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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내 사람네

두번 째 유럽 9 - 점심의 와인, 한밤의 와인


 이제 마스트리히트를 정말로 떠나는 날이다. 아마도 남은 여생에서 이 작은 도시를 다시 방문하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아침 8시. 일행은 그동안 머물렀던 호텔을 떠났다. 오늘 일정은 파리까지 가서 OECD를 방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EIPA의 투레박사가 우리 일행을 인솔했다. 일정상으로 보면 지하철을 타고 리게로 가서 그곳에서 파리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갈아타는 여정이 있으니 좀더 일행들의 움직임에 신경을 써야 했다.


마스트리히트 역에서 10여분을 기다린 끝에 일행은 투레박사의 얘기를 듣고는 모두 기차에 올라탔다. 이제 내릴 곳을 잘 알고 내리는 일이 중요했다. 기차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벨기에도 들어섰다. 국경을 넘었는데도, 이웃 도시로 넘어온 것과 다를 바 없었다.


9박 10일간을 일정이 이제 하룻밤엔 더 보내면 끝이다. 주말을 고비로 해서 그 여정이 무척 짧아진 느낌이었다. 일행 가운데 몇몇은 주말 이전에 있던 일정들의 고단함 때문에 이번 훔련과정이 조금 힘들다고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월요일부터는 빨리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들에서 국외훈련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과 공무원들의 기대가 엇갈리고 있는 모습을 엿보게 되었다.

최근 들어 공무원들의 국외 교육훈련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커졌다. 그만큼 국외훈련이 내실있게 짜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실제 교육훈련은 이전보다는 많은 부분에서 내실을 갖추게 된 모양이었다. 이번 일행 가운데도 몇몇은 이전의 국외훈련을 생각하고 왔던 이가 있었다. 그러니 이번처럼 사흘 동안 연달아 내내 강의실 교육만 이뤄지는 프로그램은 여러모로 고통이 되었을 듯도 싶었다.


벨기에 리게역에서 모두들 큰 탈 없이 내렸다. 그곳에서 잠시 기다려 초고속 열차인 탈리스(THALYS)로 갈아탔다. 우리 일행이 가진 탈리스 승객표는 두세 군데로 분산돼 있었다. 리에가 기점이 아닌지라 입석표를 끊은 승객들이 좌석에 앉아 있기도 했다. 기차에 탄지 5분 여가 지나 모두들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로부터 기차는 두어 시간을 넘게 달렸다. 주변 곳곳은 독일에서 버스를 딸 때 보았던 들판들과 흡사했다. 잠시 잠을 청하기도 하고 앞에 앉은 일행과 잡담을 나누기도 하며 마스트리히트와의 안녕을 고했다.


오전 11시 20분. 파리 노르역에 기차는 정차했다. 그곳에서 투레박사의 안내에 따라 일행들은 모두 내렸다. 다행히 사람도 짐도 잃은 것은 없었다. 이곳에서 이제 OECD로 이행해야 했으나 일행을 태울 버스가 오기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투레박사는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는 다시 한 시간 후에 이곳에서 노르역에서 모이자고 했다.

 

일행은 삼삼오오로 다시 흩어졌다. 2조의 네이버강은 파리에서 지인이 있어서 OECD로 바로 오기로 하고 지인과 먼저 노르역을 떠났다. 2조는 이번엔 민 선생과 정 선생과 함게 어울렸다. 노르역을 나오자마자 민경미 선생은 “야! 파리다”하며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마치 엘도라도를 찾았다는 듯이 얼굴 가득 웃음이 가득했다.


우리 일행은 노르역 근처에 있는 작은 음식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프랑스어를 하는 민 선생이 가이드 역할을 했다. 

