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맞는 일요일 아침이다. 지난주엔 마감하느라고 회사에 맞이한 일요일 아침이었고, 지지난 주엔 마감하느라고 출근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일요일. 아무런 계획이 없다. 그야말로 텅 비어 있다. 하루 동안 잠을 자도 좋고,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도 좋은 날이다.
핸드폰에 맞춰놓은 알람소리에 잠이 깼다. 아침 7시. 알람소리를 끄고는 잠깐 더 잘까 하다가 일어났다.
‘뒷산에 가자.’
세수하는데, 얼굴이 부은 것 같다. 어제 자기 전에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잤는데, 그 효과가 나타났나 보다. 머리를 감아야 하는데, 번거롭다. 그냥 모자를 쓰고 가면 되겠지.
떠나기 전에 쌀을 씻었다. 두 끼 분이다. 밥을 많이 하면 남는데 그럴 때는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산에 갔다 오면 배고플 텐데, 아침을 먹자면 지금 쌀을 씻어 앉혀두는 게 나을 듯했다. 어제 먹다 남은 김치찌개가 있으니 반찬은 그것이면 충분하다.
체육복 바지를 입고 혹시나 싶어 지갑을 챙겼다. 시계 대용으로 핸드폰도 챙겼다. 모처럼 등산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바람이 조금 쌀쌀하다. 채 5분도 못 걸어 서울성곽 옆길로 올라섰다. 아침 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서너 명 지나다녔다. 시멘트 길을 버리고 흙길을 밟았다. 이곳이 아니면 흙을 밟고 다니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산 능선을 따라 쌓인 성곽, 그 옆으로 난 길은 때론 계단으로 바뀌기도 한다. 조금 올라가자 배드민턴장이 나왔다. 사람들이 짝을 이뤄 운동하고 있다. 길가에는 커피파는 장사꾼들이 두엇 있고, 그 옆에는 드럼통에 모닥불도 피웠다. 대부분 중년이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다. 젊은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시멘트 길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나무들은 아직 겨울이다. 좀처럼 봄이 왔다는 느낌을 찾을 길이 없다. 아침의 고요함을 깨지 않으려는 듯 빈 가지들은 미동도 없이 서 있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저 나무들이 새싹을 틔우기 전에 내 삶도 새로운 싹을 피워야 한다. 나를 가꾸자. 한 동안 잃어버렸던 혼자 지내던 습성, 이제는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 3년 전까지만 해도 혼자 잘 지내지 않았던가.
나무들 사이로 난 산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았다. 생각도 딱 그만큼 맴돌았다. 가파르지 않고, 다만 무엇을 찾아야 한다는 것.
성곽을 따라 난 산길이 아래로 향한다. 아랫마을 성북동에도 아침의 고요함이 남아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발길을 돌린다. 좀전에 걸어왔던 길과는 다른 길이지만,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다시 조그만 공터가 나왔다. 그 근처에는 몇 가지 간단한 운동기구가 설치돼 있다. 6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회전발판에 올라가 허리운동을 하고 있었다.
둘은 각각 따로 온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운동을 자주 하라고 권한다. 할머니는 몸이 안 좋은가보다. 나는 주변을 서성거렸다. 아래쪽으로는 역시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먼저 떠나자 할머니도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제야 윗몸일으키기판으로 가서 운동했다. 십여 번 몸을 움직이자 이제야 몸이 깨는 듯하다.
아침마다 이곳에 올라올까? 7시에 일어난다면 한 시간 운동하고 8시 30분에 출근해도 늦지 않을 텐데. 시간계산상으론 충분하다. 그러나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냥 머릿속에서 굴리고 말 생각이다. 그만큼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 생각은 하되 실천하지 못해도 좌절하지 않을 만큼.
