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때였던가. 88년 어느 가을이지 않나 싶다. 아침을 제외하고는 빛이 들지 않는 작은 방에서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었을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어둔 방안을 돌고 있었다.
“거리에 가로등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차가운 바람만이 나의 곁을 스치면,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요. ……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그곳으로 떠나 버리고…“
나른한 오후, 무엇이 슬펐는지 그 노래를 듣고는 한참을 멍하니 누워 있었다. 그 당시 ‘그리운 그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건만. 사랑과 그리움이란 예나 지금이나 일상에 지쳐있는 이들에게는 쉽게 젖어드는 습성을 지니고 있나보다. 그 노래는 당시 감내하기 어려운 내 주변의 현실을 모두 싸잡아 내안에서 녹이려 했는지도 모른다.
시작 - 왜 김광석을 그리워하는가
김광석. 그이의 존재는 ‘거리에서’라는 노래를 통해 처음 알았다. 당시 ‘알았다’는 의미는 그런 노래를 부르는 동물원의 싱어가 김광석이라는 정도였을 뿐, 그이가 노찾사라는 민중가요 - 그 당시엔 이 말도 못 들어보았지만 - 를 부르던 이라는 것은 알 길이 없었다.
아무튼 그 날 ‘거리에서’를 처음 들은 이후,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녹음해 가사를 외웠다. 그 뒤엔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들었다.
대학 때, 그이가 솔로로 활동하면서 내놓은 음반들에서 간간이 노래를 듣곤 했다. 4학년 때던가. 후배 녀석이 내게 선물했던 테이프가 김광석 4집. 그 다음해 김광석이 자살하기 두어 달 전에 있었던 사은회에서 ‘일어나’를 불렀다.
김광석에 대한 내 기억은 이 정도뿐이다. 1천회를 돌파했다는 라이브 공연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서른 즈음에’ 등 몇몇 곡은 그런 대로 알고 있었지만, 참 빈약한 기억만을 가지고 있다.
96년 김광석이 그이의 영혼을 이 세상에서 스스로 거두어 간 후, 비로소 그이를 조금 더 가깝게 만날 수 있었다. 그이의 노래모음곡인 <인생이야기>, <노래이야기>를 들으며 그이가 남긴 그늘이 생각보다 넓다는 것을 막연하게 느꼈다. 그이가 남긴 노래를 듣노라면 말라버린 삶의 가닥을 보는 듯 했고, 미처 꾸어보지 못한 꿈도 꾸는 듯 했다.
그런 것 때문일까. 그의 노래엔 한적한 산길 같은 삶이 보인다. 조용히 읊조리노라면 어느 영화 한 편을 보는 듯 스스로의 삶을 쓸쓸하게 쓸고 지나가는 무엇을 느낀다.
올 안해 동안 세풀에 연재하고 싶은 <노래 김광석을 찾아서>는 거기에서 출발한다. 비에 젖은 삶의 물기를 닦아주듯, 피곤한 눈꺼풀을 살며시 감싸주듯 하다가도, 초롱한 눈동자에서도 금세 눈물을 자아내는 듯한 그이의 감성이 짙게 밴 노래로부터.
내가 벌이는 시작은 늘 시시했듯이, <노래 김광석을 찾아서> 역시 시시하다. 1월 초 어느 날, 그이를 찾는 작업을 해 보고 싶었다. 그이가 삶을 놓아버린 지 반 4년이 된 해이다.
그 첫 작업으로 이 글을 쓴다. 무엇을 찾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이의 죽음에 얽힌 여러 얘기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 그이가 세상을 바라볼 때 드러났던 감성시각, 그이의 짧은 청춘의 재구성 등등이 될 것 같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은 내 안에 있는 듯하다. 스스로 이 작업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 동안의 내 전력을 보건대 일 벌이고 마무리 못하던 게 나였으므로 잘 마무리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더욱이 갈수록 쫓기는 내 현실적인 시간의 빈곤 속에서 이 작업에 얼마나 시간을 투자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지금 말할 수 있는 답은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정도다.
이 글은 <노래 김광석을 찾아서>의 성과를 남기는 글은 아니다. 단지 김광석을 찾아가는 여정을 기록하는 글이 될 것이다.
김광석은 말했다.
“저는 환갑 때… 연애하고 싶습니다. 로맨스. 그냥 리을자만 들어도 설레죠. 로맨스. 꼬웃음치지 마십시오. 그때까지 그렇게 정열이 남아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뭐 바란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니죠. 번개처럼 그렇게 번쩍 해 가지고 정신 못 차려야 되는 거죠.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바람입니다. 환갑 때 로맨스.”(「인생이야기」중에서)
김광석은 말했다.
“89년 여름 버스 안에서 이 노래(「어느 60대 노부부이야기」) 듣고 울었어요. 다 큰 놈이 사람들 많은 데서 우니까 참느라고 창피해서, 크으윽 막 이러면서 억지로 참던 생각납니다.”(「인생이야기」중에서)
스스로에게 다짐하길, 이 일에 집착하길 바란다. 혹여 걷다가 넘어지더라도 눈만은 목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끈질긴 집착을 하길 바란다.
그 집착의 끝에서 환갑에 연애를 꿈꾼 로맨스트였고 감성주의자였던 김광석을 만나고 싶다. (2000.1.)
'서른의 생태계 > 서른의 생태계30+31' 카테고리의 다른 글
31과 12분의 1 (0) | 2009.07.25 |
---|---|
재회 이후, 잡념들 (0) | 2009.07.25 |
서른 한 살 (0) | 2009.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