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한 그루에 매달린 수백 수천 개의 잎들을 바라봅니다.
바람은 한 곳에서 불어도
잎새들은 모두 제각각으로 움직입니다.
몸을 뒤로 젖히는가하면, 조잘거리듯 팔랑거리는 잎도 있습니다.
수백 수천의 잎들이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바람을 맞이하지만,
그것은 나무 한 그루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한 그루 나무와 같기를 바랍니다.
2백여 명의 직원들이
4천 7백만 국민의 인권 향상과
60억 인류의 평화를 위해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각 개인이 가진 고유한 빛깔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바람을 디딤돌 삼아
노을이 안에 ‘개인인권위원회’를 만듭니다.
잎새는
가뭄엔 몸을 움츠려 수분의 발산을 막기도 하고,
때론 몸을 활짝 펴고, 햇살을 몸 가득 담습니다.
그 모든 행위가 잎새를 위한 것이지만,
또한 나무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주는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개인인권위’는
한 그루 나무에 달린 그런 잎새 같은 존재로 자랄 것입니다.
지난 4월 어느 잡지에 글을 쓰면서 '0.5%'의 힘을 생각했다. 국가인권위에서 일하는 한 사람의 힘을 수학적으로 평균하자면, 200여 명의 각 개인은 0.5%의 힘을 갖고 있다. 그 ‘0.5%’의 힘을 기르기 위해 내 안에 개인인권위원회라는 거창한 다짐을 두었다.
‘나무 한 그루와 잎새’는 거창하게 말하면 개인인권위의 강령이다. 거창한 구호와 주장 일색으로 넘쳐나는 게 강령이지만, 개인인권위에는 그런 강령은 필요 없다.
개인인권위는 노을이 혼자가 곧 회원의 전부다. 운영부터 사업구상까지 모든 것을 혼자 한다. 각 개인들이 인권위를 만든다면, 연대할 수는 있으나, 이른바 공식적인 조직을 만들 생각은 없다. 개인이 조직이 될 수 있을지, 개인을 조직이라 부를 수 있을지, 그것이 넌센스라면 그냥 넌센스로 이해해도 아무런 불편이 없다. 세상에 이미 정해진 방식과 시각으로만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인권위는 혼자지만 하는 일은 많다. 심지어 장기적인 사업까지 계획돼 있다.
개인인권위에는 인권감수성훈련소와 자유로운영혼발전소, 안티엄숙실천소 등이 있다. 각각의 소장은 노을이다. 이중 인권감성연구소는 개인인권위 가운데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곳이다.
1. 인권감수성훈련소
지난 5월 11일 국가인권위 직원들에게 아주 엉성한 초짜 이메일진을 발송했다. 이메일진의 이름은 ‘하늘깊은 사람.’ 시도 아닌 게 시처럼 행을 나눈 글이 실린 그 이메일에는 다음과 같이 덧글을 붙였다.
<하늘깊은 사람>은 노을이가 보냅니다. 간단히 말하면 쪽지글이고, 허풍을 넣자면 '부정기무정형 개인 이메일진'입니다. 틈나는 대로 찾아뵙지요.
<하늘깊은 사람>은 바로 개인인권위 소속인 인권감수성훈련소에서 펴내는 ‘부정기 무정형 개인 이메일진’이다. ‘사람이란 존재가 가진 의미가 하늘만큼 깊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말 그대로 내가 보내고 싶을 때 보내며, 형태 역시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바꿀 수 있는 초짜 이메일진이다.
인권감수성훈련소는 우리 사회에 낯선 인권감수성을 훈련하는 계기를 만드는 곳이다. 인권감수성은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의 처지를 이해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외경심을 높이는 감성을 말한다. 이런 감성을 소유하지 않고는, 나와 다른 타인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마음이 닿지 않은 이해 없이 인권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은 어렵다.
지금까지는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만을 생각해왔지만, 사회가 다양화될수록 각 개인은 인권침해의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을 적지 않게 만나게 된다. 그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인권감수성은 필수다.
