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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18개월의 인생 마디



1. 프롤로그 혹은 에필로그

<작은이야기>가 휴간되었다.

나는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지금 나는 국가인권위에서 언론홍보를 맡고 있다.

11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2. 긴 대화  

월요일 저녁, 사장과 밤 12시 30분까지 세 시간 동안 얘기했다. <작은이야기> 폐간부터 내가 본 사장의 단점까지. 얘기가 깊어갈수록 나는 한 인간을 이해했다. 내가 문제 제기한 것들이 여전히 문제이고 공인으로서 잘못했다고 생각함에도. 그래서 내 안에 담겼던 모든 분노와 항의를 조용히 가라앉혔다. 사장 입장에선 <작은이야기>를 잘 접었다 생각했다.

… …

다시는 시장이 어떤 잡지라도 만들지 않았으며 좋겠다. 그것이 태어날 잡지를 위해서든, 그 잡지를 위해 열정을 바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서든… 최선의 길이다.


3. 마음의 키

폐간하겠다는 소식을 듣고 당연히 회사를 떠날 생각을 하는데도 마음이 담담했다. 남들은 내 실직 걱정부터 하는데도 말이다.

‘아! 내가 이만큼 컸나보다. 다행이다.’


4. 몸이 먼저

마음보다 몸이 먼저 국가인권위 사무실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작은이야기 휴간과 관련해 남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인권위 일도 무척 급해 보였다. 명색이 국가기구인데 26일 출범을 앞두고 소속 직원이 한 사람도 없었다. 파견된 공무원 10여명과 민간단체에서 일하다 온 자원봉사자 18명이 전부였다. 그러니 몸이라도 먼저 달려가야 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입법 행정 사법 기존의 어느 부에도 속하지 않는 국가기관인 국가인권위와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작은이야기>를 차분히 정리하고 떠나고자 했으나 그런 여유를 가질 겨를이 없었다.


5. 어떤 체념 

편집장 : 아무튼 사장님의 결정으로 <작은이야기>를 폐간하게 되었고, 저와 노정환씨에게 단행본 쪽 일을 하라고 제안하셨고, 우리는 그것을 거부했으니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야 단행본 일을 했던 사람이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노정환씨는 기자 일을 했기 때문에 딘행본 일 제안은 맞지 않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사장님이 이에 대해서 경제적인 배려를 해주었으면 합니다. 

잠시 10여분 다른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내가 말을 이었다. 

노을이 : 좀 전에 편집장이 했던 이야기는 퇴직금 말고 위로금 등의 금전적인 배려를 물은 것입니다. 

사장 : 그것을 내가 지금 여기서 얘길 해야 하나요?

노을이 : 저는 돈을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것에 대한 사장님의 얘기를 듣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도 저는 앞으로 그 얘길 꺼내지 않을 것입니다. 

사장 : 그것은 내가 나중에 알아서 처리하겠어요.

노을이 : 그렇게 하세요, 저도 두 번 다시 그 얘기는 꺼내지 않겠습니다.


6. 송별 

<작은이야기> 기자 송별식을 하던 날, 헤어지면서 한 기자를 끌어안았다. 잡지를 만들면서 미안했던 마음 등등 아쉬우나마 이런 대로 정리하고 잘 살길 기원했다. 그 기자에게는 책 ‘담배피우는 아줌마’를 선물했고 다른 한 기자에게는 김광석 시디를 한 장 건넸다. 이제 다시 이들을 언제 어떻게 만날지 알 수 없다. 눈 앞에서 멀어지면 마음 역시 멀어지는 게 인지상정인데.


7. 첫 업무

국가인권위에서 처음으로 한 일은 모 일간지에 정정 보도를 요청하는 보도자료 작성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정정 보도를 쓰라는데 신문도 구할 수 없고 인터넷신문에는 문제의 기사가 없었다. 낯선 사무실의 낯선 사람들 안에서 신문 구하기가 그렇게 어려울 줄이야. 결국 출판사 동료에게 팩스로 그 기사를 넣어달라고 해서 보도자료를 작성했다.           


8. 먼저 말 걸기

사장과 편집장과 나, 셋이 만나 최종적으로 작은이야기를 휴간하기로 최종 정리한 후, 오후에 이만원으로 간식거리를 샀다. 출판사 직원들과 함께 간식을 먹으며 그간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회사에 어떤 일이 발생하면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방식이 싫었다. 말이 돌다보면 진실보다 의견이 더 많이 붙어 애초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소문들이 싫었다. 더욱이 잡지가 폐간되고 나면 편집장이나 나는 회사를 그만두는 게 거의 현실인데, 다른 직원들이 말 걸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이다.


9. 소식 

“선생님, 좋은 소식 한 가지와 나쁜 소식 한 가지가 있는데 무엇보터 알려 드릴까요? ”

“나쁜 소식”

“<작은이야기>를 휴간하기로 했습니다.”

… 필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폐간 소식을 알렸다. …

“좋은 소식은?”

“제가 자유로워졌습니다.”


10. 마지막 약속

<작은이야기> 휴간과 함께 챙길 마지막 일은 캠페인 ‘당신이 희망입니다’였다. 그동안 독자들이 보낸 후원금과 희망 옷 판매금을 모아, 희망인 사람들에게 후원금을 전달해왔다. 아직 마저 정리하지 못한 이 일의 마무리는 반드시 해야 했다. 무엇보다 독자들이 낸 78만원 정도의 돈이 회사의 계좌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되었다.

다행히 내가 염려했던 것보다 그 마지막 약속은 순조롭게 처리되었다.           

11. 즐거운 과소비

106,000원. 내가 한 번에 낸 술 값 중 가장 비싼 금액이 아닐까 싶다. 그 자리에서 내 몸과 마음은 한껏 피곤해 있었다. 그래도 그곳엔 오랜만에 얼굴 본 후배들이 있었고, 잠시나마 국가인권위 일 한다니까 “그건 완전히 활동가야”라며 잘 했다고 말해주는 후배들도 있었다.

밤 9시 무렵 난 그들에게 갔고, 얘기를 나누고 헤어지는 무렵 그냥 그렇게 계산하고 싶었다. 간혹 나도 이렇게 무대책으로 사나보다. 그래도 후회없다. 어디선가 또 이만큼 돈을 벌 수 있겠지.


12. 18개월 인생

학원 강사, <캠퍼스라이프>, <말>…. 대학 졸업 후 내 삶은 18개월 주기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이번 <작은이야기>도 19개월만에 접었다.

공교롭게도 매번 일을 옮길 때마다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또한 이전 직장과 이후 직장의 일이 맞물린 고리처럼 겹쳤다. 캠라 근무 첫 달엔 퇴근해 마무리 못한 학원 강의를 밤 12시까지 했고, 캠라 근무 마지막 달엔 청탁받은 <말> 취재 원고를 써야 했다. <말>을 떠나는 달엔 <작은이야기>에서 청탁받은 취재기사 한 꼭지 맡았고, 곧바로 <작은이야기>로 연결됐다. 이번에도 아직 <작은이야기>를 정리하지 못했는데 국가인권위 일을 돕고 있다.


13. 단 한 가지 이유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데 보탬이 되는 인권잡지를 만들겠다.’ 

<오마이뉴스>, 국가인권위, 잠시 동안의 휴식. 이중 국가인권위로 우선 마음을 돌린 단 한 가지 이유였다. 물론 미래는 불확실하다. (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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