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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0+31

열린, 사람의 역사성․연애의 긍정성

 

2000년 2월 25일부터 28일까지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진행된 ‘제주인권학술회의2000’에 참가했다. 지난해 있었던 제주인권학술회의에 이은 두 번째 행사였다.


<말> 동료들은 무척 부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나 역시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참석하는 지라 미안함이 있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 했다. 지난 해에 참석했을 때 얻은 것들이 많았고, 이번 대회 역시 기대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제주인권학술회의2000은 지난해보다 더 강도 높게 진행되었다. 도착 첫날은 2시부터 6시까지 발표와 토론이 진행되었다.
둘째 날은 8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진행되었고, 셋째 날은 9시부터 6시까지 회의가 진행됐다. 틈틈이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에는 별도의 비공식적인 모임이 잇따라 열렸다. 둘째 날은 저녁시간에도 한 시간 가량 양민학살 관련 회의가 열렸고, 밤 9시부터는 의문사 관련 진상규명 논의가 비공식적으로 열렸는데 이 회의는 밤 12시까지 진행되었다.   


전체적으로 이번 학술회의는 무척 ‘재미’있었다. 어떤 이들의 말 한 마디에서 내 생각을 짧게 정리하기도 했고, 어떤 발언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어떤 이가 회의에 대한 소감을 묻길래 짧게 답했다. 

“재밌잖아요. 연구에만 몰두했을 일부 교수들이 활동가들과 부딪히는 지점이며, 전혀 주제가 다름에도 자신의 주장만으로 질문을 엮어 가는 것하며, 자보논쟁이며, 그냥 짜여진 일정 속에 존재하는 짜여지지 않은 이런 모습들이 다 재미있어요.”   


제주인권학술회의(2000) 기간 중에 발생한 발언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반박 자보가 회의장에 붙었다. 그중엔 이른바 ‘영페미니스트’들이 쓴 자보도 있었다. 자보에 오른 비판 대상에는 내가 한 발언도 포함됐다. 취재기자로 참석한 지라 뭐 달리 발표할 기회도 없었고 질문할 거리도 없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이번 학술회의의 한 흐름에 ‘걸리고’ 말았다. 


문제의 발단은 학술회의 첫날 저녁에 일어났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단합대회가 있었다. 참석자들끼리 친밀감을 느낄 수 있도록 진행된 이 행사 막바지에는 팀별 모임을 가졌다. 사회자는 이번 회의에서 바라는 바를 도화지에 쓰라고 했다. 우리 팀은 각자 한 가지씩 의견을 냈다. 아이를 데려 온 어느 독신모는 아이를 위해 소눈알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얘기가 나왔고, 나는 “애인”이라고 얘기했다. 잠시 후 각 조별로 발표가 이어졌다. 다른 팀 들 중에서도 나와 비슷한 얘기들을 적었는데 한 팀은 ‘애+인’, 다른 팀은 ‘결혼상대’ 등을 적었다. 다른 바람들도 대부분 소박하거나 혹은 약간은 장난스러움도 섞인 듯했다. 학술의 술을 ‘술(酒)’로 표현한 경우도 있었다. 행사는 이쯤에서 끝났다.


다음 날 점심식사를 마친 후 행사에 참석하려고 회의장에 내려왔는데, 메모가 붙었다. 그 메모 내용은 어젯밤에 바람을 발언한 내용 중 ‘애인’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애인을 말한 사람들은 남성들인데 그렇게 당당하게 애인이라고 발언한 것은 문제라는 얘기를 써 놓았다.  


“…… 여자들도 그런 생각이 있는데, 수줍어서 말 못한 것일까요. 아니, 오히려 그들의 ‘당당함’은 여성이 무엇이든간에 성적(性的)존재로만 치부해왔던 대상화를 그대로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여성은 남성을 성적존재보다는 작가, 변호사, 운동가라는 사회적 지위로 판단합니다. 적어도 당당할 수 있는 발언은 아닙니다. 여성으로서 매우 기분이 상했습니다.” 


이 자보를 읽고는 웃음이 씩 나왔다. ‘재미있다.’ 처음에 든 느낌이었다.  ‘애인’이라는 단 한마디 말로 상대방을 평가하려 드는 건 너무 조급한 판단 아닐까. 이미 오전에도 다른 남성이 한 발언에 대해 어느 여성이 자보를 붙였었다. 그건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어 보였다.


회의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반론을 쓰기로 했다. 휴식시간에 그 자보 내용을 취재수첩에 적었다. 오후 5시가 넘어 회의가 끝났다. 민가협 규선누나와 함께 방으로 갔다. 규선누나 방에는 다른 일행이 쉬고 있었다. 누나가 가져온 노트북을 빌렸다.

