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10, 3월 22일(금)
면접시험 날 아침, 평상시보다 좀 더 옷차림을 신경 써서 출근했다. 그 동안 입고 다니던 찢어진 청바지, 검은색 가죽잠바 대신 와이셔츠에 정장바지를 입고 재킷을 걸쳤다. 나름 신경을 썼다지만, 도대체 바지와 와이셔츠, 재킷이 얼마나 조화를 이루는지를 가늠할 능력이 없다. 아침 일찍 수염도 다듬어 깎았다. 그럼에도 넥타이는 챙기지 않았다. 옷들과의 조화를 맞출 자신이 없었고, 여전히 넥타이는 좀 더 자유롭고 싶은 내게 있어서 일종의 마지노선이다. 정말 불가피할 때가 아니면 매지 않을 생각이다.
그 옷차림으로 출근해 아침에 팀장 대신 팀장회의에 들어갔다. 다들 내 변신에 한 마디씩 한다. 어느 공무원은 “남산 위에 푸른 소나무 한 그루가 없어졌네요. 아! 노 기자님은 지키고 있어야죠” 한다.
“우리의 희망은 … 자기 성찰과 비판에 열려있는 사회와 정치양식을 가꾸고 유지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다른 또 하나는 개인의 저항력은 약하지만, 바로 그 개인들이야말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궁극적인 희망의 근거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 희망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놓인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개인’으로 자랄 수 있도록 하는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국가인권위 직원채용 면접을 이틀 앞둔 날 이삼성 교수가 쓴 이 문구를 찾아 모니터 위쪽에 붙였다. 면접을 앞두고도 여전히 마음은 부유했고, 당분간이라도 부유하는 마음을 묶어 둘 원칙이 필요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도 ‘나’를 굳건히 지키며 희망을 가진 개인으로 살자는 다짐이었다.
국가인권위에서 계속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고민은 면접을 앞두고 불쑥 솟은 건 아니었다. 사무처 준비단원으로 생활한 지 한 달, 두 달이 지날 때도 그랬고, 1백일이 되던 지난 달에도 그랬다.
국가인권위 일은 <작은이야기>를 그만 두고 생긴 공백기에 국가인권위를 ‘도와준다’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굳이 취직하지 말고 한 1년 놀아도 좋겠다 싶었으니 다른 무엇에 큰 미련은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로서 도움이 되기를 바랐고 자연스레 ‘인권 잡지’를 떠올렸다.
그러나 밖으로부터 안고 온 그런 바람은 조직 안에서 단원 생활을 거듭할수록 깨져 나갔다. 사무처준비단이라는 그 조직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내 판단착오였다. 말 그대로 사무처를 준비하는 조직에서 무슨 인권잡지를 꿈꿀 것이며, 그전에 내가 해 왔던 취재 일로서의 경험을 충분히 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과욕(過慾)이었기에 고욕(苦慾)이었다.
그나마 경험을 살렸다면 보도자료를 쓰는 일을 남들보다는 조금 일찍 손에 붙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정도였다. 기자들과 인터뷰할 때 취재경험을 떠올리며 이런 답변엔 이런 방향으로 기사를 쓰겠구나 싶어 조심스레 답변하는 정도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직원 채용을 앞두고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고민은 직원채용 응시원서를 제출할 때, 심사서류를 제출할 때, 면접을 앞둔 전날 큰 폭으로 상승했다.
D-day 9, 3월 23일(토)
대개 직장을 선택할 때는 맡게 될 일의 성격과 회사 분위기, 경제적 조건 정도를 고민한다. 이 중에서 경제적 조건을 먼저 고려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나같은 ‘류’의 사람들은 ‘맡게 될 일의 성격’이 보다 비중있는 기준이 된다. 그 우선순위에 옳고 그름도, 맞고 틀리고도 없다. 나 역시 그런 세 가지 조건을 염두에 두고서 첫 번째로 맡게 될 일을 생각했다. 그 일이 얼마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아닌지…. 내 희망은 궁극적으로는 대중적인 인권잡지 - 최종적으로는 인권․평화․생태를 지향하는 아주 대중적인 잡지 - 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능한 글을 쓰거나 글과 관련한 기획을 해야 하고, 그것이 곧 내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이다.
국가인권위에 남는다면 그런 류의 일을 맡을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내린 답변은 다소 모호해도 “내 하기 나름”이었다.
