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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0+31

청춘보다 값진 기다림

 

그것은 어찌 보면 속절없는 사람이 택할 수 있는 마지막 모습일지 모릅니다. 아니, 그것은 ‘선택’의 축에도 들지 못하는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닌 다른 어떤 일을 택하는 순간, 삶에서 고백 같은 일은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기다림.


고백, 그 후 대개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기다림을 맞게 됩니다. 고백이 어려웠던 사람일수록 이 외통수의 길, 기다림은 너무 쉽게 다가옵니다. 그리곤 말합니다.

‘너… 기다릴래, 아님,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갈래’  

이쯤에서 연애는 또 한 고비를 맞이합니다. 내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당신을 어찌 할 것인지….
 

뒤돌아서 다른 사랑을 찾는다고 해서 지금의 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이란 사람마다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으니, 한 사람, 한 세상에서 얻지 못한 사랑이 다른 세상에서 같은 빛깔로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오해하진 마십시오. 꼭 뒤에 오는 사랑이 지금 사랑보다 못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에는 순서가 없고, 또한 선착순이 반드시 보다 좋은 사랑을 가늠하진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적당한 순간 순간에, 사랑을 택하곤 합니다.

그 무렵, 그 시간을, 안다면 사람들은 저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피워낼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적절한 때를 알지 못하므로 순간 순간 그렇게 선택하고 그런 사람을 만나 그런 사랑을 나눕니다. 아마 이쯤에서 생각하건대, 그 나이란 것 - 이른바 결혼적령기 - 을 조금 벗어버리면 그 기회는 조금 더 넓어질 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연인에게 온 몸과 온 마음이 끌려가는 것은 진정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에너지는 다른 사람, 다른 사랑을 생각할 여지마저 거둬버리고 맙니다, 되돌아 나간다는 것을 상상할 힘마저 잃게 됩니다. 사랑이란 내 안에서 자란 에너지임에도 이제는 그 에너지를 내가 감당할 수 없게 돼 버립니다.   

하여 사람들은… 다른 사랑을 찾는 일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사랑을 기다릴 것입니다. 영원히…. 이쯤에서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의미심장한 철학을 말합니다.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건,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 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없는 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

운명을 걸 수 있는 사랑은 대개 그 좋은 한 시절 청춘을 바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쯤 되면 어쩔 수 없이 계산하게 됩니다. 청춘을 바칠 것인가, 다른 사랑에게로 갈 것인가. 


그쯤에서 기다림을 택합니다. 연인을 기다리기로 합니다. 최근에 우연히 오래된 종교잡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9년 동안 보살펴 온 서른여덟 된 한 여인의 사연이 적혀 있었습니다. 결혼을 마다하고 어머니를 돌보는 그 여인의 삶을 접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사랑을 말합니다.


“끝을 보기 위해 고통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를 삶으로 끌어안은 행위야말로 ‘사랑’ 그 자체이다. 자신의 삶이 ‘사랑’이 아니라 ‘고통’의 연속이며 그 고통과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녀는 벌써 지쳐서 삶을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바라거나 조건 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온전히 어머니에게 투신한 그녀의 삶이야말로 성모님께서 살았던 참사랑이 아니겠는가.”


뜻이야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고통 그 자체를 삶으로 끌어안은 행위’를 실천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 앞에서는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읽으면서, 남녀간의 사랑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흥미롭지요. ‘사랑’이라는 말이 가진 포괄성 때문에 ‘연애’와 구분하자고 했는데, 이제 보니 연애 안에 그 사랑이 있음을 느끼고 있으니…)


사랑을 온전히 받아 안지 못한 사람 앞에 선 이로서는, 기다림 역시 그 삶의 일부라고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 기다림 마저 연인을 사랑하는 그 마음 안에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기다림의 끝에 무엇이 올 지, 가늠할 여지가 아무것도 없지만. 아니, 어쩌면 그 기다림의 끝은 이쯤 되면 불안하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스스로들 돌아보면 늘 부족해 보이게 마련입니다. 힘이 미약하다는 것을. 연인을 위해 무엇 하나 제대로 해 줄 게 없다는 것을. 어떻게 사랑을 전하고, 어떻게 가꿔가야 하는지, 때론 사랑의 그림자가 만든 그 어둠에서 어떻게 참아야 하는지까지. 그 모든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조급해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잘 것 없고 서툰 표현을 숨기려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숨기려는 마음은 또한 반대로 간혹 연인의 마음을 훔쳐보려 하기도 합니다. 이를 보며 연인은 무엇을 생각할까. 이미 결론을 내려두고 있지는 않을까. 혹여 연인 안에 어떤 결론이 있지는 않을까. 등등.


이 기다림의 시련 속에서 더 늦기 전에 다시 첫 마음을 떠올려야 합니다. 자칫하면 그런 사랑은 결국 깊어질수록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는 어떤 교수님은 그러더군요.

“연애는 노동이다.”

처음 연애를 할 때는 남녀가 상승곡선을 그리는 화살표처럼 올라가지만, 연애라는 게 언제나 그처럼 상승곡선을 그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상승곡선을 지키기 위해 서로들 노력하게 되는 데 그때부터는 노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연애란 나를 잃지 않고 연인 역시 자기존재를 잃지 않는 만남일 것입니다.
그쯤에서 다시 새롭게 사랑을 만들어야 합니다. 내 안의 나에게 충실하자고. 그 안에서 연인을 만나는 것이라고. 더디 가더라도 ‘나’를 잃지 않고, 연인 역시 자신을 잃지 않고 만날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만들자고. 마라톤 같은 연애의 길을 가능한 즐겁게 가자고. 서로가 규정하지 않는 인연을 갖자고.


신이 인간에게 가르치려는 사랑이나, 한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연애나, 결국 모든 사랑은 한 길에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더라도, 그 기다림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뛰쳐나갔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진정 신이 있다면 이 얼마나 재미있는 놀이일까요. 때론 바로 옆에 두고서 술래를 찾는 아이들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고. 이미 차가 떠난 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할 모습을.


그러나,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신이 그것을 보고 있더라도 그것 역시 신이 만든 것이니, 재미있는 일로 느끼긴 할지언정, 창피한 일은 아닙니다. 안심할 것은 사람들 역시 그것 이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여 기다림도 사랑입니다. (2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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