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쓰다만 글이 있다. <인물과 사상> 2000년 5월호와 6월호에 <작은이야기>에 대한 비판이 실렸다. 그에 대한 반론을 쓰고 싶었다. 정말로 쓰고 싶었는데, 쓰다가 마감 못한 글이 있다. 그냥 묵혀 두었다가 다음 달에 써도 큰 탈이 없을 듯한데…. 문제는 바뀌고 있는 내 생각이다. 바뀌는 내 생각은 이 글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좀 더 넓고 크게 보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지금 마감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지워 버리자니 내 의식의 변화를 기록해 두지 않는 것 같아 찜찜하다. 하여 60% 정도 진행한 글을 올린다.
마감을 끝내고 나면 마음에 빈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에 밀물처럼 몰려드는 생각, 글을 쓰고 싶다. 이 무슨 직업병이란 말인가. 그토록 지겨운 원고마감이 끝났으면 이제 글이 지겨울 법도 한데…. 그러나, 취재와는 별개로 내 마음 안에 풀고 싶은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 때는 어쩔 수없이 자판을 두드린다.
<작은이야기> 8월 개편호 원고마감을 끝낸 지금. 그런 글이 있다.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는 이 글 말이다.
아름다운 책. 독서의 계절도 아닌 이 여름에 아름다운 책을 말하는 이 일이 우선 반갑다. 더욱이 <작은이야기>가 그 논의를 위한 대상으로 도마 위에 올랐으니 여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작은이야기>를 아름답다고 혹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작은이야기>를 만드는 이로써, 또한 아름다운 책을 만들고 싶어하는 한 사람으로써 그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적어보고자 한다. 그러나 단순히 책만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내 능력이 된다면, 우리 시대 글이란, 사람을 움직이는 글은 어떠해야 하는지까지 담고 싶다.
여기까지가 서두다. 거창하게 시작했다. 다음 이어지는 두 개의 토막글은 <인물과 사상>다운 예를 들고 싶었다. 운동에서 아쉬운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얘기하고 싶었다.
취재- 나와 우리
<작은이야기> 8월호 취재로 ‘나와 우리’ 김현아 대표를 만났습니다. ‘나와 우리’는 생긴 지 2년 남짓 된 시민단체입니다. 지난해 베트남 전쟁당시 한국군 양민학살 지역을 답사해, 전쟁 당시 양민학살의 실상과 피해 등을 국내에 알린 단체입니다. 지금은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대책위가 꾸려진 상태입니다.
김현아 대표는 지난 3월 베트남 답사를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한 한국군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주민인 응웬티니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를 만나는 일은 고통이었습니다. 할머니는 30년 전 얼굴에 총탄을 맞아 마치 플라스틱 인형이 불에 이그러진 형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이 새벽에 마을을 습격해 마을 주민 100여명이 죽었는데, 그 때 할머니도 네 명의 자식일 잃고,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 일로 응웬티니 할머니는 자식을 잃고, 몸도 잃어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셈이었습니다.
김 대표가 응웬티니 할머니를 보고 마음이 아팠던 그것은 그런 ‘과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과거가 고스란히 ‘현재’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올해 여든 네 살인 할머니는 그동안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해 왔지만, 마을 전체가 가난한 동네인지라 먹고살기 힘들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할머니 역시 그런 사정을 뻔히 아는지라 언제까지 의지하고 살 수만은 없었다. 3년 전부터 나오기 시작한 정부보조금은 6만동(우리나라 돈 6천원)정도라 살아가기에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김씨는 답사에서 돌아와 나와우리안에 꾸려진 ‘베트남과 친구되기’라는 모임을 통해 응웬티니 할머니를 돕는 일에 나섰습니다. 지금은 모두 열 명이 2만원씩 모아 응웬티니 할머니와 같은 처지에 있는 열 분의 베트남 노인들을 돕고 있습니다.
“베트남전에서 죽은 대부분의 한국 군인들이 그렇듯, 전쟁 당시 무고하게 죽었던 베트남 주민들은 무척 가난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이 당한 억울하고 서러운 죽음을 풀어주는 일로 생존자와 희생자의 상처를 감싸안아야겠다 싶었습니다. 그것이 곧 우리나라가 베트남에서 저지른 일에 대한 사죄입니다.”
