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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되돌이표로 남은 잡지 창간


 

2002년 6월, 드디어 잡지 발행 여부를 검토했다. 국가인권위 출범 1주년인 2002년 11월 25일을 창간일로 잡았다. 그러나 막상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 가기까지 큰 진척이 없었다.

다만, 8월에 직원 두 명이 추가로 채용되면서 약간의 일손이 비었고, 그 틈을 이용해 몇 가지 준비작업을 진행했다.

정부간행물의 유통 사항을 취재했다. 각 부처에서 발행하는 정기간행물들의 현황을 파악했다. 게 중에서 벤치마킹 할 내용은 직접 담당자를 찾아가 면담했다. 기존에 나온 인권 관련 매체들도 분석했다.


이 결과를 토대로 내용과 유통 방안, 편집 운영 방안으로 어떤 방식이 적절한지에 대한 각각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월간지 검토는 거기서 멈췄다. 또다시 다른 업무들이 막아섰다. 적은 인력에 월간지를 만들겠다는 간부들의 걱정이 또다른 장애로 나타났다.

당시엔 월간지를 두고 지휘라인에 있는 이들의 상상하는 바가 달랐다. 정기간행물을 월간지로 할 것인가 뉴스레터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결과적으로 편집방향에 대한 논란이었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월간지와 뉴스레터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월간지와 뉴스레터는 전혀 대립된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뉴스레터는 기관이나 단체의 활동소식을 전하기 위한 매체를 통상적으로 일컫는다. 즉 뉴스레터는 소식지 정도를 담는, 내용을 중심에 둔 명명법이다. 반면 월간지는 내용보다는 발간 주기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따라 명명한 개념이다. 따라서 뉴스레터는 발간 주기가 월간이면 월간지가 될 수 있으며, 월간지의 내용이 기관의 활동이나 정책 홍보 회원 정보 제공 등에 집중된다면 그것은 곧 뉴스레터다.


그럼에도 월간지와 뉴스레터의 개념은 현실적으로 복잡하게 얽혔다. 각각이 구상하는 매체의 성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나누자면, 기관홍보 잡지를 만들것이냐, 대중적인 인권 매체를 만들 것인가 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월간지를 대중적인 인권 매체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사업을 구상하는 파일들에는 잡지의 편집 방향을 가늠하는 이런 낙서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고백, 성찰, 현장, 피해자의 목소리 듣기’,

‘일상의 눈으로 인권을 말하라’,

‘인권이란 단어없이 인권을 말하라‘

’주장이 아닌 스토리가 있는 잡지‘…


그런 진퇴를 거듭하던 10월, ‘뉴스레터 견본’을 직접 만들었다. 정리되지 않고 되풀이되던 매체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취한 방안이었다. 고민을 좀 더 현실적으로 설득해보고자 ‘예시’가 필요했다.

샘플은 월간지가 창간된다면 이런 내용의 글을 싣겠다는 전제로 그동안 언론이나 잡지에 나온 글 가운데 월간지에 실을 만한 내용을 모아 엮었다. 사진들도 그림파일 형태로 모아 한글 문서에서 48쪽 짜리 책 한 권을 편집했다. 표지이야기로 <한겨레21> 기사인 인용외국인노동자를 다루었고, 특집으로 <씨네21> 기사인 인권영화를 기재했다. 필요할 경우엔 사진 파일을 다운받아 편집하고 칼라 프린트로 출력해 모양새를 갖췄다. 한편으로는, ‘권고, 그 후’, ‘면전진정 수기’, ‘통계로 본 인권위’ 등 국가인권위의 활동을 다룰 수 있는 기사도 엮었다.


이 견본은 애초에 구상하는 월간지의 모양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국가인권위를 다루는 기사는 기획했던 내용과 유사한 기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결과로 보자면 이 샘플은 매체 발간의 의지만을 표현한 셈이었다.


가장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 잡지 만들기는 이처럼 되돌이표를 그리며 2002년과 더불어 저물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되돌이표가 시작점에 올라왔을 때는 한 뼘 정도씩은 위로 올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여건상 ‘만들고 싶은 잡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언저리를 거니는 꿈은 실현할 수 있을 듯한 이 일이 내년도에 이어질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할 뿐이다.((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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