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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자신의 힘을 알기나 하는지”

 

북경에서 온 이메일,

“세상에 좋은 잡지, 같이 만들어 가요. 가끔은 흔들리면서.”


<작은이야기> 3월호에 실린 편집후기다. 편집후기. 한 달 동안 잡지를 만든 수고로움 뒤에 남는 느낌을 풀어내는 공간이다. 지난 1월호부터 가능한 짧게 쓴다는 다짐에 따라 가능한 한 줄로 끝맺었다. 이번 3월엔 북경에서 온 이메일로 대신 채웠다. 이 이메일을 보낸 이는 오지여행가로 알려진 한비야님이다.
한비야님은 그 동안 몇 권의 책을 내고 현재는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북경에 머물다 2월 말 귀국했다. 작은이야기에는 지난해 8월부터 글을 연재하고 있다. 그래서 원고 청탁을 할 때는 이메일로 주고받곤 했다. 한비야님은 기운이 넘치는 특유의 말투를 이메일에서도 구사한다. 이번 3월호 원고청탁을 하는데 한비야님으로부터 이런 이메일이 날아들었다.


1월에 마음 흔들리는 일이 있을 줄 알았어요. 지금은 정리가 되었나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자기 안의 자기와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법이잖아요.


‘마음 흔들리는 일’을 알았다니 아무리 마감이 바쁘다고 해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이메일을 보냈다. 어찌 그렇게 마음을 읽는 독심술을 가졌냐고. 그런데 돌아온 답장이 걸작이었다. 

 

귀여운 노정환씨, 그렇게 나 속상하다 티를 내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겠어요? 예를 들면 평소에 안 하던 행동, 원고를 받았는데도 잘 받았다는 답신이 없고, 새해가 되었는데도 잘 있냐 인사도 없고. 편집후기에 그저 한 줄 알쏭달쏭 한 말하고…. 하여간 마음의 평화를 빕니다.


이메일을 읽으면서 막 소리 내어 웃었다. 게으른 사람을 이렇게 꾸중할 수도 있는 것이구나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더욱이 3월호로 보낸 원고가 세상풀이 1월호에서 고민했던 내 꿈을 찾는 여정을 다루고 있었는데, 그 꿈을 찾는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아 즐겁기도 했다. 한비야님이 보낸 이메일은 이렇게 끝맺는다.    

 

지나간 얘기지만 나는 지난 여름 <작은이야기>에 정기기고를 하자고 했을 때 무조건 안 한다고 하려고 했었죠. 그런데 그 아이스크림 집에서 박 편집장하고 노정환씨를 보면서 그 '진정성'이 전해지더라고요. 그래도 버티려고 했는데 결정적으로 노정환씨가 나에게 엽서를 한 장 보냈드랬어요. 그걸 보고 결정했죠. 이런 사람들하고 라면 같이 일해도 좋겠다라고. 일하면서 즐겁겠다고. 지금까지는 그렇답니다. 노정환씨는 자신이 그런 힘이 있는 줄  알기나 하는지. 안녕.


그랬다. 지난 여름, <작은이야기> 개편호를 준비하면서 내겐 그런 열정이 있었다. 어느 교수님에게 원고 청탁을 하기 위해 팩스를 보내고 책을 등기로 발송한 후에도 연락이 없자 학교 연구실로 불쑥 찾아갔다. 연구실 문이 잠겨 있어서 돌아서려 했는데 문이 열리며 나타난 교수님, 한 30여분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는데도 결국 원고를 쓸 수 없다는 얘기만 듣고 돌아서던 여름이 있었다.

한비야님도 그랬다. 잠시 귀국한 한비야님을 신촌 녹색극장 1층에서 만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었을 때, 이미 한비야님은 일간지와 여성지에 글을 한 편씩 쓰기로 약속한 지라 더 이상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었다. 팥빙수를 다 먹을 때까지 “생각해 보겠다”는 답변 이외에 확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후 어찌하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싶어 다시 몇 권의 책과 세상풀이를 한 부를 보내고 짧은 편지를 보냈다.


며칠 전 편집장은 대강 정리된 개편 기획안을 두고 조금 답답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저 역시 <말>에서 <작은이야기>로 올 때 나름대로 생각했던 구상들이 많이 어그러진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두고 누구를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저의 능력 문제이겠지요. 딴에는 시야를 넓혔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내 안의 테두리에서 반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저를 발견하곤 했으니까요. 그쯤에서 스스로에게 타협했습니다. 잘 하자고 하는 일을 두고, 자기성찰이 아닌 자기비하는 결코 도움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제 안에 숨어 있었던 오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문도 구하고, 좀더 나를 열어두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은이야기>에 온 지 두 달도 안 되었는데 뭔가 거창한 개편안을 내겠다고 하는 것이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을 만나고 회사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편집장은 그러더군요. 한비야 선생님이 우리에게 글 못 써주겠다고 하셔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어쩌면 저보다 선생님의 글을 받는 것이 더 간절할 텐데도…. 그 마음에는 사람을 일이 아닌 사람으로 만나겠다는 편집장의 생각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편집장의 그 입장에 공감하곤 있지만, 실은 편집장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배여 있지는 않는 듯 합니다.    


며칠 전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한 선배와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는 주한미군의 범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운동’하는 사람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사람은 없고 주장만 있는’ 사람들이 그 선배의 주변엔 더러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간혹 그들로 인해 속앓이를 하고 했습니다. 그 선배는 운동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서 비로소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말은 쉬운 얘기인데, 현실적으로 그런 입장이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죠. 그러던 그 선배가 우연히 한 잡지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글이 발표되고 난 후 이곳저곳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연락이 온 모양입니다. 그런데 선배는 열흘 있으면 오키나와로 인권과 관련한 공부를 하러 떠나게 됩니다. 더욱이 최근엔 몸이 좋지 않아 수술까지 받았습니다.


선배는 지나는 말투로 인터뷰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더군요. 저 역시 지나는 말투로 얘길 했습니다. 선배가 생각하는 새로운 인권에 대한 생각을 가능한 나눠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그래도 선배가 나눠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그래서 글을 쓸 시간은 없겠지만, 인터뷰는 했으면 좋겠다고요. 실은 제가 선배에게 한 얘기는 누구에겐가 들은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감히 선생님께도 그런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가진 생각을, 글을 <작은이야기> 독자들에게도 나눠 달라고 말입니다. (… …) 어제 처음 선생님을 뵈었습니디만, 건강한 웃음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도 무언가 부족하다 싶어 중국으로 떠나기 하루 전 편집장과 함께 희망 옷 두 벌을 들고 밤 10시 무렵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경기도 어느 곳으로 갔었다. 확답을 주기로 한 날이었으나 전화로 통화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직접 만나보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은 가족끼리 잔치를 하고 있던 날이라 만나기 어렵겠다는 연락을 받고는 - 통화 할 때는 그냥 근처에 왔다가 들리려 한다는 정도로만 얘기했다 - 도중에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 막차를 타기 위해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되돌아 왔다. 되돌아오는 전철 안에서도 이제 무얼 하지 싶었지만, 달리 무엇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저 마음으로 비는 수밖에.


뭔가 간절하긴 한데 달리 무엇을 할 수 없을 때, 내가 택하는 방법은 그냥 나를 보여 준다. 내 진정을 보여주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할지 아직 모르고 있다. 한비야님이 내 삶에 고마운 것은 그 때문이다. 내 마음을 오롯이 읽어준 것이다. (2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