인권감수성훈련소의 활동은 글쓰기로 나타난다. 지난 4월부터 스크랩한 신문기사는 <하늘깊은 사람>에 맞는 원고를 쓰는데 좋은 재료가 되었다. 매달 쏟아지는 인권 관련 뉴스 중에서 <하늘깊은 사람>에 어울릴 법한 내용을 모아 두었다가, 노을이 방식의 글쓰기로 바꾸었다. 시간이 된다면, 직접 취재해 글을 쓰고 싶은 게 바람인데,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다.
<하늘깊은 사람>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은 미비하다. 지금까지 답장이 온 이메일은 몇 통 없었다.
“차암, 당신은 산소같은 사람입니다.”
“참, 여러 가지로 맘과 머리를 휘젓는군요. <하늘만큼 깊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새삼 돌아봅니다.”
“잔잔하게 그러나 강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글들이군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글들이 읽혀지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되시기를.”
전입 온 공무원 중에 한 분은 <하늘깊은 사람>을 모으겠다며 초반에 보냈던 이메일을 다시 보내달고 하기도 했다.
반응은 미미하지만, 인기로 운용하는 게 아니니 큰 부담은 없다. 다만, 그런 이유로 더욱더 바빠진 곳이 개인인권위 내에 있는 안티엄숙실천소이다.
2. 안티엄숙실천소
어느 일요일,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엘리베이터에서 한 직원을 만났다.
“아니, 바지가 이게 뭡니까!”
그 분은 내가 입은, 앞 허벅지 부분이 찍어진 청바지를 보더니 웃음을 가득 담은 채 한 마디 건넸다. 그리고는 이내 덧붙였다.
“나도 이런 옷 입고 싶은데, 사람들 눈이 있으니…”
그것이 진정 부러움인지는 알 길 없으나,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한 분들에게서는 엄숙함이 종종 느껴지곤 했다. 춤동호회를 결성할 당시에도 그랬다. 한 사무관은 춤을 배우고 싶지만, 아직까지 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다음에 가입하겠다며 머뭇거렸다.
안티엄숙실천소는 흔히 공무원 사회에 ‘있다’고 말하는 관료주의와 그 동창인 과도한 엄숙주의에 안티적 입장으로 행동한다. 그 행동은 일상에서의 사사로운 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활동을 벌이질 못하고 있다. 고작해야 넥타이 안 매기 정도다. 오히려 안티엄숙주의는 국가인권위가 좀더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초반에 호칭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여 최대한 상호 관계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3. 자유로운영혼발전소
안티엄숙실천소가 반대를 중심으로 한 네가티브 운동을 펼친다면, 자유로운영혼발전소는 반대를 넘어 긍정적 생산을 하자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자유로운영혼발전소는 2개월 만에 두 가지 일을 해냈다.
첫 번째는 춤 동호회 결성이다. 춤 동호회가 결성 강사 섭외를 하려 <허벅지밴드>에서 활동한 안이영노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의 통화인지라 안부를 묻고는 용건을 간단히 설명했다. 이날 안이영노님은 50대인 이모부를 춤 강사로 추천했다. 아직 초보들이니 사교춤을 춰 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덧붙였다. 한 5분여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안이영노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춤 동호회요? 인권 운동 제대로 하시네요.”
춤추는 게 어찌 인권운동이 될까 싶지만 자유로운영혼발전소에서는 안이영노님의 말대로 춤이 충분히 인권적이라 생각한다. 몸으로 자신의 감성을 솔직하게 표현해 내는 것. 사람들은 그만큼 솔직하게 살아도 되는데 잘 안되고있는 게 현실인 것을 알면 더욱 그런 생각이 강하다.
자유로운영혼발전소가 벌인 두 번째 일은 개인의 상처가 불가피했다. 5월 중순, 국가인권위에서 행정교육 필기시험을 치렀다. 지난 4월 중순부터 받은 교육 결과를 확인하는 시험이었다. 이중 25%는 내 전공인 보도자료 작성이 시험이었다. 또한 사무처준비단에서부터 공문서를 접해 왔던지라 40여명의 시험대상자들 중에서 성적순을 매긴다면 결코 뒤쳐지지 않을 시험이었다.
