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 및 기획서1>
감성과 영성으로 듣는
사람과 사람․사회․자연이 나누는 작은 이야기
봄날, 선생님을 찾았다. 함께 논의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작은이야기> 기획 및 평가를 해야 한다.
- 선생님, 저는 매 번 제가 힘들 때만 선생님을 찾아 뵙죠?
“아니 다행이구나. 뭐 연애를 한다거나 그런 얘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구나. 그래, 지금은 뭐가 문제냐?”
- 선생님, <작은이야기>라는 책을 아세요?
“글쎄다. 신문에서 광고를 본 것도 같고…. 아무튼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 저 그 잡지로 옮길까 생각하고 있어요.
“누가 너 같은 녀석 데려다 쓰기나 한다니?”
- 그러니까 선생님 도움이 필요하죠. 제가 그 출판사에 서류를 낼 참인데요. 필요한 서류 중에 ‘평가 및 기획’이 있거든요. 그걸 도와주셨으면 해요.
“평가? 기획? 내가 책을 읽어보았어야…”
- 봐요. 선생님은 도와주실 줄 알았거든요. 책을 읽으셨으면 좋겠지만, 안 읽으셨어도 괜찮아요. 제가 선생님을 선생님이라 부른 데에는 선생님께서 모든 것을 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은 아니잖아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만나는 상황에서도 적절한 해결책을 찾잖아요. 연륜이고 경험이지요. 흘려보낸 세월에서 얻기도 하고, 스치는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도 있을 것이고요
‘작은’은 ‘생명과 비생명의 시작’을 말한다
“녀석 어른스러운 척 하기는. 비행기 그만 태우고. 그래 그럼 우선 평가부터 해야 하는 거니?”
- 예, 평가를 먼저 하고 그 평가를 바탕으로 기획을 세워야 하겠죠. 그런데 저는 우선 <작은이야기>의 정체성에 대해 얘기해 보고 싶어요. 정체성을 제대로 알아야 기획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 찾아오기 전에 며칠간 고민해 봤거든요. 아무튼 <작은이야기>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내가 만들고 싶은 잡지’도 어느 정도 밑그림이 그려질 것 같아요.
“뭔가 거창한 것 같구나. 너 처음부터 이렇게 거창하게 나오면 뒷얘기가 그럴싸해도 실망하게 마련이다는 것 알고 있겠지?”
- 그럼 한 번 해보죠. 저는 우선 <작은이야기>의 ‘작은’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봤어요. 모든 책에는 주제가 있듯 잡지에는 철학이 있어야 하니까요. 흔히 잡지의 논조나 분위기로 얘기될 수 있지만, <작은이야기>처럼 사람들이 마음으로 읽는 책은 더욱 더 철학이 필요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그 이름에도 어떤 철학이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비록 작명소는 거치지 않았겠지만, 뭔가 있지 않을까요.
“‘작은’이라…. 설마 양적인, 혹은 부피의 작음을 말하진 않겠지?”
-그렇진 않겠죠. 그런데 가끔 <작은이야기>를 읽다보면 그런 ‘작은’의 의미로 읽힐 데가 있어요. 저는 그것과 달리 ‘작은’이라는 의미에는 ‘근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한다고 봐요. ‘생명과 비생명의 시작’을 얘기하는 거죠. 이건 거창한 게 아니어요.
이를테면 <작은이야기> 4월호에 실린 ‘내 인생을 바꿔준 사람’을 볼까요. 꼭지 이름을 보면 무슨 내용일 지 대략 짐작이 가실 텐데, 이 글은 ‘어느 은사의 한 마디에 힘입어 나는 열심히 살았다’는 게 전부거든요. 5월호에 나오는 주철환씨 글도 마찬가지예요. 글 잘 쓴다는 사람인데도 내용이 꼭지와 어울리지 않거든요. 그런 글과 ‘작은’을 연결시키면, 그야말로 작은 부피감밖에 느껴지질 않아요.