집으로 되돌아오는데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돌아오니 어느새 햇빛이 창문 을 비춘다. 밥솥코드를 꽂아 두고는 방 창문을 열었다. 화분을 모두 꺼내 볕이 든 담벽위에 올려놓았다. 오늘이 아니면 빛을 쬐지 못하리. 그동안 방 안에만 있어서 답답했을 것이다. 겨울 동안 참 식물들에게 게으르게 굴었다. 그 많은 일요일마다 무엇을 하느라고 그렇게 무관심했는지 물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래도 용케 지난 겨울에 푸른빛을 잃지 않고 살아있으니 다행이다.
어젯밤 시를 쓸 때 돌아보던 화분들이다. 초롱꽃은 참 여려 보인다. 아니, 대개 꽃이 그랬다. 손만 대도 곧 상할 것처럼 여리게 피는 게 꽃이다. 그래서 그만큼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지도 모른다. 팻트병에 물을 가득 담아와 화분에 부었다. 물속에 꽂아 두었던 식물들은 꺼내서 뿌리도 씻어주고.
밥이 다 되려면 조금 여유가 있었다. 컴퓨터를 켜고 비디오를 본다. <남자가 사랑할 때>. 어젯밤에 미쳐 다 못 보았다.
알콜 중독증에 걸린 아내를 둔 한 집안의 얘기다. 자상한 남편과 두 딸. 그런데도 갈등한다. 남편은 아내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아내는 그 노력에 답답해한다. 무엇이 어긋났을까. 남편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토록 잘 해 주는데, 부인은 왜 집안에서 부담스러워 하고 갈등하는지.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 얼마나 섬세해야 하는지…. 연애를 잘 하려거든, 연인들끼리 좀더 깊이 사랑하려거든, 한번쯤 보았으면 하는 영화다.
한편으로는 슬그머니 내게 딴지를 걸어본다. 결혼이란 게 별건가. 그냥 저렇게 사는 거지. 부부가 서로 조금씩 이해해주고. 혼자 살 때도 갈등은 있듯이, 고만고만한 갈등을 안고 사는 것. 서로가 함께 푸는 것도 재미있을 텐데. 어제 퇴근하면서 빌린 <친니친니>와 <반생연> 등 세 편중에서 그래도 제일 낫다. 뭐 눈물이 나올만한 영화가 없나 뒤적이다가 골랐는데, 눈물은 구경도 못했다.
전기밥솥이 보온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한 10여분 있다가 김치찌개를 데우고, 밥을 펐다. 영화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영화를 보면서 밥을 먹는다. 김치찌개는 아침으로 끝이다. 이제 김치도 없다. 다른 반찬도 없다. 점심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아침을 먹고나서 그릇은 그냥 싱크대에 밀어둔다. 싱크대에는 그릇들이 쌓였다. 어제도 설거지를 한 것 같은데, 혼자 살아도 이렇게 설거지는 쌓인다. 컴퓨터 앞에 앉아 세풀을 쓴다. 오늘 조금만 쓰면 될 것 같다. 욕심 내지 말자. 글이 쓰고 싶지 않으면 쓰지 말자.
어제 밤에 써 놓은 시들을 다시 읽었다. 몇 군데를 고쳤다. 꼭 이별 때문만은 아닌데, 읽는 사람들로서는 그쪽으로 생각을 몰아갈 것 같다. 시를 들여다보고 나니 글 쓰는 일이 싫어졌다. 컴퓨터 앞에서 물러나 침대에 엎드렸다. 한글이 켜 있던 컴퓨터에서는 김광석 4집이 흘러나온다.
제주인권학술회의(2000) 자료집을 꺼내들고는 읽었다. 아무튼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이 자료집을 다 읽고 정리해야 한다. 졸립다. 밥도 먹었겠다 어려운 글을 보려니 당연히 뒤따르는 생리 현상이리라.
책을 덮어두고는 침대에 누었다. 졸음이 밀려온다. 문득 의자를 본다. 그래 의자도 사야 한다. 너무 낮다. 기왕이면 높낮이도 조절할 수 있는 회전의자를 사자.
