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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자전거의 짝사랑

지구자전거1 -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다. 얼굴엔 땀이 그치지 않는다. 기운도 점점 약해지는 느낌이다. 높새를 끌고 있는 두 손목에서도, 팔뚝에서도 힘이 빠진다. 두 다리도 걷느라 어지간히 지쳤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의 어천마을을 지난 지 벌써 30여분은 족히 되었다. 그런데도 이 오르막은 끝날 기미가 없다. 도로 옆으로 펼쳐진 산줄기로 봐서는 제법 산을 올랐다. 다시 높새를 길 옆에 세워두고는 도로 턱에 앉아 숨을 돌린다. 갈수록 쉬는 시간의 간격이 좁아진다.


4시간 전인 아침 7시, 높새는 경남 함양읍에서 추석 연휴 첫날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높새와 노을이가 추석 연휴를 이용해 지리산 한 바퀴 돌기를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노을이는 언제부터인가 지방도로를 지날 때면 이런 길을 자전거로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노을이와 높새는 연휴 전날인 금요일 오후에 동서울터미널에서 함양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첫날 모델에서 묵고는 다음날엔 새벽 6시에 일어나 근처 식당에서 콩나물국밥으로 아침을 챙겨먹은 후 함양을 떠났다. 이 출발이 바로 생각을 현실로 빚어내는 일이었다.   


높새는 함양읍 외곽을 흐르는 위천을 옆에 끼고 난 1001번 지방도를 따라 첫 목적지인 산청읍으로 발길을 잡았다. 가는 길에 첫 오르막인 팥두재를 만났다. 재까지는 오르막이 완만해 기어를 몇 단 올리는 정도로도 어렵지 않게 올랐다. 항양읍과 휴천면의 경계를 말하듯 팥두재 정상에는 휴천면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팥두재를 넘고나자 길은 목현리로 이어진다. 이어 호산리와 유평리를 지나고 나니 임전강이다. 강가에서 한 촌로가 엉덩이까지 물에 담근채 낚시질이 안창이다.


임전강부터는 60번 지방도를 탔다. 다시 고개를 넘고 도착한 곳이 산청읍이었다. 잠시 길을 헤매며 에돌다 다시 1001번 국도를 만났다. 산청읍을 벗어난 1001번 국도는 때론 자취를 감추고, 3번 국도를 오르내리며 이어졌다. 이윽고 35번 국도가 산청1터널을 얼마 앞둔 곳에서 3번 국도를 빠져나온 1001번 지방도는 경호강을 건너 어천 마을에 도착했다.


어천마을 초입에서는 처음으로 더이상 폐달을 밟을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 어쩔 수 없이 높새에게서 내리는 순간, 길을 잘못 들었음을 직감했다. 때맞춰 배도 고팠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리산에서 흘러나온 산자락인 웅석봉의 옆구리를 넘는 1001번 지방도가 이처럼 가파를 줄이야. 그리고 내리 30여분이 넘게 높새를 끌고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웅석봉 자락에서 배낭에 넣어둔 생밤을 꺼내 몇 개를 깐다. 쓴 맛이 도는 밤 속껍질을 벗겨내기도 귀찮다. 그냥 겉껍질만 벗긴 채 먹는다. 물병엔 물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인적도 드문 곳이니 생밤이 당분간은 유일한 먹거리다. 밤은 산청읍으로 넘어오기 전에 잠시 쉬다가 길가 밤나무 아래에서 주었다. 채 5분도 줍지 않았는데 금세 20여 개가 모아졌다. 그 밤이 이처럼 요긴하게 요깃거리가 될 줄은 그때는 상상도 못했다. 밤을 네다섯 개 까 먹고는 다시 높새를 끌었다. 길은 여전히 오르막뿐이다. 


그로부터 24시간이 지난 일요일 오전 12시. 높새는 곡성에서 남원으로 이어진 17번 국도에서 잠시 쉬고 있다. 비가 내리긴 하지만 어제 산속에서 고립되던 때에 비하면 훨씬 낫다. 어제의 배고픔을 감안해 미리 구입한 초콜릿이 밥때를 잊게 해 준다. 이제 금지면과 주생면을 지나면 노을이가 태어난 동네인 남원시 조산동까지는 한 시간 정도만 가면 도착할 듯 싶다.

거기서 5분 정도만 더 가면 광한루 근처에서 추어탕을 먹을 수 있다. 당초 계획처럼 출발지인 함양까지 갈 것인지, 남원에서 여행을 접고 서울로 갈 것인지는 이제 한 시간 남은 시간동안 결정할 계획이다.


높새가 웅석봉 자락을 벗어난 때는 자전거를 끌고 오른 지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다행히 오르막의 끝은 있었다. 내리막을 달리며 노을이는 가장 먼저 할 일을 점심식사로 꼽았다. 그러나 내리막에 접어들자 청계리와 운리를 지나 길리까지 곧장 내달렸다. 의도와 달리 그냥 시골 마을이라 밥 먹을 곳이 없었다. 다행이라면 마을 주민에게 물을 얻어 마신 일이었다.

길리에 12시 20분에 도착해 카페에서 칼국수에 공기밥을 말아먹은 후 기운을 차렸다.


점심 후 마을 어귀에 있는 큰 플라타너스 그늘에서 한숨 자고는 20번 국도를 따라 칠정까지 갔다. 칠정부터는 덕천강을 인근에 둔 1005번 지방도를 따라 창촌리, 당산리를 거쳐 경남 하동군 옥종면과 북천면을 지났다. 북천면에서는 2번 국도를 탔다. 황토재를 넘고 청학동 초입을 안내하는 횡천강 다리를 건너 하동읍에 도착했다.


하동읍에서 하룻밤 묵고는 다음날 7시에 섬진강을 따라 이어진 861번 국도를 택했다. 날씨가 흐릿했다. 다압면을 지나 화개장터로 유명한 화개면에서 아침을 먹었다. 식사는 어제 저녁에 이어 아침밥도 두 그릇을 먹었다. 구름을 머금고 있던 하늘이 끝내 빗방울을 비쳤다.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산보를 하며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9시쯤 되자 비가 약해졌다. 그 틈을 타 다시 861번 지방도로 올랐다. 우비를 입고 젖은 아스팔트를 따라 간전면을 거쳐 구례읍에 도착하니 10시 10분이다. 그곳부터 구례구역 쪽으로 방향을 잡아 가다가 다시 섬진강 옆으로 난 길로 붙었다. 다시 비가 내렸다. 압록까지 이어진 길을 따르다 소설가 공선옥의 고향인 오지리에서 섬진강을 건너 17번 국도로 올랐다.


비는 곡성을 지나  금지면, 주생면을 지나고 남원에 도착할 때까지 내렸다. 오후 1시 10분. 다시 두세 시간만 가면 첫 출발지인 함양읍에 갈 수 있을 듯 싶다. 함양까지 갈까? 남원에서 마칠까! 답은 쉽게 내려졌다. 길 위에서는 목표를 버리고 마음 가는 대로 하는 법이다.(2007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