한 시간 정도에 걸쳐 A4용지 한 장 분량의 글을 썼다. 규선 누나에게 초고를 보여줬다. 마지막 문장 하나를 빼고는 글자를 키우고 해서 두 장 분량으로 편집했다. 이날 저녁 회의를 마치고 호텔 프론트에 부탁해 프린트했다. 언제 붙일까 망설였으나 그날은 시간이 없었고, 다음날 아침에 행사장 안내판에 내용을 붙였다.


  

연애가 주는 긍정성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은 환갑이 되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저는 연애를 하고 싶습니다. 로맨스. 뭐 마음먹는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

4년 전 1월 세상을 떠난 김광석이 어느 콘서트에서 한 말입니다. 무엇이 그이를 환갑이 되어도 연애를 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했을까요. 그 학전소극장에 앉아있던 여성관객들을 “성적 존재”로만 치부해서 일까요. “여성이 무엇이든 간에 성적 존재로만 치부해왔던 대상화를 그대로 적용”한 것일까요. 저는 달리 해석합니다. 김광석의 말에서 그이의 감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이는 연애가 주는 삶의 긍정적 에너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여성으로서 매우 기분이 상했습니다.”

어떤 행동이나 말로든 여성 이전에 한 사람이, 한 인간이 마음이 상했다는 것은 저 역시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과를 해야겠습니다.

제가 사과를 하는 또다른 이유는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와 같습니다.


“여자들이”아니라 여성들이 “그런 생각이 있는데 수줍어서 말못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 모이신 여성분들은 정말로 당당하십니다. 마치 이곳 여성들을 보면 우리 사회에 성차별이 있나 싶은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성들이 ‘애인’ 얘기를 안 한 것은 수줍어서가 아니라 그때 저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겠죠
.


그 동안의 이번 학술대회 강의를 통해 느낀 것 중의 한 가지는 대부분 발제자들이 제기하는 내용은 아직은 소수의 생각이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먼 곳까지 와서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은 잘못된 제도와, 낡고 불편하고 부당한 관습과 생활 속의 습관과 싸우기 위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애인’이란 말에 담긴 의미는 다수가 바라보는 의미도 있고, 저처럼 소수가 이해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저는 ‘애인’이라는 의미에 ‘연애의 긍정성’을 담았습니다. 물론 지금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쓰는 애인의 의미는 매우 남성 중심적인 면이 강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남성이 그런 시각으로 ‘애인’을 해석하진 않습니다. 여성과의 상생과, (동성이 주지 못하는) 이성이 주는 긍정성을 찾으려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런 면에서 보면 글 쓰신 분은 애인에 대한 시각을 너무나 낡은 틀에 가둬 두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젯밤에 ‘미혼이거나 기혼이거나 상관없이’라는 단서를 달고 ‘애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애인이 주는 삶의 긍정적 에너지. 이것을 알고 있다면 “애인”이란 성차별적인, 또는 불쾌한 발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의미를 염두에 두고 당당하게 얘기했습니다.

제 생각을 예단해 버려 자칫하면 저 역시 불쾌할 뻔했습니다만, 이번 대회에서 배운 ‘다름’의 의미로 받겠습니다. 다름을 말하기 위해서는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먼저 앞서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과 관련한 몇 가지 잡념들.

1. 남녀가 함께 사는데 결혼 이외의 다른 제도는 열어놓지 않는 우리 사회의 주류적 시각에는 인권침해 소지가 없는가. 결혼제도는 여성의 불평등과 아울러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지 않는가.

2. (남성이든 여성이든) 결혼했는데, 그 후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마디 덧붙여 : 인권과 환경의 조화를 위하여 1회용 종이컵 사용을 줄일 방법이 없을까요. 

      

당신이 곧 또다른 세상입니다. 인연은 그 세상을 만나는 아름다운 시작입니다.


자보를 쓰겠다고 생각한 것은 상대방이 보여준 역사성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었다. 내 발언은 ‘내 역사성’에 근거하여 거론되었는데, ‘내 역사성’에 대한 이해없이 모든 남성으로 획일화 시켜버린 것에 대한 이견을 얘기했다.    

다른 자보들이 익명이었지만, 당당히 얘기하고 싶어 이름을 밝혔다. 어찌되었든 ‘연애론’은 평소 내 ‘전공’이었는데, 입장을 밝혀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름 뒤에 이메일을 적어 놓은 것은 이 글에 대한 반론이 나오더라고 다시는 붙이지 않고 이메일을 통해 반론을 펴겠다는 내 의지의 표현이었다. 오전 토론이 끝나고 점심시간에 사람들이 자보판으로 몰려들었다. 이미 자보판은 사람들에게 주요한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참 많은 사람들로부터 글 잘 썼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성뿐만이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교수와 여성운동가, 시민단체 간사 등 다양한 층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이 왔다. 남은 학술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자만하는 것 아닌가’ 싶어 스스로 ‘자기검열’에 부단히 매달리기도 했다.(2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