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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riting Story

존재하지 않는 신화, '영원한 사랑'(중)

 <My Writing Story> - 글, 인터넷과 놀다④



<오마이뉴스> 편집방향 가운데는 논쟁거리가 되는 기사를 좋아한다는 판단이 어느 정도 관심을 끌었다고 생각돼, 다시 준비한 게 <오마이뉴스>판 사랑예감이었다. 지난해 권 교수가 작은이야기에 연재한 사랑예감에서 ‘파격’적인 내용을 간추려 기사를 작성했다. 이 글이 내용 역시 이미 6개월 전에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그 글 내용을 다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좋은 기회가 왔고, 역시 관심 영역에 들 수 있다고 판단해 두 번째 기사로 엮었다.


두 번째 기사에서 나는 전달자로 뒷전에 밀려버렸다. 대신 권 교수가 논

쟁의 직접 상대자가 돼 버렸다. 다시 기사를 올리고 권 교수에게 전화를 드려 허락을 구했다. 권 교수는 쾌히 응해 주셨다.

“논란의 장으로 끌어주셔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배상금을 내놓으라고 다그쳐야 할지… 다음에는 제 어떤 글을 소개하실 작정인지….”


어느새 첫 글은 조회 수가 8천6백여 건이었다. 독자들이 광고를 한번 클릭할 때마다 50원씩 쌓이는 광고 원고료가 최고값인 5천원에 도달했다.

두 번째 글은 ‘존재하지 않는 신화, 영원한 사랑’이란 이름으로 올렸다. 두 번째 글 역시 탑으로 올라갔다. 두 번째 글은 조횟수가 3천4백여건 정도 됐다.


어느 정치학 교수의 ‘파격적인 사랑학 개론’



"영원한 사랑에 대한 강박적 믿음이야말로 사랑을 방해하는 큰 요인이다.”

“아무래도 한국사회는 분명히 개인간의 진정한 사랑을 허용하기를 매우 두려워하는 공간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국가'까지 사랑에 개입하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결혼바깥의 사랑을 '죄'로 규정하는 법률은 국가보안법만큼 한심하고 반인간적이다.”


다시, 대전대 정치학과 권혁범 교수의 얘기입니다. 지난번 글 '헤어질 것을 맹세하라?'에 올린 독자님들의 글들을 잘 읽었습니다. 기사를 올린 이로서 사랑에 대한 담론이 좀 더 풍부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친 김에 ‘사랑 도상훈련’을 위한 두 번째 글을 마련해 보았습니다.


권 교수는 지난 해 월간 <작은이야기>에 ‘사랑예감’이란 칼럼을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권 교수는 네 번에 걸쳐 우리 시대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정치학 교수가 사랑학을 거론하다니…. 저는 이제 그 연재에서 권 교수가 주장했던 ‘파격적인 사랑학’을 다시 정리해 볼까 합니다.


권 교수의 ‘사랑학 개론’은 우선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시각으로 출발합니다. 사랑이라는 게 결국 감정이니 변하기 쉽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연스럽게 생기고 또 그렇게 사라진다. 생겨나는 거지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따라서 어떤 도덕적 의무감으로도 사랑을 유지할 수는 없다. 사랑이 사라질 때 남는 관계는 '정' '의리'나 ‘의무’일 뿐이다. 과거에는 정조에 대한 집착과 위선적 일부일처제의 강박으로부터 남녀간의 연애도 자유롭지 못했다. 한번 사랑하면 영원히 사랑해야 하는 게 사람의 도리이고 '영원한 사랑'의 약속을 깨는 것은 '배반'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압력 때문에 사실 사람들은 사랑을 '깨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의 노예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영원한 사랑’을 최고로 여깁니다. 그러나 영원한 사랑이 아름답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영원한 사랑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또한 영원한 사랑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영원한 사랑’에 대한 관찰은 계속 이어집니다.

“'영원한 사랑'에 대한 강박적 믿음이야말로 사랑을 방해하는 큰 요인이다. 존재하지 않는 신화 때문에 연인들은 사랑을 겁내고 사랑의 상처를 두려워하고 사랑을 깰까봐 노심초사한다. '영원성'의 환상에서 깰 때 우리는 사랑에 '쉽게' 몰입할 수 있고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권 교수는 사랑은 영원성이라는 시간의 기준보다는 진정성으로 무게를 가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했다가 하루 만에 헤어졌다고, 단지 그 하루 동안이었다고 그것을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헤어진 사랑이, 영원하지 못한 그 사랑이,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정성만 있다면 "24시간이건 열두 달이건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아무런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헌신적으로 몰입하는 사랑”을 하라고 말합니다. 왜? 사랑은 밥을 먹여 주진 못하지만 삶에 있어서 근원적 행복을 주며 영혼을 먹여주기 때문입니다.


권 교수는 두 번째 글 '침실의 사랑, 병원 침대 위의 파트너'에서는 좀더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습니다. 이 글에서 권 교수는 우리 사회에 이제 웬만큼 현실로 드러난 기혼인들의 바깥사랑을 말합니다. 만일 당신이 결혼한 이인데 운명적인 사랑이 나타났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권 교수는 이럴 경우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사랑 없는 결혼과 결혼 없는 사랑을 병행하든가. 아니면 이혼하고 '운명적'인 상대와 새 삶을 개척하는 것”입니다. 이 무슨 가정파괴를 선동하는 발언이냐고 항변할 지 모르겠지만, 권 교수의 이런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사회 통념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결혼은 성역이 아니다. 결혼은 중요하지만 이혼과 재혼 혹은 이혼과 독신이 삶의 '실패'로 규정되는 위선적 도덕주의의 재단에서 우리는 해방되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뭐 때문에 소중한 인생을 낭비해야 할까?”

