니다. 짐 박스를 자동차에 실어주고는 빈 손수레를 밀고 왔지만, 채 1년도 안된 선배와 보냈던 시간들은 짐 박스에 담지 못하고 고스란히 그 빈 손수레에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그 무거운 마음의 짐을 허물어뜨린 이는 강진 촌놈이었습니다. 원고 마감이 끝난 날 술자리에서 강진 촌놈이 혼잣말처럼 내뱉더군요.
“김경환 선배가 보고 싶다.”
그래서였을까요. 그날 밤 4시까지 강진 촌놈이랑 술을 마셨습니다.
선배를 알았던 많은 사람들이 서운하다고 말하더군요. 적어도 나한테만은 알려주었어야 하지 않았겠느냐는, 그런 마음이 섭섭함을 부른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말>이 가진 입장이야 어떤 지는 충분히 짐작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에 비춰보면 이번 사건을 둘러싼 선배와 <말>의 관계는 어떤 이유에서든 선배가 잘못 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선배에게 섭섭함을 느낍니다. 아쉬움도 많이 남습니다.
미술부에서 일하던 한 명이 그만두었습니다. 간첩단 사건이 터진 후, 부모님들이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더군요. 더욱이 남편이 군인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것도 또다른 분단의 잔영이겠죠.
간첩단 사건이 발표된 때부터 학교 후배가 내게 묵곤 합니다. 후배는 선배와 내가 몇 번 산에도 함께 같던 것이며, 가끔씩 세풀에 등장하는 <말>의 그 선배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형은 기분이 어때?”
“…담담해.”
그런데 후배는 내 이 기분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못내 아쉬운 듯 10여 일이 지나도록 되풀이해 묻곤 합니다. 후배 역시 대학다닐 때 운동을 했고, 여전히 운동에 대해 애정을 가진 녀석이기에 그냥 쉽사리 넘길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나에 대한 이런저런 걱정도 한몫 했나 봅니다. 그럼에도 전 지금 이 순간까지 담담할 뿐입니다.
‘간첩,’ 무서울 수도 있을 법한데, 그런 마음이란 애당초 없었습니다. 그런 내가 이상스러워 스스로 ‘안보불감증’이란 그 어울리지 않은 단어를 떠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주워들은 정보들로 판단컨대, 선배는 분명 ‘간첩’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경험에 미뤄 본다면, 선배를 여전히 ‘간첩’이라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간첩을 미화하는 말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언젠가 산을 오르면서 선배가 그런 얘기를 했었습니다.
“정해진 규율에 맞춰 조직생활을 한동안 했다. 그 조직에서는 사람의 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시를 썼는데, 그게 조직생활에 망해 된다고 쓰지 말라고 했다. 그게 무슨 조직이냐. 사람의 감성을 인정하지 않는데…”
큰 덩치에 맞지 않게 여린 감성을 가진 선배는 그 얘기를 서너 번은 했던 듯합니다. 물론 그 조직이 이번에 거론된 ‘반제청년동맹’인지 ‘민혁당’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
그 밖에도 북한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얘기들이며, 영성에 대한 관심이며, 생태와 환경을 바라보기를 잊지 않았던 마음이며, 그 어떤 얘기들에도 마음을 열어두었던 것이며, 섬세한 감성의 자락들까지. 그런 것들을 ‘간첩’의 그것으로 돌려버리기엔 정치적이어야 할 ‘간첩’이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그래서 담담했습니다. 선배가 과거에 간첩일 수는 있겠지만, 현재는 아니라고 믿기에 담담했습니다. 역시 국가보안법은 폐지되는 게 마땅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제 사상의 자유를 무척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합니다.
한때는 제 담담함을 스스로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 사회의 허약한 구조가 떠올랐습니다. 과거에 간첩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바꾸고자 했을 때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 지, 우리 사회는 아직 그런 것까지는 마련해 두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수’라는 것은 곧 조직에 대한 배신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을 묶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그 ‘자수’란 우리의 양심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기에, 그리 유쾌한 수단은 아닙니다. 그러니, 한 시절 우리 시대의 굴곡을 헤쳐가기 위해 잡았던 막대기를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때론 그 막대기는 발을 걸어 넘어뜨리기도 하고, 마음 한곳을 푹 찌르기도 했겠지요.
형수와 술을 마신 날 형수는 선배에게 왔던 편지를 주었습니다. 광주취재를 청탁했던 이로부터 온 안부 편지였습니다. 선배 주변에 있는 이들이 그렇듯 글을 쓴 이 역시 선배의 카리스마에 빠진 듯합니다.
“기자님도 가끔 무슨 일인가 하시다가 창밖을 바라보시나요. 늦여름의 햇살 아래를 걷고 있는 사람들과 육중한 건물들의 그늘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나요. 거리에 늘어서 있는 싱그러운 가로수를 바라보시나요.”
어쩌면 무심하게 던졌을지도 모를 이 질문들이 오늘따라 유심을 담은 듯해 몇 줄 옮겨 보았습니다.
광주에서 올라온 편지는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혹시 다음에 기회가 되어 좀더 편하게 만날 수 있다면 기자님이 생각하시는 미래에 대해 들어보고 싶습니다. 환절기가 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미 시대의 환절기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이 환절기는 꼭 사람의 건강을 점검하고 가더군요. 다시 만날 때는 제가 형님으로 부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지금 선배에겐 그야말로 시대의 환절기일 것입니다. 분단의 바이러스가 만든 사상의 환절기를 지나 낯 선 계절에 부단히 적응하려 했을 선배에겐 어쩌면 지금이 그 시대의 환절기를 넘는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낯선 공간에서 선배 혼자 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없다면 외로움이라도 가까이 두십시오.
밤 12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여전히 창문너머 들리는 빗소리는 세찹니다. 이 비가 가을을 재촉할 듯 합니다. 아직 선배랑 함께 딛지 못한 백두대간의 자락은 많습니다. 그 능선들에도 비는 내릴 것입니다. 건강하십시오. (19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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