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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온날

달팽이에 추월당한 노트북


30분. 그동안 노트북 화면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여전히 빈 한글 프로그램만 열린 상태였다. 탐색기를 열어 USB에 든 문서를 불러와야 하는데, 탐색기는 반응이 없다. 그러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잠시 생각하다가 한글에서 곧바로 불러오기를 시도했다.

5초, 10초, 30초, 1분... . 아무런 반응이 없다. 불러오기 창도 뜨지 않고 마우스는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하고 혼자만 돌아다닌다. 30분 동안 한 일이라곤 빈 한글문서를 열어둔 게 고작이다. 속도로 가늠하자면 시속 1미터쯤 될까 싶다. 달팽이와 달리기 했다면 결코 달팽이가 질 수 없는 상황이다.  

평정은 잃지 말자 다짐한다. 이럴 때일수록 서두리지 말아야 한다. 답답하다고 이것저것 마우스질 했다간 노트북은 아예 굳어버릴께 뻔하다. 천천히 천천히, 이것만이 최고의 기술이다.

강의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그때까지 열리지 않으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계산한다.  한번 더 읽어야 할 두어 개의 글은 이처럼 딱한 상황이니 넘어갈 수 있다. 각자 역할과 취재 내용이 담긴 엑셀표가 있어야 취재기행 틍을 짤 수 있다. 아니,  없더라도 어찌 될 듯 싶다. 외운 게 아니라 생각으로 짠 거니 가늠할 수 있겠다. 하지만 수강생들이 쓴 글, 글평을 해야 하는데 텍스트가 없으면 설명이 어렵다. 여기서 막힌다. 

이제 저녁식사를 먹을 시간은 없다. 애초엔 6시 10분 정도까지 글 두 개만 읽고, 남은 시간에 식사하려 했다.  그러나 이 '초저속'의 노트북 앞에 저녁식사는  언감생심이다. 
이제는 스스로 움직이도록 두는 게 최선이다 생각할 무렵, 노트북에 창이 하나 떴다. 바이러스가 있는데 치료할 거냐고 묻는다. 그저 바라보는 거 밖에 할 게 없으니 그거라도 동의한다. 
동의에 4분, 치료중이라는 내용이 뜨는데 10분. 이러다간 달팽이 뒷모습도 볼수 없겠다. 

6시 50분. 수강생들이 하나둘 들어온다. 노트북이 말썽이니 빔 프로젝트는 아예 켜지도 않았다. 그래도 평정을 잃지 않고 노트북을 그윽히 쳐다본다. 이제는 판단해야 한다. 노트북 없이 수업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화면을 다시보니 '치료중'이 '완료'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화면엔 바이러스 프로그램 화면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쯤되면 포기다. 

50여 분이 넘게 인내한 시간이 아깝다. 하루 중 한 시간을 빈 한글 문서 켜는데 보냈다. 6시 57분. 갑자기 노트북 화면이 바빠진다. 40분에 눌러두었던 탐색기가 열린다. 언제 클릭한 지 기억도 없는 한글 문서도 두어 개 뜬다. 불러오기 화면도 이제야 나타나다. 갑자기 문이 열리며 뛰어나온 새떼들 같다.  노트북의 귀환과 강의 시작이 약솓된 것처럼 일치한다. 

이제 노트북과 빔프로젝트만 연결하면 강의준비가 끝이다. 7시가 살짝 넘었다. 선을 연결하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려 테스트를 하는데 스크린이 먹통이다. 웬만안 노트북은 두어 번 자판을 두드리면 되는데,  이 노트북은 웬만하지 않다.  1분 남짓 느낀 기쁨은 말끔히 사라졌다. 다시 노트북 없는 세상에서의 강의를 생각해야 한다. 

다행히 구세주는 있었다. 수강생 중 한 명이 노트북을 갖고 있다. 한 시간 남짓 생존을 기다렸던 노트북은 이제 관심이 없다. 새 노트북에 빔프로젝트를 연결하고,  USB를 꽂아 수업을 시작한다. 10분 후 수업이 시작된다. 엑셀표도 뜨고, 한글 파일도 화면에 비친다.

한 시간 동안 도를 닦은 듯한 기분이다. 아! 몇 번만 이런 일이 발생하면 아이패드 사겠다고 미뤄 둔 넷북을 살 지도 모르겠다.(201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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