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친을 다시 만났다.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애초 지난달에 글로 쓰려 했는데,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사실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번엔 시간이 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글쎄… 아무튼…, 뭔가 내 마음을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스스로에게 꺼림칙한 게 있다.
그래서 이 글 역시 쓰려고 마음먹은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아직도 쓰지 못하고 있다. 지금 쓰는 이 글도 주제에 대해선 달리 생각이 없다. 그냥… 쓴다. 내 생각을 이리저리 풀어놓으려 한다. 생각에 일관성도 없을 것 같고, 못된 생각이 들통 나지 않을까 싶긴 하다. 그럼에도.
첫 번째 잡념 - 결혼, 공상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혼은 그리 복잡한 게 아니다. 보통의 남녀라면 누구라도 만나서 함께 살 수 있다. 서로에게 큰 욕심이 없다면 적당히 잘 살 수 있다.
결혼의 내용은 살면서 만들면 된다. 결혼 이전에 이런저런 구상을 해도 막상 결혼하고 보면 그 구상들이 공상에 가까웠음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공상을 없애는 두 가지 방법. 결혼할 때 아무런 구상도 하지 않는다. 아니면, 구상이 공상이 아닐 수 있도록 최대한 서로의 의견을 조율한 후 결혼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쉬울까!
두 번째 잡념 - 재회, 그 한 달 간
한 달 동안 여친과 결혼을 전제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다. 가/능/한 많은 얘기를 나눠야 하고, 가/능/한 서로의 많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 ‘가능한’이란 말에는 예외도 있다는 말이다. - 서로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때, 그것이 결혼에 방해가 된다고 묻어둔다면, 결혼 후에 그것은 다시 되살아나 두 사람의 행복을 갉아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로가 마음 상하는 얘기더라도 말할 수 있을 때 얘기해야 한다.
세 번째 잡념 - “나는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지난해 12월 중순경 여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8월말 헤어진 지 넉 달이 조금 못 되던 때였다. 그 동안 여친과는 어떤 연락도 갖지 않았다. 주변에 둘을 연결시킬 제 3자가 존재하지 않는 관계인지라, 서로가 마음먹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었다.
애초 전화보다는 편지를 쓸까 생각했다. 그 동안의 내 심정이며 지금의 내 심정 등을 적고 싶었다. 심정이라고 해서 별다른 내용은 없다. 전화를 걸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서로가 사랑했지만 다른 세상을 꿈꾸다보니 헤어지 게 된 것인데 그것 때문에 원수처럼 지낼 필요는 없다’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생각이 얼마나 기회주의적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흔히 ‘그냥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표현이 대부분 이런 생각의 한 가지이고 보면, 극단적으로는 ‘나 갖긴 그렇고 남 주긴 아까운’ 정도의 심정을 잘 포장한 경우일 듯도 싶다.
넉 달 동안 이리저리 생각의 방황을 겪은 뒤라 그런 기회주의적인 생각은 접었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는 별반 다를 것은 없었는데 내 딴엔 그 동안 다시 연락하는 문제에 대해 몇 단계 생각의 방향을 틀어왔었다. 그 방향타는 연애의 관점보다는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의 문제에 좀더 비중을 두었다.
그래서 전화를 건 거였다. 어찌 살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 정도. 그리고 일주일 후 다시 전화를 걸어 만나기로 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그 동안 살아온 얘기 등을 나누는데, 어찌어찌 얘기가 흘러 내가 ‘결혼을 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를 얘기했다.
“나는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여친이 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참 다른 할 말이 없었다. 그날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어쩌면 결혼해야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다른 술자리에서 만난 이에게 농반진반으로 그 얘기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내 마음이 돌아서게 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그 다음날 밤에 전화를 걸었는데, 여친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신경성 장염에 걸렸다는 거였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나 만나고 나서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결혼이라는 게 별 것도 아닌데, 너무 따지고 드는 것 아닌가. 이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게 시작이었고 그 다음날, 나는 몇 달 동안 길러오던 장발을 잘랐다. 22일 만났을 때 여친이 제일 먼저 한 얘기가 이발 좀 하라는 것이었다.
네 번째 잡념 - 이별의 원인
여친은 말한다.
“내가 (넉 달 전에) 헤어지자고 할 때는 내가 (노을이를) 붙들고 있는 것 같아 놓아주려 했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바쁜 내 일상, 다소 삐딱한 내 생각, 거기에 세다고 알려진 내 고집까지 어느 것 하나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다. 더욱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해도가 깊은 것은 아닌 편 같다. 그렇다고 크게 반대하는 것도 없다.
