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경기도 군포시에 사시는 리영희 선생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낸 적이 있다. 그해 2월 제주인권학술회의에서 찍은 사진도 함께 동봉했다. 당시 내가 이하던 잡지는 개편을 앞두고 있었다. 그 개편 호 앞부분에 리영희 선생의 글을 받고 싶었는데, 그 편지는 그런 목적을 담은 글이었다.
“…지난 2월 말, 한국인권재단에서 주최한 2000제주인권학술회의장이었습니다. 그때, 호주제 폐지가 주제인 토론회가 있었습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지하은희 대표님과 강금실, 이석태 변호사님 등이 발제자로 나섰죠.
발제가 끝나고 토론회가 진행될 당시, 부모성함께쓰기운동에 대한 논의가 나왔고 이때 선생님도 한 말씀 하셨습니다. 부모성씨를 함께 쓰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새로운 성씨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외국의 경우 성씨가 다양한데, 우리나라의 성씨는 그렇지 못하다는 의견도 덧붙이셨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선생님의 짤막한 의견을 듣고서야 새삼스럽게 선생님께서 얼마나 깨어 있는 분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선생님께서 펴내신 책이나, 언론에 기고한 글을 통해 느꼈던 것이 간접적이었던 반면에, 그 날은 제가 직접 경험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당일 발제한 분들도 언급했지만, 호주제 폐지라는 사안은 한국사회를 지탱해온 유교적 전통에 큰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성씨 문제 역시 그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선생님께서 성씨문제에 대해 그처럼 의견을 내신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 …)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다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주장’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주장’과 함께 가야 할 것은 가슴을 움직이는 감동일 것입니다. 운동이 어느 한 순간 완료되는 것이 아닌 이상, 가슴을 움직이는 운동이 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난 번 학술회의에서 제기된 ‘감수성 훈련’에 개인적으로 깊은 관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런 잡지를 만들고 싶어, 지금 이 잡지로 왔습니다.
그런 생각 끝에 선생님께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할 수 없는 일을, 저희 힘으로 부치는 글을 선생님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
이 편지의 목적은 실현되지 않았다. 당시 선생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 무렵을 전후해 리 선생은 중풍을 앓아, 누워 있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지난해 4월 국가인권위 집들이에 참석하셨을 때도 당신의 손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누가 부축해주지 않고서는 서 있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몹시 안타까웠다.
다행스럽게도 그 후 선생의 건강은 차츰 호전되었다. 이내 올 봄엔 이라크 전쟁으로 불거진 국내 반전여론의 현장에도 기꺼이 참석해 당신의 주장을 펼치셨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국가인권위까지 이어졌다.
지난 4월초 국가인권위 월례회의 시간에 리영희 선생의 강의가 있었다. 외부 인사 초청 강연은 매달 초 위원장이 직원들에게 전하는 얘기를 마치고 난 후 약 한 시간 남짓 진행된다. 전 달엔 당시 정연주 한겨레 논설위원(현 KBS 사장)이 강의를 진행했다. 리영희 선생 강의는 이라크전 파병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던 당시에 열렸다.
내용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진실’ 정도 였다. 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200자 원고지 10매도 채 되지 않은 분량이다. 그러나 그 조약이 갖는 의미는 실로 지대하다. 리 선생은 이에 대해 그간 자신의 연구 경험을 토대로 ‘사실’에 근거한 주장을 펼쳤다.
나는 우리 사회의 어른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리영희 선생을 꼽는다. 리영희 선생의 주장에 대한 공감여부를 떠나서, 진실 앞에서는 어떤 현실과도 타협하지 않고 살아온 삶의 자세 때문이다. 나는 한 사람의 삶의 자세가 그의 세계관보다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주장이 진보적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사회의 규범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따라서 주장의 내용으로만 평가하는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는 내게 그리 큰 관심 사항이 아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어떤 가치관이든 그 가치관을 실천하고 주장하는데 있어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있느냐이다.
진실을 앞에 두고 어떤 거래도 용납하지 않는 자세를 가졌다면 다소 보수적인 사람이라도 충분히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과는 대화가 가능하고 협의가 가능하다.
내가 아는 리영희 선생은 그런 분이다. 당신은 지식인으로 살면서 당신이 연구한 내용이 진실이라면 사회적 주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든 공공선을 위해 그 진실을 밝히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덕분에 당신은 감옥을 서너 번 다녀오기도 했다. 그 용기와 진정성을 앞에 두고 ‘어른’이라는 말을 아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그 분의 주장이 내 세계관과 어긋나지 않아 - 내 세계관이 그분의 삶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 더욱 기꺼이 ‘우리 사회의 어른’으로 꼽는다. 그래서 강의가 진행되는 한 시간 남짓 동안 나는 리영희 선생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끊임없이 눌러 댔다.
이번 강의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리 선생의 팔은 여전히 중풍의 잔기운이 흔들렸다. 강의하는 동안 리 선생은 삶의 철학을 간간이 내비쳤다.
“지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의식이 중요한 거다. 의식이 없으면 그 지식이라는 것은 삐뚤어진 지식을 합리화 하는데만 이용된다. 의식이 바로 섰느냐가 문제지 지식이 많으냐가 문제는 아니다.”
(200304**)
* 이 글은 <세상풀이> 2003년 4월호에 게재된 글의 일부다. 지난 12월 5일 이 땅을 떠난 리영희 선생님을 추모하며 <글놀이꾼 노을이>에 옮겨 놓았다.
*사진은 2003년 4월 당시 인권위에서 강의하던 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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