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PA 훈련과정은 일정에 따라 대략 3등분 할 수 있다.
그 첫 마디는 도착한 다음날부터 어제까지 사흘간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뤄졌던 강의였다. 이 ‘고난의 강의’은 어제까지로 끝났다. 이 첫 마디에 이번 훈련과정에 포함된 이론학습은 70% 정도가 이뤄졌다. 그 일정을 끝내고 나니 매도 먼저 맞으라는 말을 새삼 실감했다.
두 번째 마디는 금요일부터 시작해 일요일까지 이어진다. 가장 즐겁고 자유로운 날들로 짜여진 기간이다. 금요일에 두 번의 강의가 있지만 오전 오후로 나눠졌고 버스로 이동한 후 이뤄지기 때문에 적어도 버스 안에서는 휴식이 있다.
세 번째 마디는 월요일부터 수요일 귀국 때까지 이어지는 기간이다. 이 기간 역시 수업이 있긴 하지만 이동시간이 많고 자유시간이 포함돼 ‘고난의 강의’주에 비하면 천국 같은 날로 채워질 듯싶다.
아침 8시, 나흘간 묵었던 마스트리히트의 그랜드 호텔에서 체크아웃 했다. 일행은 여행용 가방을 챙겨들고 전용버스에 올랐다. 토레 박사와 EIPA 인턴 한 명이 동행했다. 비가 내렸지만 빗줄기는 거세지 않았다. 잠시 마스트리히트와 이별하는 시간이었다.
사흘간 둘러본 마스트리히트는 차분했지만 활기찼다. 마스트리히트가 역사적인 현장으로 등장한 때가 있었는데, 바로 1991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체결할 때였다. 그해 2월, 유럽공동체 회원국들은 마스트리히트에 모여 조약을 만들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유럽 단일통화제 실시, 유럽 중앙은행 설립, 공동외교 안보 정책 수립 등이었다. 이 조약은 각 회원국들의 내부에서 반발하는 등 많은 진통이 있었으나 결국 체결되었고, 이 조약은 이후
“하나의 유럽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조약 말고도 마스트리히트와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기억할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바로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침해에 관한 마스트리히트 가이드라인(The Maastricht Guideline on Violations of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1997)이다.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는 통상 사회적 인권, 줄여서 사회권이라고 불린다. 사회권은 실질적 평등과 분배정의를 주 내용으로 하며, 이를 국가가 적극적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내용이 깔려있다. 일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건강 및 행복에 대해 필요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등이 그 내용이다.
국제사회는 1966년 유엔총회에서 사회권 조약을 채택하고, 1976년 발효했다. 한국은 1990년에 가입했고, 전 세계적으로 150여 개국이 가입해 있다. 그러나 어느 국가든 사회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이는 그만큼 사회권 실현이 쉽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현실에서 새로운 디딤돌을 마련한 도시가 마스트리히트였다.
1997년, 국제인권법과 관련한 전문가들이 마스트리히트에 모였다. 이들은 사회권과 관련한 국가의 역할과 의무 등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사회권 실현을 전 세계적으로 촉구했다.
“시민․정치적 권리와 마찬가지로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도 국가에 세 가지 형태의 이행의무를 부과한다. 그것은 존중, 보호, 실현의 의무이다. 세 가지 이행의무 중 어느 것이라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들 권리의 침해를 구성한다. 존중의 의무는 국가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향유하는데 저해하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호의 의무는 제3자가 인권침해를 하지 않도록 국가가 막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기업이 노동자의 기본적인 일할 권리와 공정하고 유리한 노동조건을 만드는데 실패한다면 노동권에 대한 인권침해이다. 실현의 의무는 국가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완전히 실현하기 위해 적절한 법률․행정․예산․사법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한다.”
모두 32개의 지침으로 구성된 이 가이드라인은 유엔에서 공식문서로 채택되었다. 그런 역사의 현장이 바로 마스트리히트다.
독일 브뤼엘(Brühl)로 향하던 버스는 두어 시간을 채 못 달렸다. 일행 중 많은 이들이 그 시간을 잠에 할애했다. 10시 무렵 독일 브뤼엘(Brühl)에 있는 공공행정주립연구소 (The Bundesakademie für öffentliche Verwaltung)에 도착했다. 잠시 로비에서 기념촬영을 하고는 강의실로 들어섰다. 높은 천정에 두 면이 통유리로 된 강의실은 산뜻해 보였다. 통유리에 내린 얇은 커튼 너머로 정원의 초록 나무들이 비쳤다. 좌석에는 일행의 명패와 함께 물병이 놓여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물은 탄산수처럼 똑 쏘는 맛이었다. 일행이 자리에 앉자 연구소에서는 탄산수가 맞지 않은 이들에게는 다른 물을 제공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탄산수 물을 마시고 속이 좋지 않아 고생한 이들이 두어 명 있었던 모양이었다.
공공행정주립연구소에서는 CAF(Common Assessment Framework, 자기평가를 통한 공공조직 개선)라는 공공기관들의 품질 경영기법에 대한 강의가 진행됐다. 우리나라엔 낯설지만, 몇 가지의 성과지표를 설정하고 자기진
단을 통해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자는 제도였다.