음식점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손님이 없었다. 우리는 테블에 둘러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민경미 선생은 주인에게 몇 가지를 물은 후 피자와 스파게티 등을 준비했다. 우리는 포도주도 한 병 주문했다. 테이블에 올려진 홍보전단에 나온 포도주였다. 잠시 뒤 축구선수 앙리를 닮은 주인은 포도주를 가져왔다. 그는  밝게 웃으며 포도주에 대해 설명을 곁들었다. 올해 출시한 포도주라고 했다. 
포도주를 개봉할 때 ‘펑’하는 소리가 나며 포도주 마개가 샴페인처럼 튀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에 일행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걸 보고 있던 주인은 장난스레 웃었다. 주인이 따라 준 포도주를 한 모금씩 마신 우리들은 모두 그 맛에 빠졌다. 잠시 뒤 나온 음식도 푸짐했다.


점심을 거하게 먹고 나온 일행은 근처에서 잠시 휴식을 즐겼다. 날씨가 맑아 햇살을 직접 받기엔 부담스러워 나무 밑 벤치에 앉았다. 20여 분을 쉬다가 약속시간이 돼 다시 노르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일행을 다시 만났고, 잠시 뒤 우리를 안내하는 투레박사를 따라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우선 오페라가에 있는 호텔로 갔다. 일행이 가진 여행용 짐을 호텔에 맡기고 움직이기 위해서 였다.

오후 3시 무렵에 도착한 OECD 사무실은 보안이 철저했다. 사무실로 들어가기 위해 일행은 각자의 이름이 새겨진 출입증 비표를 받아야했다. 비표는 받은 후에는 그 비표를 이용해 각자 검색대를 통과해 사무실로 들어갔다. OECD에서는 두 시간 정도 강의가 진행됐다. 오후 5시 OECD 일정을 마치고 나자 화요일의 공식 일정도 마무리됐다.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갔다. 일단 짐을 각자의 숙소에 부려놓고 남은 일정을 보내기로 했다. 


오후 6시 무렵 일행은 다시 각자의 목적에 따라 길을 잡고 호텔을 나섰다. 샹제리제 거리를 찾아 떠난 이들도 있었고, 라파예트 백화점을 향해 나선 이들도 있었다. 또한 일행은 한국에 있는 이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려고 와인가게를 찾아 나섰다. 와인가게를 찾아 나선 일행들은 30여분 동안 파리시내를 헤맨 끝에 전문 매장을 찾았다. 그 곳은 1층의 전시매장과 더불어 지하엔 창고처럼 와인가 가득했다.
그러나 와인에 대한 특별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와인을 고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점심때 맛보았던 와인을 찾아보려 했으나 홍보전단을 본 점원은 그런 와인은 없다고 했다. 와인가게는 찾는 동안 들인 공력에 비해 아무런 성과없이 나왔다. 다시 일행은 샹제리제로 방향을 잡았다. 나는 윤 사무관과 둘이 라파예트 백화점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8시에 백화점 정문에서 이 선생과 민 선생을 만나기로 했었다.
 
도중에 한 번 길을 물어 라파예트 백화점을 찾았다. 그런데 건물이 두 개 있었다. 어느 쪽일까 망설이다가 윤 사무관이 찍은 왼쪽 건물로 들어섰다. 흥미롭게도 백화점에 들어서자마자 일행 가운데 한 명을 만날 수 있었다. 백화점을 조금 들어가 1층 중간쯤 왔을 때 가방 가게에서 서성이던 일행을 다시 만났다. 무척 넓은 백화점인데도 이처럼 쉽게 찾을 줄은 몰랐다. 이제 얼굴을 확인했으니 각자 시간을 보낸 후에 정문에서 보기로 했다.

윤 사무관과 나는 백화점의 층층을 구경했다. 그러나 대부분 의류품이 많은 백화점에서 쇼핑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에스컬레이터로 한 바퀴 돌고 나서는 곧장 밖으로 나왔다. 나는 발이 아파 오히려 밖에서 쉬는 게 남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윤 사무관은 담배 생각이 간절해 밖이 백화점보다 편했다.