더욱 재미있는 게 뭔지 아세요? 제가 잠깐 딴 길로 빠져 볼게요. 이 글에서 은사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남자는 자기가 선택한 직업에 불평하지 말고 인생의 승부를 걸되…” 제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 지 알겠죠. 왜 ‘남자는’이라는 말을 해야하는지 이해는 되지만, 이런 글은 <작은이야기>에 실리면 안 되는 거죠. 분명히 성차별이거든요. 사소하지만, ‘남자는’을 ‘사람은’으로 바꿔주면 훨씬 낫거든요.
“너, <작은이야기>가 <말>처럼 현실 문제를 다뤄야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물론이죠. 제가 왜 <말>을 그만 두겠어요. <작은이야기>는 그 자체로 존재 이유가 있죠. 제 지적에서 작은은 ‘남자는’이라는 작은 글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사람은’으로 바꿈으로써 인생의 승부가 남자만의 문제가 아닌 누구나의 문제로 공유될 수 있다는 거죠. 제가 앞의 글에서 문제 삼는 것은 성차별 자체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에요. 이게 <작은이야기>안에서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말하고 싶은 거예요. 사실 그 성차별 의식이 현실에 드러나면 매맞는 부인이 발생하죠.
그런데 <작은이야기>에는 분명 그런 글도 실릴 수 있겠죠. ‘내 이웃에 매맞는 부인이 있다. 그런데 이 부인은 어쩌고저쩌고 한다.’ ‘혹은 우리 딸아이가 반장이 되고자 했으나 사내아이들 때문에 고전했으나 결국 반장이 되었다.’ 뭐 이런 글들. 분명히 우리 일상에서 충분히 ‘한 생각’ 들게 하는 일들이니 작은 이야기 마당에 한 편쯤 실릴 수 있겠죠. 생각해보세요. 앞쪽에서는 남성의 우월성을 은연중 부추겨 두고는, 뒷부분에서는 그로 인해 겪는 고통에 대해 쓰다듬어 주는 것 말이에요.
사람과 사람이 아니더라도 따뜻한 일은 많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작은이야기>에 무엇을 실어야 하지? 너야말로 지나치게 사소한 것에 대한 신경 쓰는 것 아닐까. 그 역할은 <말>이 하는 일 아닐까.”
- 물론 저는 그런 일들을 모두, 지금 당장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아니거든요. 저는 거듭 밝히지만, <작은이야기>가 <작은이야기>다워 지길 바라는 거예요. 조금 있다 얘기할 텐데, <말>과 <작은이야기>는 철학의 차이도 있지만, 접근 방식의 차이도 있거든요. 같은 밀가루로도 다양하게 요리할 수 있잖아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문제는 ‘작은’이라는 말에 어떤 철학이 담겨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을 ‘생명과 비생물의 시작’에 두자는 것이죠. 시작 자체가 아니라, ‘시작’이라는 그 시간과 그 공간이 갖는 순수함, 깨끗함, 진정성 그런 것들이죠. <작은이야기>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들이 그것이 아닌가 싶어요. 우리 사회가 날로 복잡해지면서 우리는 근원에서 멀어지고 있거든요. 우리 일상에서는 잊고 사는, 혹은 곧바로 소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찾는 거죠.