강의가 끝난 후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음식은 우리 일행을 위해 따로 마련된 듯했다. 한국의 밥에 비할 수 없긴 하지만, 밥이 준비돼 있다는 것 자체가 성의였다. 식사를 마치고는 정원으로 나와 둘 셋씩 기념사진을 찍었다. 잔디가 깔린 너른 앞마당과 건물 앞에 선 나무 한 그루가 조화를 이뤄 멋을 더 했다.
오후 1시에 버스를 타고 오후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길에 공공행정주립연구소 관계자가 “반드시 보고 가라”며 소개해준 성에 들렀다. 버스기사는 일정상 10분 정도의 시간밖에 줄 수 없다고 했다. 일행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성이 눈앞에 드러났다. 관광가이드가 없는지라 내력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눈으로 느끼는 만큼이 수확일 뿐이었다. 놀라운 것은 성 자체보다도 성 주변의 조경이었다.
성 왼쪽으로는 잘 다듬어진 가로수길이 수백 미터는 돼 보이는 병풍을 이루고 있었다. 성 왼편으로 돌자 거기엔 잘 관리된 정원이 있었다. 여느 놀이공원의 산책로 못지않은 규모였다. 시간이 빠듯해 일행 중 반 정도는 이 정원을 보지 못하고 버스로 돌아갔다.
다시 버스가 출발했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근처에 산은 보이지 않고 사방이 거의 지평선에 가깝게 열렸다. 그 열린 하늘에 온통 먹구름이 가득하니 그것도 또한 유별났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내려 마스트리히트로 가는 날, 독일엔 산이 없는 줄 알았다. 서너 시간을 달려도 산은보이지 않고 사방은 평원뿐이었다. 그 평원은 때론 누렇거나 초록으로 벌판을 이뤄 ‘그림같다’는 풍경이 곳곳에서 연출됐다.
다시 독일로 돌아와 가는 이 길 주변의 평원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간간이 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게 변화였다. 그 변화를 눈으로만 볼 수 없어 운전기사 바로 뒷좌석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비록 버스창이 가로막고 버스의 진동이 카메라에 흔들림을 유발했지만 그래도 서너 컷 정도는 운이 따라주길 바랐다.
버스는 생각보다 오래 달렸다(소위 바캉스 철이라 도로 정체가 우리나라보다 심했음). 예정시간 보다 늦은 오후 5시 40분에 독일행정과학대학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을 맞이하려던 대학 관계자는 우리를 기다린 지 꽤 된 모양이었다. 강의 말미에 들어보니 이 대학의 학장이 우리를 기다리다 너무 늦는 바람에 퇴근했단다. 결국 시간이 너무 늦어 강의는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중요한 몇 가지를 언급하는 정도로 그쳤다. 서로가 아쉬운 시간이었다.
강의가 끝나고는 대학 내의 몇 군데를 소개했다. 계단식 강의실과 캠퍼스 내부 정원에 대한 소개도 잠시 이뤄졌다. 대학 건물 중 내 눈길을 끄는 곳은 대형 강의실이었다. 200여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인데, 한쪽 면 이 유리로 만들어졌다. 캠퍼스의 녹색이 그대로 교실까지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거의 7시가 가까운 시간에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이제 공식 일정은 모두 끝났다. 예정된 숙소가 있는 퓌센까지 가면 됐다. 그런데 도로가 막히기 시작했다. 아예 꼼짝을 못하고 서 있기가 다반사다. 버스는 라인강의 어느 줄기를 넘는 다리를 건넜다. 창문 너머 들판엔 토끼 한 마리가 껑충거렸다. 산도 아닌 들판에 있는 게 희한했다. 두어 시간쯤 가다보니 교통사고 현장이 나타났다. 탱크로리가 옆으로 누워 있고 주변에 두세 대의 트럭이 서 있어 왕복 2차선은 꼼짝없이 막혔다. 사고현장을 벗어나자 버스는 이제야 제 속도를 냈다.
그러나 정작 답답함은 버스 안에 있었다. 독일인인 버스기사가 영어가 서툴렀다. 우리 일행의 통역은 영어와 중국어까지 유창하게 했지만 독어는 어려웠다. 그래서 버스기사가 할 수 있는 몇 마디의 영어에 의존해 일정 등을 확인했다. 언어소통 제로 상황에서 가장 유용한 것은 몸짓과 눈치일 것이다. 그럭저럭 목적지인 숙소에는 밤 11시쯤 도착할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다시 버스에서 얼마간 잠을 잤다. 잠에서 깨니 밖은 어둠이 내렸고 버스는 그 어둠속에서 좁은 길을 따라 앞으로 달렸다.
일행이 퓌센에 있는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밤 12시 무렵이었다. 다행히 오면서 호텔에 식사를 얘기 해둬서 늦었지만 식사가 가능했다. 그러나 일행들 중 많은 이들이 피곤하고 지쳤다. 저녁식사를 기다리면서도 간혹 짜증 섞인 말투들이 한두 마디 흘렀다. 저녁식사는 연어요리가 나왔다. 나를 포함해 대여섯 명은 생맥주를 주문해 마셨다. 밤 12시 30분. 하루 일정은 또 그렇게 마감됐다. 이제 전체 일정이 반환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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