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쌀쌀한 날씨였다. 여전히 얼어붙은 눈들이 곳곳 응달진 골목에 남아 있어 외출하기엔 쉽지 않아 보였다.
지난해 10월. 새벽 4시 무렵에 어둠 속에서 전화가 울렸다. 아버지가 호흡을 하기 힘들다며 전화를 거셨다. 곧장 옷을 챙겨 입고 혜화동에서 택시를 타고 상계동으로 향했다. 택시는 어둠 속을 헤치며 빠르게 달렸다. 마음은 평안했지만, 그러나 그 평안한 틈틈이 여러 생각들이 잔파도를 일으켰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도 불현듯 스쳐갔다.
타고 온 택시를 잠시 세워두고 집에 도착해 보니 아버지는 아랫배가 통통하게 불러 있었다. 주섬주섬 옷을 입히고는 택시를 탔다. 그 길로 상계동 백병원 응급실로 갔다.
그것이 병원생활의 시작이었다. 응급실 직행 후 이뤄진 입원은 며칠 만에 끝났다. 그러나 며칠 후엔 허리와 목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급작스럽게 찾아온 그 병으로 결국 한 달 동안 입원했고 별다른 진전이 없자 아들이라는 이유로 내가 서약서를 쓰고는 퇴원했다.
그렇게 석 달. 다행히 이제는 혼자서 거동하실 정도로 몸은 좋아진 듯하지만, 그렇다고 직장을 다닐 체력은 안 돼 그 동안 다녔던 아파트 경비직을 그만 두게 되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용돈으로나마 벌었던 돈도 만져 볼 수 없게 되었다.
달리 취미 생활이 없으신 아버지가 돈 쓰실 만한 곳은 술 마시는 게 전부인 듯 했다. 그 술이 몸을 망가뜨려 걷는 것마저 조심스러워야 할 형편으로 만들었지만, 최근 3년 동안 세 번을 입원하셨는데 두 번째 퇴원까지도 계속 술을 드셨다. 다행히 이번에 세 번째 퇴원했을 때는 술을 안 드시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술값이 안 든다고 해서 용돈이 필요 없지는 않다. 아니 용돈이라는 말보다는 그야말로 생활비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아버지의 생활비는 내가 짐작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 살고 계시는 임대아파트의 월세와 관리비가 매달 든다. 나머지는 먹을거리다.
직장을 잃은 아버지를 위해 난 몇 가지 일을 처리했다. 우선 아버지가 가진 돈이 얼마나 되는지 통장을 꺼내놓고 함께 살펴보았다. 아버지는 새마을 금고를 이용하셨다. 적은 돈이나마 이자를 챙기시겠다고 통장을 세 개 가지고 계셨다. 급여이체가 됐던 통장에서는 두어 달 사이에 많은 돈이 빠져나갔다. 술값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많은 돈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이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나는 접고 말았다. 그 돈은 아버지 것이므로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때문에 당신은 또 한번 가족들에게 신뢰를 잃었다.
퇴원 후 생활비와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예금 중 한 개를 해약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경제생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내년에는 월세로 살고 있는 아파트를 전세로 계약해야 한다. 월세로 살 수 있지만, 그래도 은행에 약간의 목돈이 있으니 전세로 계약하는 게 나을 듯싶다.
나머지 돈으로 생활하신다고 해도 아버지로선 여유 있는 경제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올 1월 내 경제 계획을 세울 때 아버지의 경제생활까지 염두에 두었다. 내 대학시절, 혹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아버지는 내 학비를 염두에 두고 적금 등을 가입했을 텐데, 이제는 그 역할이 바뀐 셈이다. 우선 생활 잡비를 감당했다. 전화통화료와 도시가스비는 지난 해 말 내 통장에서 자동이체 되도록 조치했다. 그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두었던 의료보험은 내 의료보험에 올려 두었다. 다만, 생활비를 모두 내가 감당하기엔 다른 측면에서 조심스러운 면이 있었다.
남원에 살던, 초등학생 때였다. 매일이다시피 벌어지던 부모님의 부부싸움에 그 날도 울고 있었다. - 이 대목을 쓰려니 마음이 떨린다. 아직도 난 그 때의 부부싸움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나보다 - 울면서, 울부짖듯이 한마디 내뱉었다.
“재산 많이 남겨달라고 안 할 테니까 빚만 물려주지 마세요.”
그로부터 이십 년 정도가 흘렀지만 나는 그 말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 말은 부모님에게도 상처였던 모양이었다. 몇 년 전 아버지는 가끔씩 술을 드시면 어디어디에 통장이 있다면서 빚은 없다는 말을 되뇌곤 했다.
지난해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 아버지는 내가 카드로 결제한 1백여 만의 병원비를 기어이 되돌려 주셨다.
“벌써부터 자식들에게 신세져서 쓰것냐?”
올해 예순 셋의 아버지가 슬쩍 비친 그 한 마디에 나는 돈을 되돌려받았다. 어른들은 어른이라는 이유로 지키는 자존심이라는 게 있다. 그 역할을 다하고 못함을 떠나, - 역할이란 그 규정부터가 맘에 들지 않지만 -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들이 가져야 할 의무란 게 있다. 이를테면 자식들 교육을 시키고 결혼까지 챙겨줘야 한다, 그 전까지는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다, 뭐 그런 것들이다. 그 이후에도 아버지는 내가 돈을 내밀면 그 말씀을 하곤 하셨다.
그러나 최근엔 차츰 그 말에서 힘이 빠진 것을 느끼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늘 그 자존심을 지켜 드리는 일과 도와 드려야 할 선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한다.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그 지점을 찾으려 했다. 몇 가지 생활비를 감당하고 월세를 대시 내는 정도가 내가 생각한 그 지점이었다.
올 초 월세에 보태라고 돈을 드렸을 때도 아버지는 받기를 주저하셨다. 하지만 이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당신의 현실을 어느 정도
이해하셨는지 끝내 뿌리치진 않으셨다. 돈을 건네면서 모자라는 돈은 아버지 통장에서 쓰시라고 했다.
어쩌면 그쯤에서 그냥 일상처럼 스쳐 버렸다면 굳이 내가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설날 무렵에 아버지의 용돈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조카들이 오기 전, 아버지는 조카들에게 줄 세뱃돈을 준비했다. 미리 천원 지폐부터 만원 지폐까지 마련해두고 조카들의 나이에 따라 차등해 지급한다는 계산이었다. 이윽고 아버지는 조카들이 오자 세뱃돈을 건넸다. 그때 내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용돈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돈은 고스란히 조카들 세뱃돈으로 나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조금 더 드리는 건데….’
그로부터 두 주일이 지난 2월 초, 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연이 - 막내 누나 둘째 조카 - 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아버지가 가방 사 준다고 하세요. 제가 돈 드릴 테니까요. 이전에 제가 사 준다고 했는데 저보다는 아버지가 사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결국 아버지에게 이 달 용돈을 드리면서 3만원을 더 얹혀 드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 맘 한 구석이 편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 (2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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