“얘기가 추상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구나.”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계속 얘기를 늘어놓아 볼게요. 저는 우선 <작은이야기>에서 얘기할 수 있는 ‘작은’의 의미를 ‘관계’에 기준을 둘 때 세 가지로 보거든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 사람과 자연(우주)의 관계에 ‘작은’이란 의미가 결합한다고 보는 거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 사람과 자연이라 뭔가 그럴 듯 하다만, 그게 작은 이야기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 <작은이야기>는 주로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야기에만 관심을 가져왔죠. 독자들의 엽서가 특히 그래요. <작은이야기>에 독자들이 참여하는 공간이 많거든요. 그렇다보니 <샘터>, <좋은생각>같은 <작은이야기>류 잡지들과 별반 차이를 두기 힘들어요. 따뜻한 이야기를 담았다는 것 정도로 독자들에게 인식돼 버리죠. 사족하자면, 그런 잡지류들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만 들여다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은 잡지 이름 앞에 붙은 글귀에서 찾을 수 있죠. 제가 예전에 이런 잡지류가 뜨고 있다는 기사를 기획하면서, 책을 둘러보았는데, ‘사람’이란 말을 넣은 부제가 많더군요. 아니면 ‘소중’이라거나.
<작은이야기>도 ‘소중’이었다가 이번 5월호에는 ‘천천히 읽을수록 더 좋은 책’으로 바뀌었더군요. 그런데 그것도 궁금하긴 해요. 책의 철학이 그렇게 바뀐 것인지, 어떤 계기도 없이 갑작스럽게 바뀌니까 좀 당혹스럽기도 하고요.
“너 혼자 얘기 다할 거니? 잡지들이 너 표현대로 사람과 사람에 주목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세상살이가 갈수록 팍팍해지면서 따뜻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런 심리를 읽었기 때문이 아니겠냐는 거지.”
-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따뜻한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사람과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회, 사람과 자연이 나누는 작은 이야기도 많거든요. 그리고 그 이야기들 안에는 대개 근원적인 것, ‘생명과 비생명의 시작’이 담겨 있죠. 물론 이런 고민은 저만 갖고 있는 것 같진 않아요. <작은이야기>의 몇몇 꼭지들은 실상 그런 흐름에 맞게 쓰는 글들도 많이 있거든요. 최근호 <작은이야기>를 보면 사람과 사회, 사람과 자연 관계에서 나누는 작은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게 보이거든요.
이 얘기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것이긴 해요. 이는 단지 잡지를 엮는 씨줄일 뿐이죠. 주제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죠. 이제 날줄 얘기를 꺼내야, 천이 제대로 짜여지겠죠?
감성과 영성을 깨우는 잡지
“그래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 좀 전에 제가 말했던 것인데, <말>과 <작은이야기>는 철학의 차이뿐 아니라,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 밀가루 얘기를 했었지.”
-맞아요. 똑같은 밀가루인데도, 한식과 양식이 다르고, 중국집에 가면 더욱 다른 요리가 나오죠. 저는 <작은이야기>의 그 ‘작은’이라는 주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전파하는 게 ‘감성’이라는 겁니다.
“너 또 ‘감성’ 얘기를 꺼내니? 그건 <세상풀이>에서나 쓰면 되지 않을까.”
- 선생님께서는 자꾸 부정의 입장에 서시는 군요. 충분히 이해하고 계실 텐데요. <말>은 주로 이성적인 부분에 호소하죠. 폭로하고, 분석하고 주장하고. 그러나 <작은이야기>는 ‘보이는’ 것입니다. 현장을 보이고, 마음을 보이고, 사람을 보이고. 따뜻한 이야기를 말씀하셨는데, 그 따뜻함은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거든요. <작은이야기>에는 감성을 깨우는 글을 쓰는 것이고, 또한 감정에 호소하는 글을 싣는 게 낫다는 거죠.
한편으로는 지금 우리 시대엔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어필하는 게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죠. 교육상품으로 전락한 감이 없진 않지만, EQ의 중요성도 그런 흐름의 반영이죠.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일상에 지쳐 있거든요. 시험에 시달리는 중고생들, 취업에 시달리는 대학생들, 직장업무에 쫓기는 직장인들, 그들은 일상에서 과다할 정도로 이성에 의존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책을 읽으면서도 복잡하게 사고하길 원하진 않을 거라고요. 이른바 학생운동을 했던 어떤 이가 그랬다더군요. ‘퇴근길에 지하철에서는 <한겨레>를 볼 수가 없다.’ 골치 아프다는거죠. 그럴 땐 스포츠신문이 제격인 겁니다.