물론 운명적인 사랑과 일시적 바람기를 잘 구별해야 함은 당연지사일 것입니다.


이어 권 교수는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과 반드시 동거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사랑도’ 아름다울 수 있지만, 진정한 사랑에는 일상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동거가 필수라는 말입니다. “동거하지 않는 사랑은 관념적 미학의 요소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피와 살이 뛰는 생생한 사랑”은 아니니까요.

권 교수가 주장하는 바가 ‘몸의 사랑’만은 아닙니다. 권 교수는 사랑은 중요하고 아름답고 황홀하지만, 사랑 그것만으로는 최상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가 지적하는 인간관계의 최고는 “성적 파트너십 (동양 언어로 속궁합), 정신적 사랑, 그리고 돌봄의 마음(caring)이 결합되는 관계”가 적절히 엮여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얘기했으니 ‘성(性)’이 빠진다면 그 또한 맥 빠지는 이야기일 겁니다. “이상적인 사랑은 정신과 육체의 병행”이라고 생각하는 권 교수의 세 번째 글 제목은 ‘마법의 '성'’입니다. 권 교수가 ‘성’에 ‘마법’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이렇습니다. 

“섹스는 아름답고 황홀하다. 그것은 개체적 불안감과 소외를 떨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타자와의 완전한 일체감을 부여한다. 말 그대로 '뒤엉켜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두개의 분리된 자아가 결합될 수 있는 최고의 행위다.때로는 그 결과 정신적 육체적으로 분리된 두 개의 유기체가 '생명의 잉태'를 통해 하나의 유기체로 완전하게 결합되는 '우주의 신비'를 연출한다. 정말 놀라운 SF가 아닌가? 단순한 친교나 우정과는 비교도 안돼는 '마법의 성'이다. 그걸 참고 살아야 하는 무슨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는가?”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성인 당사자들간에 동의가 있는 한 어떤 형태의 성적 결합도 어떠한 성적 모험도 허용되어야 한다. 연인이 있는 자, 미혼자 혹은 기혼자라 해서, 같은 성간이라 해서 그 권리가 박탈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파트너에 대해 만족하지 못할 때 성/사랑/새로운 결혼의 탐험 권리가 있어야 한다. 이게 없이 어떻게 현재의 질곡을 벗어날 수 있을까?”


“현재의 질곡”이란 한강 상류에 그림처럼 펼쳐진, 최근 논란이 되었던 주택가의 러브호텔 등이 그 물적 증거로 충분할 듯싶습니다. 포괄적으로 보자면, ‘팁 3만원’이라는 광고판을 내건 도심의 단란주점을 접대사업장으로 생각하는 일부 샐러리맨들의 생활과, 군대 가기 전에 총각 딱지를 떼어야 한다며 이른바 ‘588’을 호기 있게 찾는 일부 청춘남성들의 몰지각성까지도 질곡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권 교수의 주장이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녹록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자칫하다간, 파트너에게 사기당할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그래서 권 교수는 “서로의 합의에 의해 서로의 탐험 자유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또 그 약속에 치명적인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는 문화적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전제는 현재로서는 어렵겠지만 우리 사회 역시 그런 흐름으로 가지 않겠냐 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이 밖에도 권 교수는 몇 가지 주의할 점을 밝혀 두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글은 제목에서 한 마디로 요약됩니다. '사랑하지 않을 권리, 결혼하지 않을 권리' 만일 당신이 서른이 넘어도 결혼하지 않은 남녀에게 ‘노총각’, ‘노처녀’라는 표현을 쓴다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이 글은 한 마디로 동거하는 삶, 이혼한 삶, 재혼한 삶, 결혼했어도 아이를 갖지 않은 삶, 동성애자들끼리의 동거(결혼) 등등… 그 모든 사랑과 결혼에 관한 다른 방식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공부에 미쳐 혼기를 놓친 과학자는 아름답다. 산의 위험을 알기에 결혼하지 않은 등산가는 멋있다. 일부일처제의 위선적 구속이 싫어서 혼자 사는 '자유인간'은 당당하다. 자기 자식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에 함몰될까 두려워 애 낳기를 거부하고 대신 육아운동에 헌신하는 사회운동가 부부는 존경스럽다.”

이전 글들과 달리 비교적 ‘얌전하게’ 끝나지만, 이 네 번째 글은 말 그대로 연재의 대미를 장식하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권 교수가 세 번의 글에서 주장한 그 모든 내용들이 바로 이 글에서 주장하는 목소리 안에 담길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얘기입니다.

“관습적 사랑과 결혼에 대한 무성찰과 무반성이 주류인 한국사회에서 '사랑하지 않을 권리' 혹은 사랑하면서도 '결혼하지 않을 권리' 혹은 결혼했으면서도 애 낳지 않을 권리 혹은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동거할 권리가 문화적으로 존중되는 날은 언제쯤 올까?”


이 글이 연재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유는 아직 ‘그 날’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글과 두 번째 글의 핵심 내용은 권혁범 교수의 글 내용이다. 따라서 글 내용 즉 주제를 참신함은 온전히 권 교수의 몫이다. 그런 글을 어떻게 정리해 취재글로 만들 것인가의 고민이 첨가 됐을 뿐이다. 두 글에 대한 독자의견 글은 <오마이뉴스>가 현재처럼 많이 알려지지 않은 상황임에도 50여회에 이르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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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신화, '영원한 사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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