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아! 너 발표 났담시야? 어떻게 되었냐?”
“잘 됐어요.”
“그럼 취직이 되았냐?”
전화기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엔 한 마디 한 마디가 얼음위를 걷는 듯한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무뚝뚝함을 다독거리지 못한 채 말을 뚝뚝 부러뜨렸다.
“예…”
순간,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밝은 기운이 솟아났다.
“애썼다. 고생했다. 고생했다. 내가 왜 이리 눈물이 나올라고 한다냐!”
3월 말, 국가인권위 합격 결과를 알고도 그 소식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은 내 마음의 부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부유를 정리하고 난 4월 초에도 얘기할 수 없었다. 4월 1일부터 일은 밀려들었고, 좀처럼 상계동에 있는 어머니집에 갈 기회를 잡지 못했다. 전화보다는 만나서 말하는 게 좋을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음먹었는데 4월 초 어느 날 아침에 어머니의 전화가 걸려왔다.
국가인권위에서 일하는 동안 ‘무직’ 상황을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다. <작은이야기>를 그만 둔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인권위에 계속 있을 건지의 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사실 그대로 얘길 하면 될 듯 했지만, 그랬다면 어머니는 하루 하루를 근심 속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말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 계산엔 허점이 있었다. 첫째 허점은 의료보험증이었다. <작은이야기>에 근무할 당시 부모님의 의료보험을 내 앞으로 등록했다. 그런데 <작은이야기>를 퇴사하고 난 후, 직장의보는 지역의보로 변경됐다. 그러던 차에 부모님에게 새 개인 의료보험증이 도착했다. 눈치빠른 어머니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탐문’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내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내가 <추적60분>에 출연한 것을 누나들이 우연히 보게 된 때가 있었다. 결국 누나들에게는 사실을 말하고는 대신 어머니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내가 그동안 말도 못하고 얼마나 가슴 졸인지 아냐? 정환이가 내던 의료보험이 내 앞으로 나왔는데 무슨 일이 있는 갚어야? 했더니, 큰누나가 ‘엄마! 정환이는 지가 다 앞길 알아서 하니까 걱정 하지마. 힘드니까 냅두고 4월 달까지 두고 봐!’ 허잖냐! 그때부터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지…”
결국 어머니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이른바 ‘실직’상태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던 차였다.
‘취직’이 되었다는, 그것도 공무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한 어머니는 곧이어 한마디를 더 보탰다.
“정환아! 욕심 부리지 말고 살아 응? 그냥 월급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사니까? 딴 생각하지 말고…”
처음에 나는 어머니의 말뜻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냥 있는 돈만으로 먹고 살면 되니까, 딴 생각하지 말고, 절대 남들 돈 받을 생각말거라이?”
그랬다. 이른바 공무원이 되었으니 ‘뇌물’ 받지 말라는 것을 당신의 어법으로 완곡하게 표현했다. 며칠 후 다시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사람들이 다들 네가 장하다고 해야! 아들 잘 뒀다고 흐드라.”
공무원 아들을 둔 어머니는 기쁨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았다. 아는 사람들에게 모두 얘기한 모양이었다. 소식을 들은 외삼촌도 내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일하시는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나를 주라고 넥타이를 샀다. 어머니의 들뜬 기분은 취직하기 어렵다는 세상에서 아들이 취직을 했다는 것이었고, 더욱이 공무원이라는 ‘평생 직장’에 취직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힘들더라도 잘 참고 다녀. 요즘에 취직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아냐? 말 잘 듣고 있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먹고 사니께…”
2.
어머니의 삶에서 자식이란 희망이고 버팀목이다. 당신 자신의 삶보다는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의 삶에 익숙한 이다. 지난해 보은 장터에서 올뱅이를 팔던 한 할머니가 장사꾼으로 나선 내역은 이러했다.
“젊었을 때 남편이 돈 벌러 간다더니 8년이나 안 돌아왔어. 자식이 오남매인데 먹고 살 길이 있어? 그때부터 거짓말해야 하는 약장사 빼고 안 해본 장사가 없어. 섬을 돌았는데, 여가 어디냐 카면 완도라 카고, 진도라 카고. 남들은 새로 시집가라는디, 보통 맘으로는 자석 띠놓고 도망 못 가지.”
