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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삶의 모라토리움

 


“내 몸과 마음이 내게 낯선 시간들…”

“잘못은 있었는데, 죄책감은 들지 않고 앞으로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자신감도 없는 상태…”

4월 한달 출퇴근길에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인 말들이다.

아침 7시 시청 옆 사무실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신문 스크랩이다. 아홉 개의 일간지를 뒤적이며 국가인권위 관련 기사나 인권과 관련한 뉴스들을 찾아 표시한다. 4월부터 출근한 기능직 여성 직원도 함께 신문을 뒤적인다. 어느 정도 포스트잇이 붙은 신문이 쌓이면 여성 직원은 표시한 기사들을 복사한다. 이내 가위로 오리고 다시 재편집해 A4용지나 A3용지에 복사한다. 신문에서 기사를 찾은 나는 복사해 둔 기사의 제목을 한글로 기록한다. 그리고는 신문 스크랩 표지를 만든다. 신문기사를 복사해 18부를 만들고 나면 어느새 출근시간인 9시가 넘어버렸다. 그렇게 생산된 오늘의 기사 스크랩은 아침 9시 30분에 열리는 간부회의에 올라가고 각 과에서 가져간다.


그쯤에서야 오늘 하루 할 일을 정리한다. 언론, 홍보, 공보, 서무, 홈페이지 등으로 나눠진 ‘일 진행표’에는 어제 못한 일들이 빼곡하다. 어제 한 일은 지우고, 오늘 새롭게 발생하는 일을 기록한다. 하루에 두세 개씩 지우면, 서너 개씩 새 일이 발생한다. 일을 기록한 후에는 처리할 순서를 정한다. 20여 개의 목록 중 처리순서를 적는 일은 5번까지면 족하다. 어차피 그 이상의 순서를 정해 두어도 처리하지 못한다. 또한 오늘 네 번째 일까지 처리한다고 해서 다섯 번째 일이 내일 1번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새 일은 기다리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서 온다.


몸과 마음이 바쁘게 된 이유는 사람의 부재였다. 공보담당관실 정원 6명 중에 과장과 기능직, 그리고 나 세 명뿐이다. 5급 직원 두 명과 7급 직원 한 명이 부재다. 지난 번 채용 때 적임자가 없어 채용하지 못했고, 합격했던 한 직원은 스스로 포기했다. 

대체로 기능직 직원은 기본적인 문서 정리 업무를 하는 게 보통인지라, 어쩔 수 없이 거의 모든 일들은 내게로 돌아왔다. 때론 이렇게 일하다 내 몸이 이상해 병원에 입원하면 이 속도를 줄일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런 개인의 희생은 그리 의미가 없을 듯 했다. 이제 어지간히 개인주의자가 된 나로선 그리 흥미를 끌만한 투쟁도 아니었다.

결국 스스로 모라토리움 - 그냥 속된 내 말로 하면 배째라 정도가 맞으려나? - 을 선언했다. 아침 7시부터 밤 10시, 11시까지 해도 끝이 없는 일을 난 더 이상 방어할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무엇을 해달라는 다른 부서의 요청이 들어오면 우선순위를 봐서 하지만, 못할 경우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공보담당관실의 자료가 취합되지 않아 일이 진행 안 되면 내가 자료를 못 주어서 그렇다고 말하라고 했다.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니까. 그렇다고 오늘 내야 할 보도자료를 내일 낼 수는 없으니 보도자료 작성과 배포가 우선순위다.   


벌판에 한 소년이 서 있다. 뒤쪽에는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제 잠시 후면 강한 바람이 몰아져 온다. 그 바람에는 돌들도 함께 섞여 있다.

소년의 임무는 나무를 지키는 일이다. 소년은 처음 나무를 등지고 섰을 때 자신감이 있었다. 그 정도의 바람과 돌쯤이야 못 막을까 싶었다. 더욱이 뒤에 서 있는 나무는 그가 무척 아끼는 것이었으니 지켜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첫날 바람과 함께 돌들이 날아들었지만, 소년은 잘 막아냈다. 둘째 날, 셋째 날도 소년은 나무를 잘 보호했다.  

그러나 일주일쯤 되면서 소년은 기력이 빠졌다. 몸도 어느새 곳곳에 상처를 입었다. 뒤돌아보니 나뭇가지도 두어 가닥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자신은 나름대로 방어했다 싶었지만, 틈은 있었다.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났다. 좀처럼 바람은 그칠 기미가 없었다. 애초 소년은 나무를 가꾸고 싶었다. 거름도 내주고 좀 더 튼튼하게 자랄 수 있도록 물도 제때 주고 싶었다. 그러나 소년의 삶은 그런 첫 꿈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무 가꾸는 일은 고사하고 나무를 지켜내는 일도 힘에 부쳤다. 보름이 지나면서 소년은 깨달았다. 이 바람으로부터 나무를 온전히 지키는 일은 어렵다는 것을. 하지만 소년은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이제 소년은 불어오는 바람의 70% 정도만을 막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머지 30%는 여린 나뭇가지를 향해 몰아졌고, 그때마다 무수한 잎들이 땅에 떨어졌다. 소년은 그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달리 수를 찾지 못했다. 몸으로 막고 있는 70%의 바람만으로도 소년은 충분히 피곤해 있었다. 하루하루 소년의 몸은 악화되었다. 이제 소년은 매일 아침 생각한다.


