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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랑 놀랑

글쓰기의 대중화, 다시 새 판을 짜다

 

부제 : 광주, 글쓰기 강좌를 준비하며


1.

며칠 전,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는 아줌마들을 만나 수다 떨듯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한 아줌마는 6․2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한 기초단체장의 자서전 집필을 도왔단다. 다른 아줌마는 요즘엔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했다. 여전히 사보에 기사를 쓰긴 하지만, 예전에 직접 기획하고 취재원을 섭외해 인터뷰 하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노는 것 같단다. 올 초엔 취재를 위해 광주에 방문하기도 했었다.


두 아줌마는 몇 년 전에 진행한 글쓰기 강좌에서 ‘학생’으로 만났다. 나는 잠시 기자 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선생’ 노릇을 맡았다. 


강좌를 마치고 글 쓰는 활동을 하는 분들이 이 두 분만은 아니다. 매년 강좌를 마치고 나면 적지 않은 ‘학생’들이 ‘현장’으로 나갔다. 스스로 단행본을 기획해 글을 쓰고 책을 내기도 했고, 한 일간신문에는 지유기고가로서는 드물게 연재기사를 쓰기도 했다. 어떤 분은 <오마이뉴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났을 때 시민기자로 참석할 정도로 두드러진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처럼 한때 ‘학생’으로 만났던 분들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글이 맺어준 인연에 감사한다. 그러나 그분들의 글쓰기 활동이 단지 강좌를 수강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글쓰기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이라곤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2. 

태어나 20여년 가까이 읽고 써 온 글을 다시 배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글쓰기를 둘러싼 현실 또한 어불성설이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논술로도 부족해, 대학에 입학해서도 글쓰기를 배운다. 웬만한 문화센터에는 글쓰기 강좌가 개설돼 있다. 글쓰기 방법을 일러주는, 경험담을 소개하는 책들도 서점에 적지 않게 놓여있다. 시, 소설 등 창작물이 아닌 자신의 생활을 글로 쓰는 것마저 어려워하는 이들도 여전히 주변에 많다.


광주에서 진행하는 <오마이스쿨>의 ‘세상과 소통하는 생활․취재글 쓰기’ 강좌를 준비하면서 다시 이 어불성설의 현실을 생각했다. 이 현실은 10년 가까이 글쓰기 강의를 하면서 생긴 꿈, ‘글쓰기의 대중화’를 낳은 반어적 토양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소수 집단만 가질 역량이 아니다. 글씨를 읽고 쓸 줄 안다면, 누구나 글쓰기가 가능해야 한다. 예전엔 글씨를 모르는 문맹인이 사회적 약자였다. 요즘엔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이들이 문맹이다. ‘글쓰기의 대중화’는 이 현대판 문맹을 깨고 싶은 욕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번에 진행하는 강좌는 그런 글쓰기 대중화를 위한 훈련장으로 만들려 한다. 글이 두렵고 어려운 대상이 아니라, 편하게 함께 놀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도록 하려 한다. 이 훈련의 서두에 ‘학생’들에게 주문할 내용은 이미 준비돼 있다.


3.

 ‘학생’들은 미사여구에 대한 동경에서 벗어나야 한다. 글을 쓸 때 유의할 점은 ‘소통’이지 ‘꾸임’이 아니다. 글은 자신의 의사를 누군

가에게 잘 전달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글이다. 소통이 없는 꾸밈글은 글의 존재를 의심받지만, 꾸밈이 없는 소통글은 그 자체로도 존재를 완성해 준다.


글쓰기에 관한 자신의 현주소를 객관적으로 살필 줄도 알아야 한다. 글은 그저 생각이나 마음을 나타내는 도구일 뿐이다. 글쓰기는 그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즉, 글을 사용해 생각이나 마음을 잘 나타내면 그게 곧 글쓰기다. 이 글쓰기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두 단계의 진단이 필요하다. 첫째는 생각이나 마음이 정리돼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생각이 잘 정리돼 있음에도 글이 잘못 써졌다면, 그 글은 도구 사용법을 모르고 있다는 증표다. 따라서 ‘학생’들은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알아야 그에 맞는 처방을 받을 수 있다.


현재 이해하고 있는 글쓰기에 대한 시각에도 약간의 교정이 필요하다. 독자와 필자가 글을 보는 시각이 달라야 하는 이유, 내 이야기(일기)에도 취재가 필요한 이유, 맞춤법이 다소 안 맞더라도 기사가 되는 이유, 문단 순서만 바꾸어도 훨씬 읽기 쉬운 글이 되는 이유…. 강좌를 기획하면서 내놓은 이 이유들은 그 교정각을 찾기 위한 의문부호들이다.


4. 

이런 주문은 ‘학생’의 글쓰기 경험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추가된다. 그러나 그 어떤 주문도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글쓰기를 배우려 한 이들이라면 적어도 한두 번은 들어봤음직한 내용들이다. 따라서 ‘선생’이 새로운 무엇을 가르치겠다고 한다면 과장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겐 스스로가 미처 깨닫지 못한 글쓰기 역량이 내재돼 있다. ‘선생’은 학생들의 그 글쓰기 역량이 밖으로 흘러나올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는 역할만 해도 충분하다. 

 

오늘, 몇 년 전 ‘학생’으로 만났던 어떤 분이 쓴 책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처음 만났을 때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누구보다 많았던 분이었는데, 자신이 살면서 겪은 일들을 딸들에게 담담히 전하는 글을 써 책으로 엮어냈다.

오늘 받은 책과 같은 선물을 이번에 함께 할 ‘학생’들로부터 많이 받고 싶어졌다. 그런 선물이 글쓰기의 대중화를 열러가는 하나의 계단들이 되지 않을까 싶다.(20100512)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