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려다가 다시 불을 켰다. 책을 한 권 펼쳤다. 참 오랜만에 책을 읽었다. 낮에 유진 선배와 통화하다가 들었던 내용을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저자의 인생사였다. 30여 분간 그 부분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뭔 가 한 가지를 정리해야겠다는 욕구가 강해졌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작은이야기>생활에 대한 정리였다. 이름하여 <작은이야기>한 달 평가다.
5월 2일 공식적인 첫 출근 후, 오월 내내 밤 11시 무렵까지 회사에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김없이 술자리로 향했다. 밤 11시 무렵까지 근무하는 날도 뒤에 술을 마셨고, 집에 귀가한 시간은 12시를 꼬박 넘기게 마련이었다. 오죽하면 두어 달 쯤 된 것 같은 맥주가 냉장고에 그대로 모셔져 있으랴.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하겠다는 다짐은 외형적으로 보면 잘 지켜진 편이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때 내가 말한 ‘살다시피’엔 개인적인 삶도 충분히 포함된 구상이었다. 퇴근 시간 이후에는 사무실에서 개인적인 글을 쓰고, 공부하는 시간으로 활용하겠다는 거였다. 그러나 그런 다짐은 아직 이르다는 것을 절감했다.
오월 첫 주.
초반엔 기사를 작성했다. 입사 직전에 청탁받은 기사였는데, 4월 30일과 5월 1일 일정이 꼬이면서 결국 2일에야 원고를 넘겼다. 이후엔 곧바로 <작은이야기> 6월호 마감에 들어갔다. 편집장이 나눠 준 일감은 단순했다. 그야말로 상상력과 글발로 쓰면 됐다. 그러나 여지없이 깨졌다. <작은이야기> 분위기도 잡지 못했을 뿐더러, 그런 류의 글쓰기가 익숙치 않았다. 그 마감이 이어져 5일 날도 출근했다. 한편으로는 급작스럽게 날아온 벌금형 약식판결문 때문에 보도자료를 쓴다고 7일 일요일까지 출근했다.
오월 둘째 주.
8월호부터 적용될 개편안 작성에 주력했다. 6월호 마감은 거의 끝났으니 부담스러운 점은 없었지만, 8월 개편안 이전에 7월호도 진행해야 하는 이중 부담이 있었다. 더욱이 <작은이야기>의 전체 분위기 파악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개편안을 구상한다는 게 긴장을 불렀다. 그래서 매일 퇴근이 밤 11시로 될 수밖에 없었다.
오월 셋째 주.
이메일 답장을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개편안에 몰두했다. 취재할 틈도 없이 개편 기획안을 내야하는게 곤욕이었다. 더욱이 필자섭외는 더욱 여유가 없었다. 개편안을 준비하면서 내심 여성분야를 포함한 인권 관련 꼭지를 만들고 싶었다. 기획안엔 넣었지만 편집장과 기자들을 설득시키지 못해 기각됐다. 다음에 제대로 기획해서 올리겠다고 했다. ‘운동권’들의 목소리가 아닌, 운동권의 정신을 담되 목소리가 가벼운 그런 기획을 해야 했다. 의욕만 앞섰을 뿐 그런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이 전혀 없었다.
한 꼭지를 기획하려면 최소한 두어 시간은 걸렸다. 머리를 굴리는 시간을 빼더라도 인터넷에서 자료 정도는 찾아봐야 했다. 그 꼭지에 맞는 필자까지 찾으려면 하루에 끝나지 않을 일이다. 답답한 마음에 영풍문고에 들렀다 오기도 했다.
오월 넷째 주.
8월호 개편안은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일단 1차적으로 내용을 추슬렀다.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대략 이후 개편은 편집장과 좀 더 상의를 하기로 했으나 서로가 바빠 이 주엔 엄두를 못냈다. 대신 7월호 마감에 주력했다. 필자를 선정해 원고 청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필자 섭외에서 일이 꼬이고 말았다. 주로 유명 문화인물에게 청탁하는 꼭지를 두 개 맡았는데, 이게 계속 펑크났다.