‘나무에게 몰아치는 저 바람을 막지 못한 것은 잘못인데 나로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 죄책감도 들지 않고 앞으로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자신감도 없다.’ 

소년은 나무 가꾸는 일을 잘하고 싶다. 자라는 나무를 보면서 어디를 돌보면, 언제 거름을 내면 나무가 푸름을 잊지 않고 자랄지도 계산해 둔 바다. 그러나 그럴 틈이 없다. 하루하루 소년은 몸과 생각이 야위어 가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시간이 없어서 일을 못하겠다’는 말은 결국 ‘능력이 없다’는 말과 동어였다.


4월 8일 이후, 내 아침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침 일찍 출근해 나를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은 개꿈보다도 허망해져 버렸다. 더욱이 4월 22일부터 5월 17일까지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저녁 6시 30분부터 두세 시간씩 교육이 있다. 인권교육과 행정교육이다. 이 시간들 역시 저녁시간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근무시간에도 마찬가지다.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게 인터넷 신문을 볼 짬도 쉽지 않았다. 그럴 틈도 없고, 무엇보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어느 금요일 오전에 글 선생인 신혜선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점심 때 종로에서 시간이 되면 보자고 했다. 그러자면 11시 40분쯤 사무실을 나서야 했다. 그러나 곧바로 약속할 수 없었다. 결국 그날 약속 장소에 나갈 수 없었다. 보도자료 작성 건이 발생했다. 오후 두 시 정도에는 초안이 작성돼야 결재 받고 늦어도 세 시에는 자료를 배포해야 한다.  


이메일 답장 한 줄 쓰지 못하면서 세상과 단절도 깊어갔다. 대천에 사는 어느 지인이 한 달 전부터 어떤 이의 연락처를 알려 달라며 이메일을 두세 차례 보내왔다. 한 군데 전화를 걸면 그 필자의 연락처를 알 수 있고, 다시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알려주면 되는 그 일을 못하고 있다. - 이 글을 쓰면서도 그처럼 쉬운 일을 왜 아직까지 못하고 있지? 싶은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 역시 이메일로 간간이 연락이 오지만, 차마 읽어 볼 수도 없이 넘기곤 했다. 이제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모라토리움 - 역시 내 표현대로 하면 ‘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 정도일 것이다. - 을 선언해야 했다. 


몸이 피곤할수록 비디오 대여 횟수는 늘어났다. 피곤한 생각에 퇴근하면 그냥 자야지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래도 뭔가를 해야 할 것 마음이 생각해 낸 것은 비디오였다. 비디오는 아무 생각없이 볼 수 있는 자극적인 것을 택한다. 결코 인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반인권적인 전쟁영화나 폭력물이 주류다. 어느새 퇴근길에 <한겨레> 대신 스포츠신문을 읽는다는 샐러리맨들이 느끼는 정신적 피곤기에 접어들었다.


하루하루 느낌은 그렇게 죽어갔다. 다른 직원의 표현에 의하면 “느낌을 가질 시간이 없다”는 그런 날이 지속되었다. 영혼을 돌볼 시간이 사라진 자리엔 가끔 짜증이 돋아났다. 그 짜증이 타인의 영혼까지 피곤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상황은 빈번했다. 

이 모든 투덜거림은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충분한 칭찬감이다. 하루 15~6시간을 근무하는, 국민의 인권 향상을 위해 희생하는 공무원의 표상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그런 희생은 즐겁지 않다. 타의모범이 되기도 원치 않는다. 본인이 기꺼이 즐거워하지 않는 희생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늘을 죽이며 내일을 기약하는 꿈들엔 큰 매력을 느낄 수 없다. 젊은 날 부지런히 저축해 늙은 날 호강하자는 논리 역시 달갑지 않다.

작고 사소한 여지를 찾다 끝내는 자기검열에 이르렀다. 나 역시 체제 부적응자가 아닐까 싶은. 그나마 위안은 다른 직원들 역시 요즘 업무가 과중하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혼자만 투덜거렸다면 정말 적응자임이 분명하리라. 


지금 두 개의 내가 있다. 하나 하나 나를 접어가는 나, 그리고 하루의 일상에서 한 개 정도는 희망을 찾으려 하는 나. 아마 힘겹지만 후자의 내가 이길 가능성이 많다. 내 삶의 성장 동기는 어떤 외부 자극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포상금도 나를 움직일 수 없고 성과급도 나를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다시 꿈꾼다. 전대협 진군가의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라는 노랫말은 여전히 나름의 채찍이다. (20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