오전 11시. 눈을 떴다. 김광석 노래는 여전히 흐른다. 한 노래를 계속 들은 듯한 느낌이 든다. 잠시 후 나를 재촉하는 노래도 흐른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그리 오래 잠들지는 않았다. 채 한 시간이 못된다. 하루 종일 잠을 잔다고 해도 아깝지 않은 하루다. 19일 <말> 마감이 끝나고 그리 편히 쉬어본 일이 없다. 이대로 새 달이 시작되고 취재에 들어가면 피로가 쌓일 것이다. 어차피 그전에 하루 정도는 쉬어야 한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지금 내 마음을 안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 하지 않는 지금, 나태하다. 몸은 그대로 두고 생각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 실천 없이 계획만 세우려 한다. 현실에서 도피하려 하고 있다. 이루지 못할 것이라 짐작하고는 스스로 포기해 버리고 있다.
한동안 그래왔다. <말>에 대해서도, 비판만 했지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 대안도 없으면서 비판만 했다. 비판받는 사람들이 제대로 내 맘을 이해해 주었을까. 사람과 제대로 마음을 열기 전에, 행하는 비판에 너그러운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왜 <말>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기 전에 비판부터 하려는 것인가.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산다. 이제 그만 말로 해결하려 하지 말자. 내가 답답한 만큼 남들도 답답할 것이다.
생각은 한길로 빠지고, 문득 세풀 쓰는 일이 재미없어진다. 쓰지 말자. 생각이 집중되지 않을 땐,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부엌으로 가서 설거지를 한다. 집안에서 쓰는 그릇은 모두 담가져 있다. 끌끌. 내친 김에 수저통도 꺼내 닦았다. 설거지는 막상 하고 나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시작이 어려운 거다.
창밖의 볕이 너무 좋았다. 이대로 방안에만 있기엔 너무 아까운 하루다. 대학로에나 갔다오자. 그제야 머리를 감았다. 감는 김에 목뒤에 난 잔머리들은 면도기로 말끔하게 밀었다. 나간 김에 시장을 볼 요량으로 빈 배낭가방을 챙겨들었다. 옷도 좀 깔끔하게 입었다. 어제 빌린 비디오테이프 세 개를 챙겨들고, 빈 배낭을 메고 자전거를 타고, 대학로로 진출!
가던 길에 비디오 가게에 들려 테이프를 반납하고는 다시 무엇을 고를까 이리저리 찾았다. 늘 이렇다. 비디오 가게에 오면 이리저리 뒤적거린다. 후배가 적어준 목록은 대개 가게에 와서야 ‘가져 올 걸’한다. ‘빨리 찾아야 할텐데’ 하다가 ‘서두를 이유가 뭐가 있지?’ 한다. 맞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 여기서 이렇게 찾고 있는 시간도 내 일요일이다. 내 시간이다. 그냥 이것도 내 삶인 거다.
역시 눈물나는 비디오를 보고 싶은데, 쉽지 않다. 구프로가 진열된 진열장 앞에서 이리저리 뒤적거리다 두 개를 골랐다. <멜깁슨의 사랑이야기>와 <제니퍼그레이의 사랑이야기> 배우보다도 그냥 제목으로 골랐다. 그래 어떤 사랑이야기인지 한 번 보자. 그래야 다음 사랑이 온다면 잘 하지 않을까. 매번 있던 남자직원 대신 여자직원이 앉아 있다.
- <친니친니> 어땠어요?
“……!”
순간 당혹스러울 뻔했다. 비디오 가게에 가면 유난히 내 표정은 굳는다. 그냥 스치는 사람들처럼 직원을 대해왔다. 그래서 무척 사무적으로 번호 누르고 이름을 말하고, 전산처리하는 동안 나는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곤 했다. 그런데 질문이라니!
“그냥 그랬어요.”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친니친니>를 보고 느낀 점? ‘사랑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말해라.’ 좀더 덧붙이자면, ‘마음과 달리 인연은 늘 따로 있다.’ 그러니 그 영화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하나. 이렇게 심각한 척 할 필요도 없다. 점원은 그냥 물어본 것인데. 하긴 이 좋은 날 그 좁은 곳에 앉아 있다 보면 심심하기도 할 테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냥 손님에게 친근하게 대하려고 한 마디 한 것인데. 굳어 있는 내가 잘못이지.
