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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그럼에도… 희망들


지난 100일 동안 국가인권위와 그렇게 살았다.

언론홍보를 담당하고 있으면서도 기자들이 질문하면 항상 답변은 두루뭉실했다. 그렇게 답변했을 때 기사 쓰는 입장에서는 난처할 게 분명했다. 질문이 서너 마디 이어지면, 팀장에게 전화를 돌려주곤 했다. 조직에서 나란 존재는 드러내서도 안 되었다. 자칫 어설픈 행동은 곧 나의 대한 비난을 넘어 조직에 대한 부담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무엇에 대해서도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술 한잔 마시자는 기자들의 제안에도 다음에 하자고 미루고, 내가 보기엔 말도 안되는 글이 게시판에 올라와도 그에 대해서도 단 한 마디 올리지 못하고 산다.(익명으로 올릴 수는 있지만, 그것은 내가 내게 허락하지 않는 방식이다.) 내가 준비단원이든, 지원봉사자이든 공직에 있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걸면 걸리게’ 되어 있다. 그것에 걸려 나 하나 끝나면 상관없는데, 내가 걸리면 조직이 걸리는 그런 상황…. 그래서 내 발언의 자유를 지그시 눌러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 일간지에 국가인권위 채용 광고를 싣지 않았다고 찾아온 광고부 직원은 “어느 신문은 광고를 내고 우리는 안내면서 국가인권위가 차별하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논리대로라면 분명히 그 직원은 매일 슈퍼를 이용할 때나, 술집을 드나들 때 수많은 차별을 저지를 텐데도 그는 당당했다. 그 태도는 언론사라는 힘을 믿고 그러는 것인지, 공무원이라면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억측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지 알 길은 없으나, 나는 몇 마디 밖에 대꾸하지 못했다.  


그런 것들, ‘나’보다 ‘국가인권위’라는 잣대를 먼저 들고는 내 말을 검열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 ‘나’는 없었다.

나는 없고 조직의 이름만 남는 이 상황에서, 그동안 누구보다도 개인을 강조했던 나는 지금의 이런 상황이 몹시 쪽팔렸다. 여전히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를 지향하며, 조직의 이름으로 살기보다는 개인의 이름으로 살면서 공동의 관심사를 얻기 위해 투쟁할 자유로운 공동체를 더 선호하는 내가 그런 내 생각에 반하는 입장을 가지고 살아야하는 게 쪽팔렸다. 때로는 딴지일보식으로라도 한 마디 대구하면 시원하겠다 싶은 일도, 준비단원이라는 조직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나로서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래서 쪽팔린 삶이다. 어쩌면 훗날에는 세풀에 쓰는 이런 넋두리식 얘기마저도 쓰지 못해 쪽팔려 할지도 모른다.


1.

아침에 출근해, 오늘 할 일을 이메일로 팀장에게 보고한다. 그 중에서 우선 처리할 일을 정리하고 나면 점심시간, 다시 오후 일을 하다가 저녁에 퇴근할 무렵 되면 일감은 그대로 대여섯 가지 남아 있다. 분명히 하루종일 일을 했는데 말이다. 하루에 서너 가지를 처리한다고 해도 새로운 일감은 늘 생성된다.

결재서류를 작성하면서도 낯선 문서 형식 때문에 애를 먹는다. 서랍속에 있는 교재를 보면 될 텐데, 그럴 짬이 없다. 

결재가 이뤄지고 나면, 그 후속조치들은 단세포 분열하듯이 쌓인다. 기하급수로 증가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쯤 되니, 나름대로 냉정하다고 생각했던 나 역시 투덜거림이 늘어난다. 국가인권위에서 정작 하고 싶은 일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들은 전혀 손을 대지 못하는 상황이 때론 맥빠지게 한다.

그럼에도 누구에게 한 마디 할 수가 없다. 팀장은 나보다 더하다. 일주일에 서너 차례는 분명히 밤을 꼬박 세고 나왔음직한 모습이다. 한 마디로 몰골이 흉흉하다. 하루종일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지지 않는다.

공보, 홍보, 정보화, 국내협력, 인권교육…. 국가인권위 사무처가 구성된다면, 적어도 네다섯 개 과에서 최소 30여 명이 담당할 몫을 네 명이 맡은 상황이다.


