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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0+31

구치소 뜰 안에 선 가을 은행나무

 

선배, 

그것을 알 지 모르겠소.

그 맘쯤 거기 그 뜨락에도

가을은 참 부지런히도 살아가고 있더군요.


선배 면회를 가던 날

우리네는 무엇이 좋은지 마구 달려갔소.  

택시에서 내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그 뜨락으로 들어설 때

곳곳에 서 있는 은행나무를 보았소.

보려 해서 본 것은 아니었소.

내 맘이 먼저 그곳에 가 앉더군요. 

그 뜨락에,

즐겁게 맞이할 사람이라고는 없을 듯한 그 뜨락에 

저 홀로 가을인양 잎잎마다 노랗게 사연을 담았더군요.  


소리도 없이 속삭이는 은행나무의 가을사연을 듣다

선배와 나누려 몇 마디 준비했던 말들을 그들에게 들려줘야 했소.


이 가을 당신은 무슨 죄를 지어 온 푸름을 덜어내려 하는가!

해마다 겁도 없이 혁명을 꿈꾼 죄인가!  

한 뼘쯤이나 될까 그 만큼 더 높이 하늘에 닿으려 한 죄인가!

혁명이 그토록 아름다운가!

초록으로 모자라, 노란 빛깔로 세상을 물들이려 하나! 

잎새들 떨구고 나면 차운 겨울을 맨 몸으로 맞서려는가!

무엇을 가득 채우려고 미련도 없이 모든 걸 던져버리려 하는가!


혁명은 아름다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네.

하늘에 닿으려고,

혁명을 하자고 잎새들을 괴롭히는 것은 아닐세.

잎새들이 

하늘에서 돋은 잎새처럼 맘껏 초록생명을 얻을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내 흔들림 없이 이 자리를 지키려 하는 것일세.

이 세상에 버티고 서려는 것일세.

단단한 나무들만이 봄을 노래할 수 있고 

봄만이 또 한 생명을 가꿀 수 있지 않던가.

혁명은 아름다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네.

사는 게 곧 혁명인 걸

혁명이 없으면 내 목숨도 없는 거라네 

그러니 죽기 전까지는 언제나 혁명을 꿈꿀 수밖에.


그 날 함께 선배를 보러 갔던 친구가

시를 쓰겠노라고 담담히 말하기에

나 역시 쓰겠노라고 약속했건만

그 친구는 무엇을 가슴에 담아 왔는지 알 길 없고

나는 첫눈이 내렸다는 오늘에야 무엇을 쓰겠다고 나섰소.


후… 

그러나 내렸다는 첫눈이라고는 찾을 길 없어

차라리 다행이라 여기며 창문을 닫을 때 그때서야 깨달았소.

그 노랗던 가을날,

7분의 짧은 만남을 위해

며칠 전부터 마음이 울렁거렸던 그 가을날,

오가는 사람에게서나 서 있는 나무들에게서나 

좀처럼 초록빛깔이라고는 찾을 길 없던 그 뜨락을 나설 때

주춤거리던 내 가을은 차마 그곳을 나오지 못했나보오. 


아마 그곳에서 도란도란 은행나무의 삶을 배울 것이오.


훗날, 

선배가 그 뜨락을 걸어서 나올 때

내 가을이 앙상한 은행나무처럼 비워져 있을 때

그쯤에

죽도록 깊은 첫눈이 내 마음에 내리면 좋겠소.

하늘 끝까지 닿는 첫눈이 은행나무에 쌓이면 좋겠소.

혁명 같은 첫눈이 세상을 덮으면 좋겠소.

그 눈을 맞으며

선배에게 미처 들려주지 못한

늦가을에 내린 첫눈 같은 얘기를 전하리라.

노란 잎들에 쌓인 흰 눈보다 더 아름다운 얘기를 들려주리라.

 

선배, 

그것을 알지 모르겠소

이 맘쯤 거기 그 뜨락에도

가을보다 섬세한 혁명이 첫눈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199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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