비록 <말>은 재미없는 잡지라고 얘긴 하지만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선 말리고 나서진 않는다.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다. 내가 가진 역맛살같은 끼. 그렇다고 훌쩍 어디를 멀리 떠나본 적은 없다. 그러나 일상이 그렇게 돼 있다.
다섯 번째 잡념 - 다시 문제는 결혼제도
그 동안 결혼 얘기도 꺼냈다. 지난번에 여친이 집에 가서 사귀는 남자가 있는데 결혼할 지도 모른다고 했단다. 그랬더니 가족들의 질문이 한 마디씩 이어졌단다. 교회 집사인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냐?” 어머니는 “성실한 사람이냐?” 결혼한 언니는 “뭐하는 사람이냐” 두 살 어린 남동생은 “몇 살이냐?” 각자의 질문이 곧 관심사일텐데, 뭐 집안 사람들의 반응이야 내겐 중요하지 않다. 여친이 좋으면 밀고 나가면 된다. 누구에게 덕볼 것도 없고, 또 어떤 집안이랑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집안에 그리 잘 해줄 자신도 전혀 없다.
요즘엔 그게 궁금해진다.
‘여친은 왜 날 사랑하는 거지?’
‘나는 왜 여친을 사랑하는 거지?’
이 ‘왜’가 문제다. 사랑에 이유가 있나? 아니,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시, 사랑엔 이유가 있을 필요가 없다. 그냥 그 사람이 좋은 거니까. 이유가 필요한 것은 결혼이다. 그런가? 사랑이 결혼을 하는데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하나! 충분한 이유여야 하는데….
결혼한 한 선배를 몇 달 전에 만났다. 선배의 고민인즉, ‘지금의 남편도 사랑하는데, 다른 남자도 사랑한다’는 것. 이럴 경우 답이 뭐지? 이혼?
그 선배가 어느 날 전화로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노을이도 결혼해라.’
그런데 이 사랑은 영원불변인가? 이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예전엔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엔 여러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만,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엔 동시에 여러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 결혼 제도가 문제다. 결혼제도는 이런 여러 사랑의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여러 사랑을 차단한 결혼제도 안에서 사람들은 행복한가. 사회는 안전한가. 그럼 바람피는 사람들은 다 뭐지.
내가 너무 원칙주의자라 시비 거는 거다. 어차피 사람살이엔 그런 비공식적인 통로가 항상 있었다. 그렇지 않은 시대가 있었던가. 그렇다면 결혼 제도를 개혁하자고 요구하는 것 역시 늘 한편에서 있어왔던 엑스트라에 불과한 것인가.
여섯 번째 잡념 - 80%의 사랑이 80%의 삶으로
내 딴엔 그렇다. 결혼제도라는 것은 완벽할 수가 없다. 이 말은 곧 사랑만으로 평생 함께 살 수는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 뭔가 일이 같든가, 취미가 같든가 그런 게 필요하다. 결혼할 때 가득했던 사랑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바람을 넣은 지 오래된 풍선과 같다. 시나브로 바람은 빠지고 마침내는 축 쳐지고 만다. 이를 보충해주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하다못해 물욕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것을 서로 합의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요즘 여친에게 주문사항은 나를 80%만 사랑해 달라는 것. 나머지 20%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
20%라는 것은 이렇다. 결혼과 삶의 포함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결혼이 삶의 전부라고 느낀다면 이것 역시 10년 안에 악수도 제대로 못하고 돌아서게 된다. 삶에서 결혼을 택하는 것이지, 결혼이 곧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 20%는 그 삶을 싹틔울 수 있는 여지다.
결혼이 80%의 사랑으로 이뤄진다고 해도 나머지 20%의 개인 삶은 그런 대로 지속해서 자랄 것이다. 그 20%를 훗날 80%로 성장시키는 것은 결혼한 이들의 사랑이다.
사랑이 20%를 80%로 바꿔 줄 수 있다. 그런데 20%가 없이 사랑만으로 결혼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사랑만으로 둘 사이를 유지시켜야 한다.