그나마 다른 단원들에 비하면 다행스러웠다. 내가 하는 일은 주로 글 쓰는 일이다. 또한 그 영역이 비교적 명확하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업무면에서 새로운 경험들이 많다. 박사논문을 남겨둔 한 단원은 직원채용 관련 원서접수가 이뤄지자 며칠에 걸쳐 밤 12시 무렵 퇴근하며, 원서 정리하는 일에 매달렸다. 다행히 그것은 단순업무라 덜 복잡했다.

어쩌면 국가인권위라는 전혀 듣도보도 못한 조직을 만들어 가는 마당이니 모든 게 새로운 게 당연하다. 이미 그것만으로 한짐 가득한 지게를 지고 있는 꼴인데, 그 과정에 ‘그래도 뭔가는 다른 국가기구’를 만들자는 고민까지 곁들여지면 그야말로 그 지게꾼의 양손에 물통을 들려 준 셈이다.


더욱이 대부분 소모적인 일거리들이 많다. 지속적으로 손님을 맞이하려는 곳이라면, 체계를 갖추고 기본적인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 중요한데 정작 그런 일들은 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닥치는 손님들 맞이하다 보면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 한번은 농담으로 우리 몇 달간만 문 닫아걸고 나름대로 정비를 한 다음에 일을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팀장에게 사람 좀 보충하자 그러면, “그럼 주변에 자원봉사 할 사람 찾아봐!”가 끝이다. 보도자료 써 줄 사람, 언론 관계를 맡을 사람, 많을 것 같은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그런 자원봉사자 찾으려고 전화 걸고 뭐하고 하느니 차라리 다시 내가 뚝딱거리고 만다.


결국 그처럼 쉼 없이 밀려드는 일감이 다시 내 몸을 괴롭혔다.

월요일인 2월 18일. 적어도 수요일까지는 200자 원고지 45매 짜리 원고를 쓸 일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일들에 치이면서 목요일까지 전혀 손을 대지 못했다. 다른 팀에서 자료까지 다 주었는데도 그 자료를 들춰 볼 여지마저 없었다. 그 무렵 목요일 저녁부터 뒷골이 빳빳해져 왔다. 다시 증상이 도졌다. 아마도 이게 40대 뇌졸증의 전초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다시 일에 매여 있는 나를 보니 씁쓸해졌다.


죽을 때 죽더라도, 부모님보다는 오래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저런 생각에 밤 10시 무렵 퇴근했다. 휴식을 취하고 싶어 비디오를 한 편 빌려들고는 집으로 터벅터벅 들어갔다. 그 다음 금요일엔 8시 무렵에 퇴근했다. 일은 밀렸지만 쉬지 않으면 꺾여버릴 듯했다. 일요일에 쉬려면 저녁에 원고초안이라도 잡아둬야 했지만 할 수 없었다. ‘내가 전날 아무런 얘기 없이 다음날 12시까지 출근 안 하면 무조건 우리 집으로 와 달라고 종진형에게 얘기를 해 둘까’싶은 심정도 들었다. ‘유서라도 써서 후배들에게 맡겨 둘까’ 싶은 생각도 스멀거리듯 일었다. 그만큼 몸은 오기는 있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어느 날 점심 시간에 나는 함께 밥을 먹던 준비단원들 몇몇에게 넋두리를 늘어놓게 되었다.

“왜 우리는 삶의 속도를 늦추지 못하는 거죠?”

다른 단원들이 보기엔 그게 뭔 소리냐고 대응할 법했다.

“딱 근무시간까지만 일하고 오늘 못하는 일은 다음날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렇게 바쁘게 일해도 업무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왜 우리 사회는 삶의 속도를 늦추지 못하죠.”

이런 말이야말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소리다. 죽어라 일해도 될까말까한 판에, 근무시간만 일하자는, 월차라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내 말은 ‘방정맞은 소리’일 뿐이다. 


