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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삶이 씁쓸했던 날에 만난 벗들

 


서른 셋의 가운데 날들에서 서성거렸습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내 몸의 두 번째 반란을 겪고는 몸과 마음이 지쳐버렸습니다.

덜렁거리던 앞니를 간신히 고정시켜 둔 날, 그래도 기를 보강하려면 무엇이든 먹어야 한다는 마음에 밥숟가락을 들었습니다. 어금니로만 식사를 해결하자니,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때 문득 ‘아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습니다. 이내 삶이 씁쓸해졌습니다. 결국 이런 것까지가 삶이라는 테두리에 드는 것일텐데….


좀더 복잡한 감정이 고일 법도 한데 느낌은 담백했습니다.

유신론(有神論)자이되 무신론(無信論)자로서 그동안 내 의지를 강하게 믿었습니다. 심지어 내가 타고 가던 버스가 뒤집히더라도 살아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이번 반란으로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몇 초도 안될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짐작만 할뿐, 사실은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 알 수 없는 몇 초의 결과는 6월 한 달 동안 내 몸과 마음을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앞으로는 유서를 써놓고 살아야겠다 생각합니다. 어쩌면 유서까지도 욕심인줄 모르겠습니다. 오직 나만 믿겠다는 그런 욕심의 과욕이 유서로 남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유서가 없더라도 남은 이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정리해 줄 테니까요. 그럼에도 지금은 유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가뿐하게 헤어지기 위해서라도. 올해 안에 유서를 써볼 작정입니다. 그동안 차근차근 생각을 굴려 보아야겠습니다.


주위 지인들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나마 6월에 얻은 소득이었습니다. 사고가 난 직후 치아가 걱정돼 원준씨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3년여 전 <말>에 근무했을 때 원준씨는 전남대 치대 학생회장이었습니다. 당시 인터뷰를 했었는데, 그 인터뷰는 실리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간간이 안부를 전하는 인연이었습니다. 치아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마음의 의지를 삼고자 전화를 했습니다. 그로부터 보름쯤 지난 후에는 원준씨가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습니다.  


6월 중순, 조금만 급히 걸어도 어지럼증을 느끼는 허증을 보이던 때 도움을 준 이는 신정누나였습니다. 지난해 보길도로 취재갔던 길에 만났던 누이는 틈틈이 한의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서울에 올라온 길에, 아플 때는 먹고 싶은 것은 아끼지 말고 먹어야 한다며 저녁을 사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몸에 다시 허증이 일어 전화 했더니, 당장 진찰을 받아보자며 상계동에 있는 스승 한의사가 운영하는 한의원까지 함께 가 주었습니다. 진료를 받고 나오는 길엔 가지고 다니던 죽염을 건네주었습니다. 


사고가 나고 일주일쯤 지나 대학 후배 대진이가 사무실에 찾아왔습니다. 병문안을 온 셈입니다. 병실에 누워 있는 것도 아니니 신촌에 가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를 본 후에는 찜닭으로 저녁을 대신했습니다. 별 말없이 이랬어요 저랬어요 하며 옆에 있어준 대진이의 병문안은 주말의 즐거운 데이트였습니다. ‘녀남’이 아닌 ‘남남’간의 데이트였지만.

약 처방전을 받아든 날 저녁에 만난 대학 후배 윤정이와 미옥이는 처방전을 뺏다시피 받아들고 약국으로 달려갔습니다. 20여분이 지난 후 돌아온 그들은 선물이라며 약봉지를 내밀며, 끝내 약값을 받지 않았습니다.
 

6월 끝 무렵엔 대학동기인 15년 지기인 현태와 윤진이를 밤 10시가 넘어 만났습니다. 사고 소식을 뒤늦게 듣고는 밤늦게 나를 불러낸 것입니다. 오랫동안 잔소리를 듣었지만, 걱정이 진심임을 알기에 한 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밖에도 전화로 안부를 물어왔던 벗들까지…. 그런 주변의 좋은 벗들을 만나고 난 지금,  6월의 끝 무렵에서 몸을 추스려 봅니다. 생활을 가다듬어 봅니다.

이제 다시 나와의 대화를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몰입하되 집착하지 않는 삶을 만들어 가야겠습니다. 느낌이 충만한 삶을 가꾸어야겠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서른 즈음에’로 돌아온 듯 합니다. (20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