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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봄, 내 맘의 생태계



갑작스레 내린 폭설이 녹아 빗물처럼 자국을 남긴 도심거리. 한낮의 햇살 안에 든 몸이 무언가 알은 체 한다. 겨울 다음에 올 계절, 봄에게 몸이 먼저 달려가려는 모양이다. 회사 계단 창가 너머로 보이는 목련나무에 솜털뭉치처럼 달린 새순을 보며 그 봄을 확인할 법도 한데 오늘은 먼 길을 떠난다.

제천으로 취재를 떠나는 길의 고속버스. 창 밖에 내걸린 하늘이 무겁다. 어제까지 푸른빛이 돌던 하늘이 온통 잿빛이다. 그 무거운 하늘을 인 야트막한 야산들 기슭에 남은 잔설 들은 그저 봄이 조금 더디게 올 것이라는 눈짓만 보낼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눈짓에서 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은 저마다 한 세상을 이루고 산다.’
이 말에 거듭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순간 술자리에 앉아 잔을 기울이는 이나,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에 걸려 눈물을 쏟는 이나, 실연의 깊은 상처를 보듬을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으면서 연애로 뛰어든 이들도 한 세상이고, 한 우주다. 가난으로 시작해 여전히 가난에 있는 내 부모들까지도.
지구라는 이 별에 생태계라는 것이 있어 존재를 유지해 주듯이, 한 세상인 사람 역시 그 존재를 존재로 확인해주는 생태계가 있다.

봄을 찾는 내 마음에도 생태계가 있다. 한 경지 더 높게 보는 사람은 사람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과도 교감을 얻을 수 있지만, 나로선 우선 사람과 사람으로 엮어진 생태계들에 귀를 기울인다.
주인권학술회의(2001)에서 만난 1백여 명의 사람들. 그들이 쏟는 인권과 평화를 향한 헌신과 수고로움에 감사하고 그들의 열정에 머리를 조아린다. 아울러 자문한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다양한 논의 안에서 어떤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인가.      
한 달간의 감성시위… 얼굴도 알지 못하지만 댓글로 격려를 보내준 20여명의 사람들,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몸 안에 갇혀 있을 선배의 영혼이며, 그 영혼에게 사랑을 보낸 이들, 그들의 마음은 내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아직 대학 생활을 겪어 보기도 전인 새내기들에게 6․15선언이니, 국가보안법 폐지니 하는 정치적 구호들만을 열거하는 저 오리엔테이션 장에서 나온 ‘강요’는 국가권력의 폭력과 무엇이 다른지. 자신의 간절함만을 알 뿐, 타인의 간절함이 무엇인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오만을 미성숙함이라는 이름으로 두어야 하는지. 그들과 스치듯 엮어진 나는 또 무엇인지….    

그 모든 생태계 안에서 새 봄은 피어나고 또한 가꿔진다. 봄은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봄은 이미 마음 구석구석에 와 있다. 창문으로 비친 햇살이 일요일 오후의 나른함을 깨울 때 봄도 함께 일어난다.

제천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 술 한잔 기울였다. 인연과 헤어지려 함께 나선 의림지에, 바람타고 내린 그 눈에서 계절과 계절을 가르는 가름비를 보았다. 그것은 내 마음의 조급함이 불러들인 허깨비는 아닌 듯싶다. 그곳에 선 소나무들 안에도 저마다 봄이 있을 것이란 내 공상은, 차라리 눈보라를 맞을지언정 봄은 희망이란 이름으로 내 맘의 생태계에 작은 미동을 엮는다. 

이 새봄엔 그 생태계들 틈 사이로 또 하나의 생태계를 만들고 싶다.  ‘몸이, 마음이, 꿈이, 생각이 예쁜 여인’과 삶의 깊이와 세상을 품을 따듯한 마음을 주고받고 싶다. 혹 서로의 차이로 인해 상처가 깊어지더라도 결국엔 그 상처 역시 이 생태계를 가꿀 든든한 거름이 된다는 것을 이해할 넓은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둘의 만남이 둘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좀더 너른 세상을 만들 에너지를 얻었으면 싶다. ‘몸이, 마음이, 꿈이, 생각이 예쁜 여인’과 엮는 생태계는 또한 또 다른 생태계들을 더욱 푸르게 엮어주는 엽록소로 녹아들었으면 싶다.
하여 서른 둘에 맞는 이 봄엔 새로운 도약을 여는 발걸음을 열고 싶다. 이 새 봄, 내 맘의 생태계는 그런 푸름을 기억하는 초록빛이고 싶다. (2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