그런 것일 것이다. 여성부가 생김으로 해서 국가 정책이나 사업을 펼치는 데 여성의 입장을 반영하게 되었듯이, 나처럼 삶의 속도를 반하는 사고를 가진 사람이 늘어나면, 대통령 직속 ‘천천히사는삶조성위원회’라는 뭐 그런 정책을 맡는 부처 하나 생길 법도 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인간의 행복과 자유를 위해 종합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듯하다. 인간의 행복을 경제적 성장에서 찾으려는 이들에게는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실망스러운 것은 자본과 싸우는 사람들마저도 ‘다른 삶’을 생각하지 않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인권을 말하면서도 삶의 속도가 가진 반인간적인 것까지는 얘기할 수 없는 상황도 슬프다.


개인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희생으로 우리 사회의 행복을 가꾸자는 말은 맞지 않다. 적어도 그 희생이 자발적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조직의 눌에 따른 획일적 희생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국가인권위에서 일하는 기간 동안 그 ‘삶의 속도’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할 것이다. 그만큼 ‘삶의 속도’에 있어서는 사회적 소수자로 남아 살아 가련다.


3. 

2월 20일. 국정원이 입법 추진하고 있는 테러방지법(안)에 대해 국가인권위에서 반대한다는 의견을 국회에 제출하는 보도자료를 작성했다. 국회 제출 자료의 문서에 쓰인 반대 이유 한 마디 한 마디가 논리 정연 했을 뿐만 아니라, 초안을 잡은 사람이 무척 광범위한 인권 관련 지식을 가졌다는 느낌이 글 군데 군데에서 드러났다.

일하면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럽고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테러방지법안 반대 의견 제출’이란 내용의 보도자료를 작성하면서 글 쓰는 기쁨과 함께 국가인권위에서 일하는 의미를 새삼 느꼈다. 어느 광고처럼 다른 사람들이 “예”할 때 “아니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국가기관이 하나쯤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의 속도에 대해 갈등하고 고민하면서도 끝내 아침 출근길을 서두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즐거운 일은 2월 막바지에 들어 다시 이어졌다. 제주도에서 열린 제주인권학술회의에 위원장이 참석해 기조 발제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국가인권위는 정부의 영향력을 배제하겠다는 얘길했다는 한 언론의 기사를 보았다. 

“… 김 위원장은 이날 기조발표에서 (…) “내가 위원장으로 있는 한 정부를 위한 인권보고서는 만들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또 “인권위의 예산과 조직, 인사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고 시민사회와의 협의나 국회의 검증절차 없이 대통령, 국회, 대법원 등 3부가 인권위원을 일방적으로 지명 또는 임명하도록 돼 있는 것은 문제”라며  “인권위가 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권한의 실효성과 기구자체의 독립성이 보장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기사를 읽은 한 준비단원은 오랫동안 쌓인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나 역시 자존심을 가진 조직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들기도 했다. 위원장의 발제와 관련해 더욱 즐거웠던 또 다른 이유 한 가지가 있었지만, 이곳에선 비밀이다. 


국가인권위에서 일하면서 스스로 운동권이 되라고 주문한다. 이는 우선 다루는 주제가 인권이라는 이유에서 오는 주문이다. 국가인권위는 국가기관에 의한 인권침해에 대해 진정을 벌이고 조사하는 일이 업무 중 한 가지다. 더욱이 국가인권위를 흔히 국가적 반성 장치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국가기관이 저지른 인권침해에 대해, 또 다른 국가기관인 국가인권위가 밝혀내고 그에 대한 구제 및 제도 개선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국가기관들로서는 우군보다는 번거로운 존재쯤으로 국가인권위를 인식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다른 국가기관으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일은, 민간단체와는 다른 방식을 취하긴 하겠지만 정신은 운동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운동성을 지녀야 하는 또다른 중요한 이유는 국가인권위의 출범 그 자체가 운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 인권 관련 민간단체들은 올바른 국가인권기구를 만들기 위해 각종 시위와 집회를 벌여왔다. 그 과정에서 법인체 정도로 만들려는 법무부와의 대립 역시 첨예했다. 그 결과로 그나마 지금 이 정도의 국가인권위를 꾸릴 수 있었다. 물론 내 개인사로 보자면 나는 이런 시민사회의 노력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 했다.