쇼핑을 마친 두 일행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가장 먼저 간 곳은 몽마르뜨 언덕이었다. 파리 시내에서는 에펠탑 다음으로 높다는 곳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린 일행은 좁은 골목을 따라 언덕을 향했다. 언덕을 오르기 전에는 간단한 음식을 구입했다. 간단히 요기만 하자는 셈으로 샌드위치를 구입했다. 언덕을 오르는 길은 계단을 택했다. 그렇잖아도 발이 아픈 일행에게 계단은 고통을 더해줬다. 그러나 이쯤 와서 포기하고 말 수도 없었다. 각자 힘든 것을 참아가며 한 계단 한계단 올라갔다.

몽마르뜨 언덕에 있는 사크레괴르 성당 앞에 다다라 일행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미 수백명의 관광객들이 곳곳에 모여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파리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파리의 풍경이 펼쳐졌다. 오밀조밀 저층의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도심과, 그 도시의 풍경이 그대로 지평선이 돼버린 지평, 그 지평과 도심을 뒤덮듯이 스러져가며 내리는 햇살까지 아․름․다․웠․다. 분명 저 도심의 거리 곳곳에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즐비하게 오고갈 때였지만, 몽마르뜨 언덕에서 본 도심은 고즈넉한 이국일 뿐이었다.


그곳에서 일행은 사온 간식을 꺼내서 먹었다. 햇살은 차쯤 빛을 잃었다. 동쪽 하늘가에 떠 있는 달이 점점 그 자태를 선명하게 돋궈냈다. 그만큼 파리는 더 침묵에 빠져 든 모습이었다.

일행은 이번엔 그림 그리는 화가들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어렵지 않게 찾은 그곳은 명성에 비해서는 규모면에서 화려하지 않았다. 작은 공원 둘레에 10여 명의 화가들이 앉아 저마다 손님 모델을 세우고는 초상화를 그렸다. 이 무렵 또 다른 일행들은 세느강변에서 유람선을 탔다. 유람선은 OECD에 근무하던 최 과장이 추천한 코스 가운데 하나였다. 저녁 야경이 볼만 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몽마르뜨 언덕을 내려와서는 다시 지하철을 탔다. 한국의 지하철에 비하면 파리의 지하철은 낡아 보였다. 지하철역도 허름했다. 그럼에도 개선하지 않고 지금처럼 운영하는 것 또한 신기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세느 강변으로 향하던 일행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 도착하니 앞쪽에는 파리의 에벨탑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유럽연합은 반년을 주기로 의장국을 바꾸는데, 올 7월부터 프랑스에서 의장국을 맡고 있다. 에펠탑은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원형을 이룬 12개의 별모양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앞쪽으로 전망이 트여 그 에펠탑을 보기엔 부족함이 없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일행은 사진을 찍고는 한동안 에펠탑을 감상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일행은 호텔로 돌아왔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이자, 이번 국외훈련에서의 마지막밤은 깊었다. 어느새 밤 12시에 다다랐다. 지하철 역에서 내린 일행은 호텔 근처에 가서 와인을 한잔씩 하자고 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밤 12시가 넘어 문을 연 술집을 찾기엔 쉽지 않았다. 호텔근처에서부터 서너 군데의 술집을 배회했으나 모두 문을 닫았거나 막 닫으려고 하던 참이었다. 술집이 아니더라도 편의점 같은 가게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없었다.

여유있게 와인 한 잔을 마실 그 기회가 영영 사라져 간다고 여길 쯤, 어느 술집에서 와인 한 병을 구할 수 있었다. 일행은 와인을 들고 숙소로 들어와 와인을 마셨다. 마지막 밤이라 그동안 남은 반찬을 모두 꺼냈다. 그 가운데는 와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쌈장도 있었다. 비록 근사한 술집에서 맛을 음미하며 마시진 못했지만, 추억의 한 다발로 묶자면 결코 빈약하지 않은 와인파티는 한 시간여 만에 끝났다. 프랑스에서의 첫 밤이자 마지막 밤이 그렇게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