두어 시간 그이와 인터뷰 하면서 든 생각은 운동의 섬세함이었습니다.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이슈화해, 최대한 정부를 압박하는 운동이 아마도 전형이었을 겁니다. 이 사회에 떠도는 모순과 권력에 대한 본질적인 싸움이라는 거겠죠.
나와우리에는 그런 강경함 못지않게, 그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있었습니다. 노근리, 매향리가 반미운동을 하는데는 더 없는 좋은 기회기긴 하지만, 그 전에 그 지역 주민들이 겪었을 피해와 고통에 대해 먼저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진정 운동이 궁극적으로 가고자 하는 길은 아닐 것입니다.
김현아님을 만나면서 머리로 외치는 운동 못지않게 마음으로 다가가는 운동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주인권학술회의(2000)
“인권감수성’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게 해 준 감수성이 풍부한 영페미니스트들의 자기표현을 환영합니다. 이 대자보를 계기로 인권학술회의가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모습,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과 ‘인권에 대한 열정’이 있는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것 말입니다.”
지난 2월말 제주도에서 열린 인권학술회의에서 내걸린 자보 내용이었습니다. 이 학술회의에서는 이른바 영페미니스트들이 학술회의 기간에 느낀 내용을 자보라는 형식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이 학술회의는 저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인권감수성이었습니다. 인권 운동에 감수성을 살리자는 것. 사회 운동쪽에서 보면 신선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감수성이 운동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당시 발표된 논문에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논문은 평화운동과 관련한 내용이었습니다.
“감수성 훈련은 자칫 무감각, 무관심해지기 쉬운 문제를 끊임없이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책임적 인식과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평화운동․교육에서 감수성 훈련을 중시하는 것은 평화에 대한 주제나 평화를 이루는 방법,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이 그렇게 쉽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발표자는 환경문제 등은 실제 생활에서 우리에게 미칠 영향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관심이 많지만, 평화운동은 일상과 멀리 떨어진 문제로 본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기지촌 여성의 인권이 유린되어도, 동티모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도, 내전으로 가족을 잃고 우는 사람들을 보아도 그때뿐이라는 겁니다. 마음을 열고 이들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훈련과 성찰이 없이는 평화운동을 올바로 수행하기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나와 이웃, 나와 사회, 나와 세계 등의 관계를 끊임없이 훈련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순서는 충분히 바꿀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은 쓰인 대로 정리했다. 윗글은 우리시대의 글이란 문제를 풀기위한 소재로 정리한 내용이다. 다음부터 쓰는 글은 이른바 교양지들에 대한 위상에 대한 이해를 돕고 싶었다.
두어해 전에 <좋은생각> 발행인 정용철님을 인터뷰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이는 <좋은생각>의 창간 당시 심정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시 회사 홍보과에서 근무할 때 였어요. 생산직 여성들의 생활을 유심히 보니, 그들이 글을 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더라구요. 신문도 그렇고, 또 사보는 딱딱한 느낌이 강하잖아요.”
그래서 그이는 <좋은생각>을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성공한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성공은 단순히 월 몇 십만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는 경제성만을 말하진 않습니다. 저 역시 궁금합니다만, <좋은생각>이 그렇게 많은 독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요. 저는 한편으로는 <좋은생각>의 독자들이야말로 요란한 게릴라들과 달리 조용한 서민(?)의 부단없는 전진이라고 봅니다. 아마 누구는 <좋은생각>의 독자들을 ‘깨어있지’ 못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이른바 깨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의 자기과시일 뿐입니다. 또 하나의 오만일수도 있지요. 정용철님은 말합니다.
“창간 때부터 보던 독자들도 많이 성숙했어요. 긍정적인 내용을 읽으면서 많이 변했지요. 물론 제가 제일 많이 변하긴 했지만. ‘좋다’란 말은 옳고 그름과는 다른 말이잖아요.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좋은 생각이란 긍정적인 생각이더라구요.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면 일어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자살을 결심했던 한 독자는 <좋은생각>을 만난 후 교단에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좋은생각>의 이야기를 통해 작은이야기의 얘기를 풀어가고 싶었다. 어차피 <좋은생각>을 인정할 부분이 있었으니까. 이 부분이 미완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인물과사상>에 실린 글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
아름다운 책. 불․행․하․게․도 <인물과 사상>에 실린 글에서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통렬히 비판하고 고쳐야” 아름다운 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름다운 책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진정 아름다운 책은 그 책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제 색깔을 제대로 지니고 있다면 진정 아름다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목소리가 남을 - 단지 사람이 아닌 이 우주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 - 해하지 않는다면 진정 아름다운 책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름다운 책들이 많다면 이 세상도 그만큼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남을 해하지 않는 다양성은 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꽃입니다. 그 꽃들을 나무라지 마십시오.