잡지를 미리 보내주고 청탁을 했는데도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다. 매체 인지도의 한계와 내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다. 취재도 한 꼭지맡았는데, 내부 일이 쌓여 다음 주로 미뤄 두었다. 조금 여유가 생기면 개편을 상의할 만한 사람들에게 책을 발송했다.
지난 주 말과 이번 주 초에 신입기자 두 명이 새로 들어왔다. 이들에 대한 ‘사수’ 역할이 주어졌다. 선배 노릇을 해야 한다. 기사를 봐 주고, 사무실 분위기도 전해주고.
오월 다섯째 주.
7월호 마감에 집중했다. 31일은 거의 40여일 만에 취재수첩을 펼쳐본 날이었다. 울산으로 취재를 떠나는데, 전날 술을 늦게까지 마셔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잠을 잤지만, 즐거운 하루였다. 올라오는 비행기에서도 기분이 상쾌했다. - 짠돌이가 비행기 탈 생각을 했으면 정말 무지 바빴나보다.
유월 첫째 주.
울산에서 취재한 원고를 이틀에 걸쳐서 썼다. 사무실 청소를 한다고 아침에 진을 빼기도 했다. 일요일에 출근해 거의 원고를 끝냈다.
유월 둘째 주.
이번 주다. 엎친 데 덮친다고. 고정 필자가 둘이나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개편안부터 연재하려 했던 꼭지를 당겨 진행했다. 6월 5일 취재해 6일 넘겼다. 그로써 7월호 마감은 끝났다. 그러나 다시 8월호 준비다. 밀쳐둔 개편안을 봐야 한다. 내일부터 당장.
한 달은 짧은 시간이지만, 입사하면서 쓴 서류에 담은 내 생각들은 많은 부분 깨져 나갔다.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었다. 그 깨져나간 자리에 새로운 생각을 정리중이다. <작은이야기>에서 가장 큰 차이는 개편안 기획에서 드러났다. 스스로 <작은이야기>에서 펼치고자 한 내 꿈들은 ‘기사’에 제한돼 있었다. 어떤 주제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주였다.
참 안일하게도 전체적인 틀을 보려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고민거리에 두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기사에 한정된 생각은 개편 기획을 하는데 별다른 생각을 내놓지 못한 결과로 나타났다.
개편회의를 하면서 사람(취재원)에 대한 절박함을 느꼈다. 다른 매체에서 취재하지 않은 새로운 취재원을 찾아야 한다. 단순히 기사거리를 취재하는 것이 아닌, 평상시 떠도는 얘기들을 들어야 한다. 평상시 취재는 <말>보다 <작은이야기>가 어렵다. <말>이야 이른바 출입처를 그나마 확보할 수 있지만, <작은이야기>는 그게 난감하다. 누구를 만나 무슨 얘기를 들을 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 부분을 차분히 정리하지 않고서는 개편 역시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내 나름의 방식을 정해야 할 것 같다. 비록 개편안에는 늦을 것 같지만, 지금 내 역량 안에서는 어쩔 수 없다.
입사서류에 담은 구상이 깨진 원인은<작은이야기>토대가 약하다는데도 있다. 출판사 전체가 아직 팀별 체제가 확립되지 않아 서로 협조를 구할 상황이 안 돼 있다. <작은이야기>팀 역시 캠페인 사업을 비롯한 일련의 사업이, 현재로서는 체계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스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앞으로 몇 달 간은 그런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 시간 동안에 <작은이야기>를 중심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야 한다.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그들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곧 첫 출발선이다. 다음으로 그들과 함께 토대를 닦는 게 필요하다. 지역통신원을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고, 누가 잘 어울릴 지, 홈페이지를 어떻게 꾸미고, 독자들과는 어떻게 만날 지. 내 혼자만의 고민은 아니지만, 일단 나부터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할 것 같다. (2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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