테이프 두 개를 가방에 넣고 대학로로 향했다. 서서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많았다. 찻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마로니에 공원으로 들어갔다. 야외무대에서는 공연을 준비하는 이들과 이를 지켜보는 이들이 있다. 바람을 쐬러 나온 가족들도 있다.
농구장에서는 젊은 친구들이 농구를 하고 그 주변으로는 연인들이 앉아서 구경한다. 대학로에 오니 정말 봄이 온 듯했다. 연극회원을 모집한다는 고등학생들이 자보를 붙이고, 그 옆으로는 어느 개그맨이 나와 새우깡 게임으로 주변에 앉은 사람들을 웃긴다.
지난 달엔가 대학로 르포를 쓰겠다고 기획안을 냈다가 짤렸다. 식상하다는 것이었다. 하긴 대학로를 다루지 않은 잡지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 다른 각도로 보고 싶었다. 무엇을 다루느냐보다는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다시 생각한다. 나를 찾자. 충분히 할 일도 있고, 재미도 있을 것이다. 그 일에 매달리면 된다. 내가 일을 벌이고 내가 마음 아파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위선이다. 위악은 어울릴지언정 위선은 그리 달갑지 않다. 마음 아파하지도 말자. 돌아가지 않을 거라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연인들끼리, 친구들끼리 그렇게 걸으면서도. 연극티켓을 예매하는 곳엔 한 30여명이 줄을 섰다. 그래 다음엔 혼자서 연극도 보고, 영화도 보고 청승이나 한번 떨어보자. 자전거로 달리는 대학로 거리도 괜찮았다. 이제 시장보러 가자. 집으로 돌아갈 땐 꼭 딸기를 사자.
성대 육교 근처에 있는 할인매장으로 갔다. 쇼핑하듯이 둘러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여기에 있는 물건들은 맘만 먹으면 다 내 것이 될 것 같은 기분이다. 우선 야채매장을 획 둘러보고는 빈 시장바구니를 들었다. 맥주를 세 병 샀다. 지금 당장 마실 것은 아니지만, 냉장고 안에 맥주가 들어있으면 마음이 풍요로워 진다.
라면도 열 봉 구입했다. 그쯤 사고 나니, 당장 점심 때 무엇을 먹을 지 걱정스럽다. 김치만 있으면 뭐든 넣고 끓이겠는데 지금 상황은 그렇지도 못하다. 생각 끝에 삼겹살을 구워먹기로 한다. 정육점 코너에 가서 포장된 삼겹살을 바구니에 넣었다. 삼겹살을 샀으니, 이제는 상추를 사야지. 다시 야채코너로 갔다. 상추도 있고, 쌈거리도 있다. 이름도 모르는 쌈거리가 많다. 다들 싱싱하다. 그런데 비싸다. 수경재배라고 100g에 거의 1천원 가까이 한다. 집에 가다가 가게에서 사자. 콩나물도 비싸다.
팽이버섯을 한 봉지 샀다. 삼겹살 먹을 때 함께 먹으면 맛있다. 구운 김도 두 봉지 샀다. 점심은 이것으로 먹는다 치고 저녁하고 아침은 어떡하지?
고민하다가 풀무원에서 나온 된장찌개를 샀다. 950원이니, 못해도 한 끼 정도는 할 것 같다. 산 김에 옆에 있는 떡볶이 양념도 한 봉 넣었다. 떡은 집에 있으니 언제 떡볶이를 한 번 해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북어채도 한 봉지 샀다. 가장 만만한 국거리인데 비싸다. 계산대로 가면서 팻트병 오렌지 주스도 한 병 샀다.