<인물과 사상> 5월호와 6월호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박혜인님이 쓴 글입니다.
“세상은 무조건 아름답지 만은 않습니다. 그 아름답지 못한 것을 고치기 위해 우리는 통렬히 비판하고,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작은이야기>에서는 그런 자세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아름답기만 하고 멋지기만 한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신문을 보면, 온통 실인 범죄뿐인데 <작은이야기>는 그 모든 것을 아량있게 감싸 안습니다. 마음의 등불을 밝혀주는 아름다운 책이라는 상상은 깨졌습니다.”
이 글의 논리대로 제가 <인물과사상>을 비판해 보겠습니다.
“세상은 무조건 비판적이지 만은 않습니다. 그 비판하는 것을 고치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선한 행동을 하는 이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물과 사상>에서는 그런 자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비판해야 하고 주장해야만 하는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주위를 보면, 아직도 따뜻한 이웃,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이들이 많은데, <인물과 사상>은 그런 것을 애써 외면합니다. 우리의 세상을 밝게 만들어주는 잡지라는 상상은 깨졌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박혜인님의 글 논리로 안티조선 사이트를 비판하자면, 어떤 결론이 나올지는 뻔합니다. 세상은 <조선일보>만 있는 게 아닌데, 마치 조선일보가 전부인 것처럼 만든다. 뭐 그런 논리이겠죠. 우습게도 이렇게 얘기가 되는 것은, 박혜인님의 비판이 마치 야구광인 관객이 축구선수에게 야구 못한다고 나무라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네가티브와 포지티브의 입장차이다. 그 차이를 무시했다는 것인데…, 아무튼
책은, 잡지는 지향하는 바들이 제각각입니다. <인물과 사상>과 <작은이야기>가 지향하는 바는 다릅니다.(저는 궁극적으로 같다고 생각하지만요) 따라서 <작은이야기>를 비판하려면 작은이야기가 지향하는 바를 제대로 실행하고 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진중권님이 <조선일보>를 비판할 때 왜 진보적인 시각을 다루지 않느냐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보수를 자칭한다면 제대로 된 보수를 하라는 것이죠. 박혜인님의 비판은 그런 면에서, 작은이야기를 살펴보는 관심에 대한 고마움만큼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미영님은 말합니다.
“혜인님의 말씀처럼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고 <작은이야기>와 같은 책들은 그저 그런 면을 감싸안음으로써 우리의 눈을 가리는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미영님이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을 염려하시는 지는 어렴풋이 짐작은 합니다. 저 역시 작은이야기에 실린 글들이 자칫 ‘무작정’ 따뜻한 이야기만 담아 자칫 독자들을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하는 무기력증에 빠뜨리지 않을까하는 마음을 늘 염두하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미영님의 말씀 역시 <작은이야기>가 모든 얘기를 해 주길 바라는 과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따뜻한 이야기들이 눈을 가린다고 하는 생각 안에는, 역시 현실에 대한 비판을 담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작은이야기>에 실린 글들은 우리 일상의 소박한 삶을 담습니다. 또한 너무 크고 넓고 바쁜 세상에 작고 천천히 가고자 하는 내용이 함께 합니다.다시 마음을 열고 <작은이야기>의 글들을 펼쳐 보십시다. 간혹 ‘눈을 가리는 면’을 보이는 글도 있겠지만, 글 하나하나에 사람이 담겨 있습니다. 잘 난이든, 못난 이든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이웃들의 글이 있고, 우리들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은 글도 있습니다.
이쯤에서 글을 밀고 나갔어야 했다. 안도현님의 동화 <관계>를 인용해 작은 것이 가지는 큰 의미를 설명하고, <작은이야기>가 지향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드러냈어야 했다. 그러나 글은 이쯤에서 끝났다. 글을 쓸 때 충분히 승산이 있는 글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포기했어야 했다. 게을렀다. 그래서 이처럼 어설픈 글을 남긴다. (2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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