그런 가능성을 염두하고 공보담당관실에 지원했다. 학사학위 졸업 후 3년 이상 관련 분야인 기자 생활을 했으니 응시자격은 갖췄다. 일반 회사처럼 일정한 기준에 따라 직원을 뽑아놓고 부서를 배치하는 게 아니라 각 직급마다 자격요건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지 않으면 지원할 수가 없는 구조다. 그 밖에도 기자경력으로 응시원서를 내볼만한 부서는 인권침해조사국이나 차별행위조사국의 조사담당 정도였다. 하지만 조사담당은 취재경험을 살릴 수는 있으나 잡지를 기획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업무 몰입도가 낮을 듯 했다.
다행히 사무처준비단에서 활동하면서 홍보팀 일을 했기 때문에 공보담당관실 업무를 어림잡아 볼 수 있었다. 아울러 내 희망을 실현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열려있는 부서는 공보담당관실이었다.
그런 고민 끝에 국가인권위에 남아도 될 희망에 한 표 주었다. 그럼에도 공보담당관실 전체 업무로 보자면 내가 원하는 일이 얼마나 우선순위에 들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공보담당관실 직원이 채용된 후에 가늠이 가능할 것이다. 결국 면접시험을 이틀 앞둔 날에도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오로지 상상만을 허락했다.
D-day 8, 3월 24일(일)
면접은 자신 있게 보았다. 꼭 국가인권위에 남아야 한다는 절실함이 없어서인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그야말로 소신껏 얘기했다.
면접이 끝나고 하루쯤 지나 확정적이진 않지만 결과도 알았다. 면접이 끝난 후 합격여부를 문의하면 본인에게만 결과를 알려 주었다. 내가 지원한 분야는 애초 세 명이 면접 대상자였는데, 한 명이 불참했다.
상계동 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알려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아직 최종 확정도 되지 않은 일인데다 여전히 내 마음도 알 길이 없었다.
D-Day 7, 3월 25일(월)
공무원 임용에 필요한 신체검사를 받았다.
D-Day 6, 3월 26일(화)
국가인권위에서 생활할 지 고민할 때 국가인권위 내부의 분위기도 고민거리였다. 그동안 기자로 일했을 때는 자율성이 많았다. 기획회의만 통과하면 한 편의 기사를 작성하기까지 거의 개인 판단에 따라 이뤄진다. 누구를 취재할 것인가, 어디를 찾아갈 것인가. 어떤 방향으로 글을 작성할 것인가. 그런 판단에 따라 기사를 작성하면 끝이다. 편집장과 이견이 있을 때도 있지만, 공정이 끝난 후의 일이라 그것은 또다른 상황일 뿐이다
하지만 공무원 조직에서는 그런 일은 불가능할 것 같다. 대개의 일 처리가 결재라인을 따라 올라가고 ‘의견 제시’보다는 ‘지시이행’이 우선시 될 수밖에 없을 듯 싶다. 그래서 내 역할은 집 짓는데 쓰이는 벽돌 한 장 정도일 것이다. 그냥 요구하는 물건 잘 만들어주면 되는. 내 지향은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이다. 이런 거대한 조직에서 내 역할은 그런 지향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런 고민은 내 기질과 공무원 사회의 분위기가 얼마나 잘 맞을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다. 역시 경험하지 못한 조직이니 넉 달간의 사무처준비단 경험에 따른 짐작만 할 뿐이다.
D-Day 5, 3월 27일(수)
백두산 회비 186,000원 계좌이체. 웬만하면 매달 1만원씩 자동이체를 하려 했는데 언제 돈을 못 벌지 모르니 있을 때 넣자는 생각이다. 주택은행 차세대 통장 넉 달치 16만원 입금. 도대체 뭐 하느라 그랬는지 올해엔 이 통장의 돈도 챙기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난 김에 4월까지 넉 달치를 입금했다. 역시 언제 중단할지 모른다.
은행에는 경제적으로 배수진을 치기 위해 들렀다. 4월부터 백수 생활로 접어들 수 있는데 그때 살 수 있는 기본적인 경제틀을 짜기로 했다. 얼마 정도는 최후의 비자금으로 남겨 두었다.
D-Day 4, 3월 28일(목)
이틀 만에 자존심을 버렸다. 스스로 원칙을 깼다. 이틀 전에 국가인권위와 부딪힌 문제는 다른 방법으로 싸워보기로 했다. 뭔가에 집착하다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던 문제도 마치 세상의 종말을 결정짓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런 착각을 피하며 집착을 잠시 버렸다. 국가인권위에 남기로 결심했다. 오후엔 공무원증 만드는데 필요한 증명사진을 주문하러 현상소에 갔다. 그 동안 찾지 않았던 신체검사 결과도 찾아왔다.