계산하는데 20,019원. 9원은 깎아 주는데 10원은 깎아 주지 않는다. 계산을 하고 배낭에 넣는데, 아무래도 너무 많아 샀나보다. 겨우겨우 가방에 넣고 주스는 자전거 뒤에 실었다. 집으로 돌아오다가 길거리 가게에서 딸기를 샀다. 두 근에 3,000원. 그 가게에서 상추도 반 근에 500원, 콩나물도 500원 주고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풍족해진다.
집에 돌아와 일단 산 음식들을 냉장고에 넣었다. 아차! 다시다가 떨어졌는데…. 내일 퇴근길에 사와야지.
상추부터 씻었다. 코드를 빼놓은 밥솥은 다시 코드를 꽂고는 취사로 돌렸다. 이렇게 하면 밥이 변색되지 않고 따뜻하게 데워 먹을 수 있다고 누가 일러주었다. 여섯 덩이의 삼겹살 중에서 두 덩이를 남기고 구웠다. 밥은 가득 담은 한 공기 정도다. 상추는 아무래도 남을 것 같다. 필요한 정도만 씻었다. 다시 비디오를 켜고 보면서 밥을 먹었다. <멜깁슨의 사랑이야기>. 이건 예상 밖이다. 제목에 속은 꼴이다. 갑자기 에스에프가 등장한다. <친니친니> 같다.
식사를 끝냈다. 다시 무엇을 할까. 고민이다. 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바꾼다. 조성모 1집. 노래방에 가면 분위기 잡는 노래만 불러 분위기 다 깨곤 했는데, 다음엔 ‘후회’를 부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가사가 조금 처량하다. 오후 3시가 넘어버렸다. 그래 오늘은 푹 쉬자. 다행히 3월은 거의 두 주 정도 여유가 있다. 대개 1일부터 취재를 하는데 이번 주 역시 조금 여유가 있다. 아무튼 오늘은 세풀만 끝내자.
다시 낮잠. <멜깁슨의 사랑이야기>를 보다가 잠들었다. 그러나 역시 한 시간만에 깬다. 낮잠은 여전히 게으름과 무관하다. 낮잠을 자면 밤에 조금 늦게 잘 테니, 그때 일하면 된다. 글은 밤에 쓰는 게 더 낫기도 하고. 다시 비디오를 되돌려 잔 부분부터 보는데, 눈이 아프다. 시력에 안 좋으려나.
5시. 열어둔 창문으로 바람이 쌀쌀하게 들어온다. 화분을 들여놓는다. 6시부터 이 글을 쓴다. 들국화의 노래중에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란 노래가 있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눈을 들어 하늘 보니”로 시작한다. 그 노래가 듣고 싶어졌다. 분위기가 좋은 노래인데. 그 테이프가 있나 싶어 찾아보았으나 없다.
도중에 배가 고파 남은 딸기를 가져다 먹었다. 한참 딸기를 주워 먹고 있는데 오연호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철도노조 관련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올려달라는 거였다. 기사를 올리려는데, 비밀번호를 모르겠다.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전화를 걸어, 비밀번호를 확인하고는 기사를 올렸다. 내친 김에 386후보 민심기행 기사도 올렸다.
잠시 틈이 벌어진 사이에 샤워를 했다. 욕조가 있는 집으로 이사 가자. 다음 이사갈 집 목표다. 정말 이 집에서 몇 년 산다면 욕조를 들여놓아도 될 법 한데.
시간 참 빠르다. 밤 9시 30분이다. 이제 빌려온 비디오를 마저 보자. 내일부터는 새로운 삶을 살자. 마음에 충실하고, 좀더 계획 있게 살자. 하루 동안 잘 쉬었다. 다시 이런 일요일이 올 수 있을까. 지금도 내 마음은 갈등한다. 이처럼 혼자서 보내는 일요일의 즐거움과, 다시 연애를 시작해 데이트를 하러 나가는 일요일의 즐거움, 그 둘을 모두 갖고 싶은 욕심이 공존한다. 아마도 오늘 3월 26일 일요일은 그 갈등의 한 끝에서 서성거린 하루였으리라. (20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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