“너 무척 상업적인 계산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감성에 어필해서 책을 많이 팔자는 것이냐.”
- 물론 많이 팔았으면 좋겠어요. 책이 많이 팔린다는 것은 저와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니까요. 또한 현실적으로 돈이 있어야 책도 펴내죠. 그렇다고 제가 그것을 전담할 수는 없겠죠. 제가 돈을 기준으로 책을 구상하면, 독자들이 달아나 버리거든요.
무 베듯이 명확하지 않지만, 어떻게 독자들에게 접근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겁니다. 어떤 내용을 담으면 한 명이라도 더 책을 집을까. 이왕 잡지는 읽히기 위해서 만드는 것인데, 그 소임을 다하는 잡지를 만들어야죠.
얘기가 많이 빗나갔는데, 감성 얘기를 더 해 볼게요. 굳이 그런 시류가 아니더라도, 저는 감성 영역은 계속 열려야 한다고 봐요. 사람의 삶이 풍요로워지기 위해서 말이죠. 이성만으로, 이성적인 판단만으로 사람을 만날 수는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이성 중심으로 굳어 있어요. 그렇다보니 사람들이 마음 여는 일을 어려워하게 되잖아요. 결국 사람뿐만이 아니라 ‘생명과 비생물’들과 관계 맺기가 어렵죠. 이 관계중의 흔한 게 연애인데, 연애가 무척 어렵잖아요. 남녀가 만나고, 결혼하고. 이런 부부들 많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온전한 관계인가 싶어요. 죄송합니다. 제 전공인 연애로 얘기가 흘렀군요.
“그래 그런 부분이야 나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럼 날줄은 감성으로 짜면 제대로 짜여지는 거니?”
- 지금 당장은요. 그리고 이건 저도 막연한 감이 있어서 조금 어렵긴 한데…. 일단 말해 볼게요.
훙미로운 얘기가 한 가지 있죠.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울산에서 패했잖아요.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었는데 말이죠. 아무튼 선거 끝난 뒤가 무척 복잡해요. 애초 후보선출과정에서 잡음도 불거지고 그래서 끝이 어떨까 싶었는데. 그곳에서 들리는 얘기들을 접하니 온통 갈 길은 보이지 않고 주장뿐이더군요.
안타까운 점은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는 도구가 이성과 감정 밖에 없어요. 주장엔 이성적으로 대처하다, 그 이성적 판단이 안 통하면 감정적으로 나오죠. 그래서 경선에서 낙선한 후보는 그 당 후보의 유세를 돕지 않죠. 이상하죠? 진보적이라는 이들이, 초등학교 학생들도 할 만한 일을 못하고 분열되었거든요. 어떻게 이 복잡한 사회를 초등학교와 비교 하냐구요? 아니죠. 초등학생들에겐 초등학교도 무척 복잡한 사회거든요.
저는 이 현상이 결국 ‘사람에 관한 한 고찰’로 보자면, 감성은 죽고 이성만이 자란 부조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해요. 이쯤에서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될 게 있죠. 제가 요즘 관심 갖기 시작한 영성이죠. <작은이야기>에서는 류시화씨나 법정스님이 이런 분위기를 보이죠. 저는 지금으로서는 영성을 ‘자기성찰’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어요. 좀 공부를 해보고 싶은데 매번 시간이 없다는 핑계만 대고 있으니.
"좋아. 그럼 어쨌든. 그럼 네가 구상하는 <작은이야기>의 날줄은 감성과 영성이라는 얘기지. 잠깐 정리를 해보자. 그렇다면 네가 지금까지 말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겠구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관심 영역으로 두자. 그곳에서 ‘생명과 비생명의 시작’이 갖는 근원성을 찾자. 그 근원성은 모든 사물이 태동할 때 갖는 순수성이라는 거지.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감성과 영성이라는 그릇에 담자는 얘기지?”
