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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riting Story

<My Writing Story> 연재를 시작하며

  '내 얘긴 내가 쓰자'는 글놀이법

 

1

글쓰기가 말하기보다 더 편해졌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말하기가 글쓰기보다 더 어렵다’는 게 더욱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어떤 상황이 먼저인지는, 모르겠고 알 수도 없지만 지금은 글쓰기가 편하다.


글쓰기가 편하니 사람들 진정을 담고 나눌 얘기도 자연스레 글의 몫이 되었다. 서로 토라진 관계를 푸는 방식도 말보다 글이 앞선다. 말로 설명해야 할 설득의 시간에도 글로 전달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커지곤 한다.


글이 편하다 보니, 글이랑 놀게 되었다. 부담 없이 놀다 보니 덩달아 즐거움도 생겼다. 글 쓰는 게 즐겁다. 아직 설렘이 가시지 않은 연인을 만나는 기분도 든다. 끝을 모른 채 하루하루가 설레는 연인들처럼, 글과 노면 그런 설렘의 결들을 때때로 확인하곤 한다. 물론 즐겁다는 건 잘한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2. 

글과 편하게 놀 수 있게 된 계기를 찾자면 세 가지 상황을 들 수 있다. 

이십대 중반부터 10여 년간 만들어 온 1인 잡지 <세상풀이>의 역할이 크다. 매월 원고지 200여 쪽이 넘게 글을 쓴 경험이 담겨 있다. 그 덕에 내 몸에 글쓰기가 습관으로 스몄다. 사소한 생활낙서 한두 줄이 전부였더라도 10여 년 동안 쌓이고 쌓인 습관은, 첫눈에 반하진 않았지만 시간의 정이 들어 만나는 연인처럼 되었다.

  

5년 남짓한 사회생활을 글밥 먹고 사는 직장을 다닌 내력도 또 한 몫이다. 그 기간 동안 다양한 형태의 글을 매만질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주간신문의 글은 읽는 호흡과 유효 수명, 분량 모두가 짧다. 시사 월간지의 글은 호흡과 분량이 길어졌다. 세상을 보는 눈도 필요했다. 매월 펴내긴 해도 교양지는 또 다르다. 느낌으로 글을 매만져야 하고, 타인의 글을 다듬을 줄도 알아야 한다. 이 세 번의 내력이 글을 친구로 만든 배경이기도 하다.


30대 초반부터 시작한 글쓰기 강사 활동은 놀이를 한 단계 올려주었다. 강사 활동기는 내 글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이었다. 글쓰기 강의는 사람들에게 글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강의를 준비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일은, 내 글을 돌아보는 작업이었다. 어떻게 기획했고, 왜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런 10년을 보내고 나니 내 글의 속살들이 들여다보였다. 내면을 보고나니 친밀감은 더욱 깊어졌다.


3. 

글과 오랫동안 놀다보니 노는 방식도 다양해졌다. 

글은 사진과 논다.  때론 사진이 글을 쓰게 하기 때문이다. 사진 한 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글이 만들어진다. 때론 글로는 절대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을 사진은 슬며시 보여준다. 여기에 디지털카메라의 발달과 인터넷 기술의 변화가 더욱 끈끈하게 맺어주었다. 

  

글은 인터넷과 논다. 인터넷은 글의 놀이판을 바꾸었다. 인터넷은 누구나 쉽게 자신의 글을 다수의 타인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공간이다. 전단지를 손수 뿌리지 않더라도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길거리다. 본디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소망하는 속성을 지닌 글이 그런 인터넷을 외면할 수는 없다. 구애하려면 그 속성에 맞추어야 한다. 글은 인터넷과 놀기 위해 기획에 변화를 꾀했다.