아! 방법은 있겠다. 100%사랑은 가정을 잘 꾸리는 힘이 될 것 같다. 아이를 낳고. 가정을 잘 꾸리는 것 정도. 이것도 어떤 이들에게는 중요하다. 다만 나는 이런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곱 번째 잡념 - 질투와 솔직함
여친은 질투가 많은 편이다. 제일 처음 헤어지자는 얘기도 학과 여자친구 문제 때문에 불거졌다. 나로서는 명확한 얘기인데, 그것을 확대 재생산해내는 과정이 잠시 짜증났다.
내 생활이라는 게 그렇다. 학교 다닐 때 아무튼 후배들을 많이 만났으니 그 중에 여성들도 있을 것이고. 사회생활 하면서 만난 사람들도 있을 테인데,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함께 있을 때 여성들에게 전화가 오면 불안해하는 빛이 보인다. 일단 불안기가 남아 있는 한 다음 대화는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남녀의 만남이란 게 민감한 신경폭탄 아니던가.
이 문제의 뿌리를 뽑는 방법은 내가 살아온 모든 생활을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밖에 없다. 그건 말로 안 되는 얘기니 뒤로 두면, 당장 해결 방법은 거짓말밖에 없다. 있는 사실 그대로 얘기하면 일단 분위기가 안 좋아지니,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이것도 웃긴다. 왜 거짓말하고 살아야하지? 결혼할 때까지만 거짓말하고 살까. 결혼 후에야 질투하든 말든. 그런데 또 이렇게는 못 산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지금처럼 대하는 게 맞다.
내가 제안한 해결책은 내가 쓴 세풀을 모두 읽어보는 방법이다. 여친을 만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세풀을 읽으면 내가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왔는지 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또 한 가지는 그 동안 사람들이 내게 보냈던 편지들을 모두 읽어보라고 했다. 예전에 한번 내가 생각하기엔 아무렇지도 않는 글을 쓴 여성 후배의 엽서를 본 적이 있는데 이를 두고 토라진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아예 다 보라고 말했다.
내 제안이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다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바랄 뿐이다. 그것이 바람끼가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사람들 만나는 것이라고.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런 사람인지를 알아도 불안하면 어쩌나.
여친은 말한다. 여자의 심리를 이해해 달라고. 이쯤 되면 할 말이 없다. 질투야 나 역시 누구 못지않게 많(았)다. 그런데 여자의 심리! 이게 뭔가. 여성의 심리는 알아도 여자의 심리는 자/신/없/다. 그냥 솔직해지는 것밖엔.
여덟 번째 잡념 - “페미니스트 싫어”
“난 페미니스트 아니야. 싫어”
여친은 가끔 그런 얘기를 한다. 차라리 조강지처가 되겠단다. 그렇다고 남성에게 순종적인 여성은 아니다. 그냥 착할 뿐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는 직업이나 취미처럼 선택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일상을 살다보면 부딪힐 수밖에 없는 필연이다. 따라서 당장 여친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영원히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도 좋다. 아마 그게 내가 해줄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은 말한다.
“혹시 조강지처를 가장한 페미니스트 아냐?"
아홉 번째 잡념 - 여친의 고민
근 한 달간 몇 가지 얘기를 하면서 여친 스스로도 고민에 쌓인 모양이다. ‘그냥 사랑하면 결혼하는 거지’ 했는데 내가 주저리주저리 얘기하니 조금 복잡한가 보다. 여친은 스스로 말한다. ‘내가 꿈이 없는 것 같다’고. 사실 여친은 꿈이 있다. 그런데 꿈을 실현해 가는 시간이 조금 더디다. 이는 여친도 인정하는 바다. 그 꿈을 실현시켜 나가는데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주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최근엔 여친이 뭔가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한다. 할 바엔 좀더 의미 있는 일을 하자고 얘기했다. 시민단체의 자원봉사는 싫어하니, 기지촌 탁아소 일 등을 권하면 어떨까 싶다. 물론 강요할 생각은 없다.
열 번째 잡념 - 억울한가?
막 억울한 생각이 든다. 그냥 사람이 좋아 연애할 수 있는 때는 모두 지난 것인가. 그냥 사람이 좋아 연애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게 사람 아닌가. 때로는 마음대로 살아볼 수도 있는. 그래서 몰래 바람피는 사람들은 참 나쁘다. 당당하게 바람필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 안 되나?
혹여 언젠가 여친이 이 글을 본다면 무지 심란할 것 같은데,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이 글은 단 하나의 목적밖에 없다. 지금의 나를 보고 싶었다. 전체 글을 읽어보면 잔가지들은 많아도 뿌리는 하나라는 것도 이해 할 수 있을 테니까. (2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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