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수 없는 땅
그러나 가야만 하는 곳‘
새벽녘에 택시를 타고 용산 전쟁기념관 앞을 지나치다 스치듯 눈길을 멈춘 문구입니다. 이미 택시는 고가를 넘어 공덕동로타리로 달음박질치는데, 생각은 전쟁기념관 입구에 세로로 쓰인 그 문구에 멈춰 있습니다.
‘갈 수 없는 땅
그러나 가야만 하는 곳‘
의미로 보아서는 그리 어려운 문구는 아닙니다. ‘갈 수 없는 땅’이나 ‘그러나 가야만 하는 곳’ 모두 북녘땅을 말한다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갈수 없는 땅’은 현재의 분단 상태를 표현한 말이고, ‘그러나 가야만 하는 곳’이란 미래의 통일을 염원하는 강한 의지가 담겼다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열네 글자가 마음에 닿아 있었던 이유는 맨 마지막 글자인 ‘곳’ 때문입니다. ‘현재의 분단 현실과 미래의 통일염원을 표현하는데 있어 과연 ‘곳’이란 표현보다 나은 말은 없었을까?‘ 그 생각이 어둠을 거둬내는 가로등 불빛처럼 머릿속에서 차근차근 열네 글자를 헤집었습니다. ‘곳’ 다음으로 만난 글자는 ‘땅’이었습니다. 아마도 동어반복을 피하려고 앞 문장에서는 ‘땅’으로, 뒷 문장에서는 ‘곳’으로 북녘 땅을 표현했을 터입니다.
그 열네 글자로 구성된 문구에서, 현재의 분단 현실과 미래의 통일염원 중 어떤 내용이 강조되어야 할까! 그것은 어렵지 않은 질문입니다. 현재의 분단현실을 넘어 미래 통일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의미상 맞을 것이며, 그렇다면 통일을 염원하는 뒷 문장이 강조되는 게 뜻에 맞습니다.
그럴 경우에, 과연 강조되는 문장에서 ‘땅’이란 글자 대신 ‘곳’이란 글자를 쓴 것은 어울리는 것일까! ‘어떤 한정된 공간’을 나타내는 명사인 ‘곳’이 주는 어감과 의미는 타당한 것일까!
그쯤에서 슬그머니 ‘땅‘과 ’곳‘의 위치를 바꾸어 봅니다.
‘갈 수 없는 곳
그러나 가야만 하는 땅‘
그러나 여전히 뭔가 못내 아쉽습니다. ‘곳’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묻어나는 딱딱함이 거슬립니다. ‘갈 수 없는 곳’이란 말이 혀끝에서 떠나고 나면 곧바로 낭떠러지를 만난 듯하여 뒷말과 매끄럽게 이어지는 맛이 돋아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의미까지 영향을 받아 분단이 오래 될 듯한 느낌마저 가슴에 얹혀 놓습니다. ‘곳‘ 대신에 ’땅’을 의미하는 ‘대지’나 ‘북녘’등을 넣어 보지만, 그 역시 썩 어울리는 단어는 아닌 듯 합니다.
밤늦은 택시 안에서 그리 생각할 게 없을까 싶을 정도로 열네 글자는 오래 남습니다. 다시 처음의 문장에서 다른 변화를 생각합니다
. 단어를 바꾸든, 문장을 바꾸든…. 결과적으로 의미상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이 간절히 담겼으면 하는 것인데 쉽지 않습니다.
현재보다는 미래를 강조할 수 있는 문장. 통일에 대한 좀더 강한 의지가 담긴 문장. 그런 문장은 어떻게 표현할 지를 고민하는 동안 택시는 집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택시에서 내리고 나서 새로운 문장 한 개를 떠올렸습니다. 현재를 ‘인정’하는 단정적 맛을 주었던 ‘곳’을 버리고, 차라리 여운으로 남기며 미래로 이어지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돋아난 겁니다.
‘갈 수 없는…,
그러나 가야만 하는 땅‘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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