그러나 나는 시험 보는 것을 포기했다. 병원에 입원한 한 명과 조사 업무로 본 못 한 명을 제하고 나면, 나는 별종이 돼 버렸다. 곧이어 담당부서 직원과 30여분 가량 말씨름을 벌였다. 시험을 왜 볼 수 없는가와 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오고갔다. 마침표는 담당과장의 지시에 의해 작성한 사유서 제출이었다.
“어떤 시험을 막론하고 시험을 치르는데 있어서 당사자는 나름의 준비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기간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또는 시험 내용에 따라 한 시간이든 하루든, ‘어느 정도’ 선일 것입니다.
저는 이번 행정실무교육평가 필기시험을 앞두고 시험을 준비할 시간을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공보담당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물리적인 시간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시간까지 뺄 여력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치르는 평가시험은 그 자체로 제 마음에 몹시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좀처럼 낼 수 없는 물리적인 시간 한계를 훤히 아는 상황에서 심리적인 스트레스만 더했습니다. 그래서 강의는 공무에 필요한 만큼 충실히 듣되, 시험은 불참하자며 마음을 다독거렸습니다.
저는 이번 평가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그 ‘어느 정도’의 물리적․심리적 준비기간을 갖고 시험을 치른 후에 나온 결과가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명예롭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저 자신에게는 당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양심껏, 성의껏 본 시험결과가 좋지 않은 것이야 제 능력 문제이니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리적․심리적인 준비 시간을 갖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인의 처지에 대한 서술 없이, 단지 숫자 몇 개로 기록된 평가결과’만으로 제가 공직사회 있는 동안 영원히 남을 기록을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기록된 ‘유형의 수치’ 뒤에 늘 변명 같은 ‘무형의 언어’를 구차하게 달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시험을 치르지 않음으로써 남는 이 결과 역시 이생에서의 제 삶에 영원히 붙어 있겠지만, 그것은 차라리 제 자신에게는 당당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한쪽 다리가 묶인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숫자로만 기록될 그 경주결과를 감안할 때, ‘참가에 의미가 있다’는 말로 독려하기보다는 한쪽 다리가 풀리면 참가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참가의 의미’는 곧 영원한 마음의 족쇄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보지 않은 것으로 당장 피해를 받은 것은 없다. 상위 5등까지 주는 상을 받지 못한 것이야 하나도 아쉬울 게 없다. 다만 자유로운영혼발전소는 설혹 그 시험결과가 내 발목을 잡는 불상사가 발생하더라도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내 영혼이 기꺼이 허락하지 않는 일을 불편한 마음으로는 하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유서를 쓰게 한 것도 불만스러운 부분이다. 시험을 안 보았으면 안 본대로 평가하면 되는 일이거늘.
4. 개인
인권감수성훈련소와 자유로운영혼발전소, 안티엄숙실천소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는 개인인권위는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다.
‘지금 네가 국가인권위에 보탬이 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거니?’
‘네 행동과 의식에 비추어 네가 인권을 운운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
가톨릭 신자들이 고해성사하듯 노을이는 개인인권위를 통해 자신을 성찰을 할 것이다. 자기성찰 없은 운동은, 자만하고 독선적이기 쉽다.
개인인권위의 실천이 옳으냐 그르냐의 평가기준은 외부에 둘 생각이다. 개인인권위를 대중들에게 설명할 때 내 입장을 설득시킬 자신이 있는 일, 최소한 ‘당신 입장에는 동의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는다’는 말을 들를 만한 일을 할 것이다. 그것만이 개인인권위가 해야 할 일이며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 기준이다. 즉, 내 처지를 내가 충분히 변호할 수 있고, 그 변호 끝에 이해(利害)관계가 덜한 제 3자들이 이해(理解)할 수 있는 일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해 나갈 것이다.
개인인권위가 국가인권위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로 기획한 한 가지 장기사업이 있다. 다름 아닌 국가인권위 출범 5년 안에 국가인권위 펜클럽을 만드는 일이다. 국가대표축구단에 붉은악마가 있듯이, 정치인 노무현에게 노사모가 있듯이….
다만 펜클럽은 국가인권위 직원인 내가 나서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관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발적인 펜클럽이 만들어 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펜클럽이 자생하기 위해 개인인권위가 할 일은 0.5%의 힘만큼 국가인권위가 제 몫을 제대로 하게 하는 것뿐이다. (2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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