 

글은 낙서와 논다. 낙서는 자투리 시간을 쓰는 듯한 잔재미다. 그래서 아기자기한 맛도 있다. 감동이 깊진 않지만, 하이쿠처럼 서너 줄의 글도 그 자체로 맛이 있다. 때론 열 장의 글이 한 개의 느낌표 앞에서 맥이 끊길 수도 있듯이, 글은 분량이 중요하지 않다. 모든 글들이 절제된 형식을 따를 이유도 없다. 심사숙고의 깊이만 언제나 따비지 않아도 된다. 낙서의 매력은 그런 외도로부터 시작된다.   


글은 사람과 논다. 글이 태어난 가장 근원적인 임무인 소통에 가장 충실한 놀이법이다. 따라서 사람과 노는 글은, 놀면서 존재를 증명하는 축복을 받는다. 모든 놀이가 그렇지만 글이 사람과 놀려면 관심이 깊어야 한다. 그 관심에 마음을 담아야 한다. 그 마음에 진정을 담아야 한다.

 

글은 일터에서 논다. 글이 생활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 생활의 대부분이 일터에서 이뤄진다면 글이 일터에서 노는 것은 무척 자연스럽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게 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글은 일터에서 노는 게 가장 어려운 법이다. 글로 쓸 내용이 글 쓰는 사람과 밀착돼 있을수록 글은 곤욕스럽다. 이는 마치 불편하지만 만나야 할 비즈니스적인 관계일 수도 있다. 그것까지가 놀이다.   


글은 글과 논다. 글은 놀면서 다른 글들이 어떻게 놀고 있는지를 살폈다. 글들이 때어난 배경을 살폈다. 글들이 꾸민 매무새를 살폈다. 글들이 얘기하는 목소리를 살폈다. 글들이 놀고간 자리를 살폈다. 글들이 만나는 글들을 살폈다.

글이 가장 성숙하는 때는 글과 놀 때다. 다른 글들의 놀이 흉내는 언제든 괜찮다. 타산지석은 글에게 더없는 놀이법이다. 글에게 유유상종은 최고의 미덕이다.  
 

4. 

글놀이꾼 노을이의 <My Writing Story> 연재를 시작한다. 노을이가 글과 어떻게 놀았는지를 담는 글들이 모아진다. 그동안 쓴 글을 소개하고, 그 글에 얽힌 놀이를 풀어내는 방식이 될 듯 싶다.
글과 놀 때는 그냥 놀 수 없다. 기획력, 취재력, 표현력, 사고

력이 함께 힘쓰지 않으면 놀이가 이뤄지지 않는다. 이 네 가지 힘이 조화를 이루면 재미가 붙는다. 놀이법에서 그런 재미의 모습까지 담아낼 수 있다면 좋겠다. .

글쓰기 강사를 하면서 글쓰기를 배우려는 이들을 보며 기대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글쓰기를 만만하게 볼 그날’은 어렵다해도, 하고 싶은 얘기를 잘 풀어낼 정도의 글쓰기는 했으면 싶었다. 비록 시의성도 없고 뉴스 가치가 없어 잘 팔리는 글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남의 힘을 빌지 않고 '내 얘긴 내가 쓰자'는 바람이었다. 즉 주장의 자립을 위한 글쓰기다. 이게 이뤄지고 나면 소통을 위한 글쓰기가 가능하다. 


<My Writing Story>는 노을이가 쓸 글쓰기 관련 글들로 보면, 주 음식을 맛보기 전에 구미를 당겨주는 역할 정도로 보고 있다. 글을 쓰고 싶은 이들에게 흥미를 돋궈주는 정도다. 그래서 ‘뭐, 이 정도라면 나도 한번…’하는 마음이 생기면 족하다. 그렇다고 무엇을 가르칠 것은 없다. 글쓰는 방법을 얘기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글갖고 노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이런 글을 쓰겠다고 몇 년 전부터 생각했는데 자꾸만 미루고 말았다. 연재를  하겠다는 공개선언은 일종의 배수진이다. 게으른 만큼 창피 좀 당하라는 구두 경고다. 약 40편의 글을 2010년에 정리하는 게 목표다.(20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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