그래서 때로는 오래 전 내 기억 하나와 맞물려 부담스러움이 없지 않다. 99년 12월 말부터 2000년 1월 초까지 명동성당에서 “가라 국가보안법, 오라 국가인권위”라는 이슈를 걸고 인권활동가들이 단식농성을 했다. 그 무렵 날씨는 눈이 많았고, 기온도 영하권을 맴돌았다. 인권운동사랑방의 박래군 사무국장은 지난 연말 그 농성을 떠올리며 “난 예정된 13일간의 단식농성을 다 채우지 못하고 9일 만에 중도하차했고, 지금 내게는 얼굴 동상만이 남아 있지만, 그 농성을 생각할 때마다 힘을 받는다”고 한겨레에 글을 쓴 바 있다.

그 농성이 한창이던 때 인권운동사랑방의 경내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시간이 되면 그곳에 한번 들러달라고. 그런데 가지 못했다. 전화를 받고는 가서 함께 농성은 못하더라도 얼굴인사라도 하고 오면 그 사람들도 힘을 더 받을텐데 싶었지만, 그것 역시 마음 안에서 맴돌고 말았다. 그때 그 자리에 가지 못한 일이 내겐 준비단으로 머물면서 미안스러운 짐이 되었다.


국가인권위 출범까지의 과정과, 국가인권위가 다뤄야 할 주제를 보면 요구되는 삶의 자세에는 분명 운동성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출범한 국가인권위 안에서는 그 운동성이 단지 인권이란 주제에만 국한될 문제는 아니다. 그 내용을 담는 그릇, 곧 국가인권위의 운영면에서도 운동성을 담아야한다. 운영의 투명성과 공개성. 기존 관료집단과는 뭔가는 다른 국가기관을 만드는 일이다. 단순히 업무만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그 업무를 추진하는데 관료적이지 않은지를 고민하는 것, 그것이 업무를 파악하는데 또 하나의 기준으로 더해져야 한다. 세금을 쓰는 용도며 방식까지도 운동성이 개입되어야 하며, 시민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운동성이 녹아 들어야하며, 관료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에 있어서도 운동성은 필수다.   

이런 생각의 일단들이 바쁜 일상과 부딪히고 삶의 속도와 더해지면, 결국 복합적인 갈등에 휘말리게 되고, 매 하루는 그런 몇 가지 생각의 가지들이 꼬여들면서 마무리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출근하는 이유는 일상에 충분히 있다. 국가인권위에 파견 나와 있는 한 공무원이 그동안 민간단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들은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게 두 가지라고 했다.

“한 가지는 상하관계 보다는 동료관계로 일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국가인권위에서 일하는 개인이 행복해야 국가인권위가 행복하다는 얘기였다.”

후자는 내가 한 얘기 같은데 기억은 확실하지 않다. 그게 내가 한 얘기라면 내 생각에 동의해주는 공무원이 한 사람 있어서 좋았고, 내가 아니었다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한 한 사람이 더 있어서 즐거운 일이다.


'혁명전사의 순결'

요즘 다시 조정래의 소설 <태맥산맥>에 나오는 이 문구를 간혹 떠올린다.

빨치산인 하대치는 “가난헌 사람들에게 한 주먹씩이라도 골고루 노놔줘서 설얼 쇠게 하자”는 뜻으로 지주들에게 “강제로 쌀얼 뺏어내는” 일을 맡았다. 그런 그가 김범우에게는 ‘강제가 아닌 대화로’ 쌀을 달라는 얘기를 한다. 김범우로부터 순순히 쌀을 받아든 하대치는 “김 선상님, 고맙구만이라”하는 인사와 함께 고개를 깊숙이 숙여 그 고마움이 진심임을 표했다.

이를 본 김범우가 떠올린 문구가 ‘혁명전사의 순결’이었다.

“염상진과는 달리 정치의식이 다소 덜 되었을 그 모습, 처녀의 정조에다만 쓰는 것으로 널리 통념화된 ‘순결’이란 말을 혁명전사 뒤에 왜 붙였는지 김범우는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하대치의 모습과 순결이라는 말은 이상스럽게 생기를 띠고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국가인권위에 한 달을 머물든 3년을 있든, 국가인권위 밖에 있든 안에 있든, 그런 혁명전사의 순결을 안고 살고 싶다. 학교를 떠난 지 7년이 된 이맘쯤, 새삼스럽게 ‘혁명’이란 용어를 떠올리게 되는 이것이 국가인권위가 나를 의식화시킨 증거인 셈이다. (2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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