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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1심 재판과 항소 이유서


 

“이번 사건은 두 가지 각도에서 심리가 진행됐습니다. 첫째는 기자가 증인출석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가와 두 번째는 이번 사건의 인터뷰 기사의 사실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국정조사와 관련이 있는가 였습니다.”

봄 햇살 좋았던 4월 4일 서울지법 522호. 지난해 5월 8일 정식재판 청구 이후 한 달에 한 번 꼴로 열렸던 내 재판의 1심 판결이 이뤄졌다. 애초엔 일주일 전인 3월 29일에 판결이 내려질 예정이었으나 이날 판사는 조금 더 판단할 사항이 있다며 한 주를 미뤘다.  


2시에 개정한 재판은 우선 구속된 피의자들을 먼저 다뤘다. 징역 5년,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과 사회봉사 120시간, 벌금 50만원….

속속 이뤄지는 판결을 보면서, 얼핏 객기어린 생각이 들었다. 벌금형 나오면 몸으로 때우고 나와서 교도소 체험기사를 써?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판사는 앞에 놓인 서류와 나를 번갈아 보며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혀 나갔다.

“전자는 기자가 취재원을 보호하기 위해 증인출석을 거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인데, 이런 경우 아직 법적으로 부재한 상황이기도 하고 이번 사건의 경우 취재원을 보호할 만한 사안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기자가 증언을 거부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은 국회에 출석한 다음에 판단할 문제이므로 취재원의 보호차원에서 출석을 거부한 행위는 옳지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판사가 글을 중간쯤 읽어갈 때, 아! 결국 내가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잠시 방황했다. 그러다 이내 판사의 눈을 주시했다. 판사는 선해 보였다. 차분한 말투를 쓰는 판사에게는 정이 들어 버린 느낌이다. 그래서 재판장에 가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결과에 상관없이 이 판사에게 책이나 한 권 선물해야겠다고. - 모든 일은 최악에서 시작하는 법.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어차피 이번 판결이 내게 불리하다면 2심을 갈 생각이었다.


그동안 나는 법률상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면 무죄이므로 왜 내 불출석이 정당한 사유이었는지를 밝히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이런 주장은 그리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변호사가 이번 판결 이전에 마지막으로 낸 변론서에서 무죄가 아니라 “선고유예의 선처”를 바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판결에 앞선 판사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후자의 경우, 이번 사건이 국정조사와 관련이 있는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번 심리에서 논의된 안을 보면, 증인출석요구는 기사의 사실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것인데, 기사의 사실성 여부를 판단하는 일이 국정감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지금까지 벌인 심리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피고의 증인출석 여부는 국정감사와 직접 관련이 없다 하겠습니다.”


증인출석과 국정감사의 무관하다는 주장은 변호사가 줄곧 주장해 왔던 바였다.

“피고인 노정환은 무죄”

마지막으로 판사가 읽은 부분이었다. 난 잠시 멍청히 서 있었다. 이에 판사는 재판이 끝났으니 볼 일 다 봤다는 말투로 “돌아가십시오”라고 말했다.


뛸 듯이 기쁘다거나,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거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담담했다. 생각보다 지루했던 재판 과정이 기운을 빼서 그런 모양이었다.

일단 재판장을 나온 후 강금실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려줄까 하다가 사무실로 찾아가기로 했다. 선릉역에 내려 그냥 빈손으로 들어가기가 뭐해 작은 화분을 구입하려 했다.


강 변호사는 사무실에 있었고 이미 재판결과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 더 즐거워한다. 오늘은 아침부터 좋은 일만 있다며 연신 웃음이 가시질 않는다. 한 20여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변호사 사무실을 나왔다. 

회사 사무실로 돌아가 이번 판결에 대해 보도자료를 작성할 생각을 하니, 신문사들의 마감시간에 빠듯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한겨레 법원 출입기자에게 걸어 보도자료 여부를 물어보았더니 이미 내용을 알고 있다며 기사를 작성했다고 했다.  


<말> 편집국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재판결과를 알려 주고 잠시 다른 일을 하고 있는데 이메일이 들어왔다. 확인해 보니 학교 지기가 보낸 이메일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축하한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아직 신문에도 나오지 않았을 텐데, 아마도 인터넷을 보았나보다 싶어 연합뉴스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재판 관련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다른 지기도 기사를 복사해 이메일로 보냈다.


언론의 파급력은 그처럼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다. 퇴근길 집으로 돌아가던 잡지팀 기자에게서 전화가 있다. 

“선배님, 버스에서 졸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라디오에서 선배님 이름이 나오잖아요.”

아마도 방송 뉴스에서 재판결과가 나왔나보다. 다음 날엔 출판사 다른 부서 직원이 축하한다며 이메일을 보내왔다. 역시 천리안에서 기사를 보았단다. 언론 기자의 증인불출석과 관련한 재판의 선례가 없는 지라, 일부 언론에서 이 문제를 작게나마 다룬 모양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알게 된 듯했다. 


그로부터 일주일가량 지난 16일 내 앞으로 등기가 한 통 배달되었다. 이번 사건에 대해 검찰이 항소장을 제출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지난번 변호사 사무실에 갔을 때, 전례를 보면 검찰이 항소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전례를 잘 지킨 셈이었다. 검찰이 항소이유서에 적은 내용은 간결했다.

“사실 오인 및 법리 오해”

내 해석인즉 사실관계를 판사가 잘못 이해했고, 법을 적용함에 있어 오해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한 통의 우편물로 인해 다시 지루한 2라운드가 시작됐다. 이 항소장은 그동안 해왔던 재판 출석 등의 긴 여정을 다시 밟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짜증이 슬쩍 밀려왔다.


항소장과 함께 배달된 선고 판결 요지를 읽어보니, 판사가 나름대로 신중하게 해석한 구석이 엿보였다. 애초 내가 재판장에서 들었던 부분에 조금 더 무죄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추가된 듯 하기도 했다.

판사가 작성한 무죄 판결 요지는 이랬다.

“인터뷰 기사 내용이 당시 ○○○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이 한 관리공단 내에서의 이사진 경질문제를 중심으로 그의 정치적 행보와 그 배경 등을 인터뷰 형식으로 담아 놓은 것이고, 그 외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야당의원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국정감사업무와 객관적으로 어떠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인지 알기 어렵고, 그 기사의 진실성 여부 역시 객관적으로 그 국정감사 업무와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또한 피고인을 증인으로 채택한 경위를 보더라도 문제가 된 기사내용과 관련하여 증인으로 채택했다는 사실 외에는 국정감사 업무와 어떤 관련성이 있다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이 봄, 다시 재판은 시작되었다. 재판은 3전 2선승제가 아니니 1승은 의미가 없다. 새롭게 시작하는 바나 다를 게 없다. 아마도 고등법원에서 승소해도 대법원까지 갈 것이다. 그러니 올해를 넘길 수도 있다.

이 싸움이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작게는 월간 <말>의 대표로, 언론과 국회의 관계에서 마이너 언론의 대표로 참석해 재판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약간의 부담도 있었다. 패소하면 국회에서는 마이너 언론에 대한 이런 류의 탄압은 지속적으로 이뤄질 빌미를 줄 수 있으니까.


그러나 1심 과정에서 그런 부담 역시 나의 오만일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어찌되었든 이 싸움은 내가 하는 싸움이었다. 2심 재판을 진행하며 권력과 잘 싸우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이 봄날에. (2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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