D-Day 3, 3월 29일(금)
○ 서류심사 : 제출된 응시원서 및 경력을 통하여 해당 직위 응시자들에 대하여 응시 적격 여부를 판단한 다음 적격자로 판단된 사람에 한하여 심사자료에 대한 평가 실시.
○ 심사자료 : 출제된 문제에서 지시한 항목 및 형식요건을 기초로 평가하되, 평가항목은 전문지식(사업설정, 내용, 경험과 경력)․논리성․성실성․자료형식
․서류심사로 나눠 실시.
○ 구술․면접시험 : 국가인권위원회 및 해당 업무에 대한 이해 정도와 전문성 여부 판단.
3월 29일 배포된 보도자료에서 언급한 채용심사시 평가했던 기준들이다. 보도자료 작성을 위해 인사팀으로부터 자료를 받아 정리를 하다보니, 무척 꼼꼼하게 짜여 있었다. 아마 이걸 미리 알았더라면 잔뜩 겁먹어 심사자료를 그처럼 당당하게 제출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이나 보다.
D-Day 2, 3월 30일(토)
사무실이 이전하는 날이다. 미대사관 뒤편에 있는 이마빌딩에서 서울시청 근처에 있는 금세기빌딩으로 간다. 7시 30분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오후부터 짐을 옮긴다고 해서 9시부터 짐을 싸도 크게 무리는 없겠다 싶었다. 남는 시간에 그동안 함께 일했던 사무처준비단 식구들에게 보낼 글을 썼다. 부유했던 마음을 정착시키자는 다짐이기도 했다.
글을 쓰면서 부지런히 자기검열을 했다. 이 정도면 읽는 사람들 마음을 다치지 않게 표현된 것인가! 내 마음을 그런 대로 잘 드러낸 것인가!
말 한마디에, 표현 하나에, 자신의 이해와 경험에 비추어 수많은 해석이 내려지는 상황을 새삼스레 사무처준비단 생활을 하면서 안팎으로 느낀지라 몸 사리는 일에는 이제 미립이 났다. 한편으로는 그냥 글 안 쓰고 이삿짐이나 부지런히 쌓으면 될 텐데, 뭐 하러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나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글을 쓰자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다. 이렇게 사는 게 노을이니까. 설혹 내 글이 부메랑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글을 쓸 당시 간절히 원했다면 상관없다.
D-Day 1, 3월 31일(일)
양복을 구입하러 신촌 그랜드마트에 나갔다.
오전에 사무실에 들러 짐을 정리했건만, 저녁이 다 되어도 짐은 그대로 남았다. 결국 저녁 7시 무렵, 짐 정리를 못 다한 채로 사무실을 나왔다. 더 늦으면 옷을 구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전히 옷 고르는 솜씨가 없는지라 ‘옷 골라주는 여자’를 특별 초빙했다. 매장에 들어가 난 가만히 서 있었다. ‘옷 골라주는 여자’가 옷을 하나 고르면, 그때서야 입어보곤 했다. 양복은 비교적 쉽게 골랐다. 세일 가격이라는데 24만원이다. 그런데 이 양복 한 벌로 버틸 수 있나?
옷 사러 갈 때 생각은 어차피 사무실에서야 와이셔츠를 입고 있으면 되니까, 양복은 한 벌로 버티고 와이셔츠를 서너 벌 구입하자는 거였다. ‘옷 골라주는 여자’의 말솜씨로 양복에 셋트로 나온 넥타이를 덤으로 받고는, 와이셔츠 매장에 들렀다. 한 벌에 9천원이라는 팻말보고 갔다가 점원의 ‘말발’에 밀려, 네 벌 값으로 한 벌을 구입하고 9천원짜리 하나를 얹어 두 벌을 구입했다.
‘옷 골라주는 여자’와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규선 누나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동안 인권위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거의 ‘유이’하게 둘이서 이른바 정장을 거부하고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사무처가 출범하는 4월 1일부터는 정장을 입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 옷을 각자 사기로 했었다. 그런데 뉴선 누나는 옷이 너무 비싸서 구입하지 못했단다. 아! 이런 배신! 민간인으로서 마지막 날은 이렇게 양복 한 벌 구입하는 것으로 마감되었다. (2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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