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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0+31

“자유롭게 놓아주겠다”



사흘 전, 여친에게서 전화가 왔다. 3월초에 만난 이후로 나는 그 동안 전화 연락을 하지 않았다. 화이트데이 때도.


무엇인가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취재를 하면서도 스스로를 한 방향의 결론으로 몰아갔다. 그렇게 마음을 굳어 가는 과정에서, 전화를 한다고 해도 어차피 형식적인 내용만을 나눌 게 뻔 했다. 여친도 내가 전화를 안 한 이유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친이 내게 전화를 했다는 것 또한 어떤 내용일 거라는 것쯤은 짐작하지 못할 일이 아니었다.


사흘 전에 결려온 전화는 간단히 끊었다. 마감이 언제 끝나느냐. 마감이 끝나면 만나자 정도였다. 또다시 전화가 온 것은 토요일 밤이었다. 예정대로라면, 18일인 토요일날 마감이 끝났어야 하는데, 일이 미뤄졌다. 그 전화도 짧게 끝났다. 일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일요일 오후 4시. 필름교정이 끝났다. 그러나 마음 한편엔 여친이 걸렸다. 6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비겁하게도 그걸 피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이 결론을 상의하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았다. 상의해도 결론이 바뀔 것 같진 않았지만, 모르겠다. 어쩌면 위로를 받고 싶었을까. 그건 내 분위기가 아닌데.

그 마음에 다시 전화를 걸어 다음에 만나자고 했으나 여친은 잠깐이라도 오늘 꼭 봐야겠다고 했다.


필름교정에 남았던 이들과 다시 호프집으로 가서 맥주를 한 잔씩 마셨다. 그리고 대학로에서 여친을 만났다.

“자유롭게 놓아주겠다. 그러니 날 미워하지 말라.”

“……”

알 것이다. 여친도 내가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럼에도 나는 떠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미워하지 말라니….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렸다. 어쩔 수 없다는 그 말이 적합할까. 그렇게 떠났다. (20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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