자식들을 위해 당신의 삶을 기꺼이 접어저린 것은 내 어머니의 내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머니도 한때는 장사를 했고, 한때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젊은 시절엔 스스로 목숨을 거두겠다고 집안에 약을 사다 숨겨 놓기도 했다. 그 약이 시골에서는 양잿물이었고, 서울에서는 수면제였다는 것이 달랐을 뿐이었다.
그런 시련을 달래고 어르는데 자식, 그것도 아들만큼 듬직한 존재가 더 있었을까. 어머니의 마음이란 당신을 살해한 아들을 감싸려고 손톱을 집어 삼키던 <공공의 적>에 비친 노부의 마음과 같다. 그런 어머니에게 이제 공무원이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아들은 얼마나 듬직한 버팀목일까. 그것은 어머니 당신으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내겐 그 어머니의 기대는 또 하나의 울타리였다.
고등학생이던 10대 후반에 내가 외아들이라는 사실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것은 내 삶을 일정한 울타리 안에 가둬두었다. 무엇을 하려 해도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이 테두리는 대학 초까지 이어졌다. 뭔가 조금이라고 모험적인 일을 생각하다보면 이 울타리는 나를 휘감고 들었다. 그러다 학생회 일을 하면서 시나브로 울타리를 걷어내게 되었다. 대학 4학년 때 석관동에 방을 얻어 독립된 생활을 하면서 그 울타리가 사라지는 듯했다. 그 울타리는 2년여 전 아버지가 입원하면서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이번에 국가인권위 직원이 되면서 어머니는 내 둘레에 또 하나의 커다란 울타리를 만들었다.
국가인권위가 내 평생직장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대학 졸업 이후 취업으로 보자면 운이 좋았다. <캠퍼스라이프>, <말>, <작은이야기> 등 모두 내가 원하는 곳이었다. 기준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물질적 가치나 직장의 안정성은 중요 기준이 아니었다. 이번에 국가인권위에 응시한 배경에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공무원이 갖는 나름의 매력에 나는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별정직이지만, 공보담당관실을 없애지 않는 한 ‘짤릴’ 일은 없다. 급여 역시 매년 호봉이 오르면서 단돈 만원이라도 인상된다. 국가인권위 공무원이라는 게 나름 자부심도 된다. 비혼자로서 결혼을 생각한다면 공무원이라는 게 플러스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겐 공무원이라는 게 부담스럽다. 아마도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민간기업이 있었다면 그곳을 택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직장에 붙어 있으려면 기분이 나쁘더라도 그냥 꾹 참고 있으라고 하지만, 그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기뿐 나쁜 것이야 참아야겠지만, 국가인권위는 늘 갈등과 긴장을 갖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어머니의 부탁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유롭고 싶다. 여전히 마흔 살의 귀향을 꿈꾸고 있고, 여전히 내가 만들고 싶은 잡지에 대한 구상을 놓지 않고 있다. 십여 년 전 부모님을 ‘의식화’ 하기 위한 한 가지 작업을 했었다.
“나는 절대 결혼 안 하니까. 그렇게 아세요.”
그 의식화 작업은 절반의 성공이었고 절반의 실패였다. 어머니는 내게 결혼하라는 얘기는 못하지만, 결혼하길 바라는 마음은 간절할 것이다. 이제 다시 어머니에게 두 번째 의식화 작업을 할 작정이다.
“국가인권위에서 얼마나 오래 있을지 몰라요!”
이번 의식화 작업은 좀 더 차근차근 진행해야 할 것 같다. 또한 일방적 통보 형식이 아닌 그 이유 등을 하나씩 풀어가면서 진행해야 할 것 같다. 왜 국가인권위에서 일하고 있고,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장차 내 꿈이 무엇인지 등이 모두 두 번째 의식화에 필요한 내용들이다. 부모님과의 대화에 익숙하지 못해 그 내용보다도 방식이 어려운 문제일 것 같지만,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롭기 위해서는 다시 해야 할 일이다.
울타리는 밖에서 들어오는 침입을 막는 것일 뿐이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고자 할 때는 기꺼이 문을 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울타리의 역할이다. 그 견고한 울타리에 문을 낼 줄 아는 지혜는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이만이 갖출 수 있다. 지금 내겐 그 의지와 지혜가 필요하다. (2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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