현실에서 과정을 풀어가는 재미
- 선생님 참 고맙습니다. 역시 선생님은 만물의 이치를 꿰고 계십니다. 혹시 오해하실 지 모르겠는데, 저는 감성과 영성 만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듯이 제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이성, 지성, 감성, 영성의 조화입니다.
“걱정 마라 오해하지 않을 테니. 그래 그럼 이제 네가 말한 그 개똥 철학을 가지고 <작은이야기>를 평가해보자. 너 그건 알지? 철학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철학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도 어렵다는 거 말야.”
- 당근이죠. 앗 죄송합니다. 버릇이 들어서. 낙원을 알고 있는 사람이, 사람들을 낙원으로 이끌고자 할 때 어디에 서는 지가 중요하다고 봐요. 그 사람이 낙원에 들어가서 이곳이 낙원이니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를 치는 것이 한 가지겠죠. 그 사람은 낙원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낙원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온갖 유혹의 말을 던질 수 있겠죠. 그런데 저라면, 낙원을 알고 있더라도 낙원 안에 들어가 있진 않겠어요. 사람들과 같은 곳에 서서 저곳이 낙원이니 저쪽으로 가자고 얘기할 거예요. 목표가 분명하다고 해도, 사람들은 현실에서 수많은 과정을 겪어야 그 낙원으로 갈 수 있거든요. 그 과정을 사람들과 함께 풀고 싶은 거죠.
“또 다시 추상의 극치를 달리려 하는구나.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오자. 자 이제는 <작은이야기>를 펼쳐들고 네가 평가를 해야하지 않겠냐. 그래야 기획도 짤 수 있지 않을까. 너 맨 날 이런 얘기만 하다가는 지원서류도 못 내고 말겠다.”
- 그래요. 얘기를 해야죠. 아마 이 글을 읽는 이들도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하고 읽고 있을 것 같아요. 사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 글이야말로 ‘천천히 읽을수록 더 좋은 글’인데…
“이 녀석아 말장난 그만하고 얼른 얘기나 해봐.”
- 그런데 사실 지금부터는 별 얘기 없어요. 저 지금 <작은이야기>에 대한 고민 시작한 지 일주일밖에 안됐거든요.
“너 같은 녀석 때문에 우리 사회가 문제야.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 놓고 막상 해 보라면 꼬리 내리는 것, 그것부터 고쳐라.”
- 뭐 그렇다고 이쯤에서 다 끝내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우선 저는 잡지는 일정정도 계몽성, 선도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앞서 제가 얘기한 씨줄과 날줄은 취재기자들이 관심을 가질 부분이죠. 청탁을 맡길 수도 있지만, 그에 맞는 철학을 가진 이를 찾는다는 게 현실적으로 무척 어렵거든요. 사실은 평가서를 제가 따로 만들었거든요. 그것 드릴 테니까. 선생님께서 한 번 읽어보세요.
"그럼 너 왜 나한테 찾아온 거냐. 그냥 이메일로 보내지. 내가 별로 해준 얘기도 없는데."
- 선생님 그거 아시죠. 그냥 있어주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존재. 선생님은 그런 존재죠. 그럼 평가 및 기획서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저 직장 옮기게 되면, 술 한잔 사 드리죠. 모두 선생님 덕분이니까요.
집 앞 나무에 까치가 집을 짓네
손님이 오려나
……
까치가 손님이지요
<전화 통화를 하다가> (2000.5.)
'서른의 생태계 > 서른의 생태계30+3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이야기> 취직은 베팅이다 (0) | 2009.07.25 |
---|---|
또다른 세상 (0) | 2009.07.25 |
‘즐겁고 고마운’ 인연의 부름 (0) | 2009.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