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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0+31

“혹독히 깨져야 새 삶을 만난다”


“천왕봉까지 가자”

선배가 깨웠다. 새벽 3시였다. 다리에 가래톳이 돋아 걸음이 불편했던 선배가 그렇게 내 서른의 첫날 아침을 일으켰다. 세석산장에서 얇은 침낭에 몸을 묻고 자던 차였다. 내 입가엔 전날의 피곤함 때문에 침이 흘렀다.

‘까짓 거. 그러지 뭐.’


어둠 속에서 짐을 꾸렸다. 초코파이 한 개가 아침식사다. 세석산장을 나와 산행에 오른 시간은 새벽 3시 30분. 7시 30분에 해가 뜨니 그 시간까지 천왕봉에 가야 했다. 몸은 불편하지 않았지만 걱정은 배고픔이었다. 사탕을 주머니에 모두 챙겨 넣고 걸었다. 

바람은 여전히 드셌다. 이따금 사람들이 우리를 앞질렀다. 그들 중엔 어제 장터목산장이 만원이라 세석산장으로 밀려난 이들도 있었다. 다시 되돌아가는 셈이다.

몇 년 만에 지리산 자락에 발을 묻은 때는 이틀 전이었다. ‘말’ 지 취재와  지리산 등산을 겸한 발길이었다.


취재는 12월 30일 밤에 피아골 산장에서 진행했다. 피아골 신장에 도착한 지 10여분 후, 산장지기인 함태식 선생과 마주했다. 일반인들에겐 공개되지 않는 주방이었다. 태양열 전기시설에 가스렌지도 있고 중앙엔 장작난로도 놓였다. 식사를 바로 마친 식탁에는 몇 가지 반찬과 함께 소주가 놓였다.
취재는 술을 마시면서 이뤄졌다. 간간이 술잔이 돌면서 두어 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를 끝내고는 산장지기를 도와 산장 불목하니로 머물던 칠당이란 이와 한 잔 더 하게 됐다. 밤 11시 무렵, 칠당이 마련해 준 담요를 깔고 지리산 자락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12월 31일 아침 7시 40분쯤 잠에서 깼다. 아침을 얻어먹고 본격적인 산행에 나섰다. 취재도 끝난지라 그야말로 가뿐한 산행이었다. 실상사로 간다는 칠당의 도움을 받아 용수암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숨을 헉헉거리고 오르던 임걸령을 비켜가는 길이었다. 한 시간 정도 앞당겨 삼도봉에 갈 수 있는 길이라 했다.


피아골 계곡의 바위를 따라 한 시간 정도 오른 후 산자락으로 붙었다. 숨이 차올랐다. 헉헉거렸다. 식사가 부실했나. 어제도 밥을 한 끼 밖에 먹지 못했다. 어제 술기운인가. 믿을 것은 쵸콜릿과 사탕뿐이다. 이러다 죽겠구나 생각할 쯤에 눈에 익은 주능선 길이 앞에 펼쳐졌다. 


12시. 삼도봉에서 천왕봉을 향한 산행은 시작됐다. 하늘은 어느 가을하늘 부럽지 않게 파랗다. 구름 한점 없었다. 천왕봉과 촛대봉이 삼도봉에서 지척인 듯 가까왔다. 뒤로는 노고단도 저만큼에서 깨끗했다. 문제는 바람이 었다. 주능선에 오르자, 얼굴을 곧바로 치고 밀려왔다. 화개재에서 칠당과 이별하고는 토끼봉을 향했다. 배는 고픈데 달리 먹을 게 없었다. 간간이 사탕을 깨물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삼도봉을 떠난 지 세 시간이 덜돼, 드디어 연하천산장에 도착했다. 무엇보다 식사가 급했다. 선배가 사 온 햇반이 있어, 일단 물부터 끓였다. 라면도 끓이고 어제 사 온 고기도 구워먹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30분이 다 되어도 물이 끓지 않았다. 확인해 보니 부탄가스가 얼어버렸다. 물 끓기를 기다리다 손가락도 어느새 얼어 버렸다. 제자리에 서 있으니 땀이 식어 추위가 달라붙었다. 발에도 땀이 차 양말도 젖어 버렸다.


겨우겨우 밥을 먹고 4시 30분에 벽소령산장으로 향했다. 벽소령에 가기 전에 이미 해는 질 것이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6시에 벽소령에 도착하고 보니 어둠이 깃들었다. 산장에서 몸을 녹이며 일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했다. 계속 걷는다면 어둠 속에서 세 시간 동안 바람을 맞으며 가야했다. 선배는 다시 배낭을 멨다. 일단 가보자고 했다.


야간산행의 발길은 보름을 이틀 앞둔 달이 환하게 밝혀줬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다. 여전히 바람은 거칠게 불었다. 옷을 좀더 여미는 것밖에 달리 대책이 없었다. 콧물이 입안까지 흘러도 손도 까딱하지 못했다.

그때 선배가 말했다.

“길을 가는 게 아니라 ‘걸어가지는 것’이다. 빨치산들이 산 속에서 산 게 아니라 살아진 것처럼.”


선배는 나보다 걸음은 느렸지만, 꾸준했다. 함께 느리게 걷다보면 둘 다 쳐지게 마련인지라, 나는 앞에서 잰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다 선배가 가까이 오면 다시 앞서기를 반복했다. 이끌기였다.

바람소리를 잊고 나면 밤길은 호젓했다. 문득문득 달빛이 그려내는 밤의 정취가 눈길을 붙잡았다. 멀리 산촌의 불빛들도  간간이 숲 사이로 드러났다. 반가움보다는 외로움을 더 지폈다. 얼마나 깊은 산 속을 걷고 있는지만 확인할 뿐이었다.


밤 8시. 선비샘 터를 지난 산길에서 한 사내를 만났다. 그는 몸을 움츠린 채 길가에 앉아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40대 전후로 보이는 그는 다리에 힘이 빠져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했다. 한 30여분을 그렇게 자리에 앉아 깜박 졸았단다. 그는 그곳에 텐트를 치고 잘 거라고 했다.

‘죽을 수도 있다.’

바람이 무척 매서웠다. 그 사내가 믿는 것은 오직 오리털침낭 뿐이었다. 텐트 밑에 까는 깔판도 잃어버렸고, 옷도 입고 있는 게 전부였다. 그는 텐트를 치고 버너를 지피면 좀 낫지 않겠냐고 했다. 텐트를 칠 거면 바람을 피하라며 등선 주변을 서성이다 좀 나은 곳을 일러줬다. 그러나 역시 안심이 되지 않았다. 짐을 이곳에 숨겨두고 그냥 몸만 가라고 권했다. 십리 정도 가면 세석산장이 나올 듯 싶었다. 그러나 그 사내는 기어이 텐트를 치겠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이름과 핸드폰 번호만 적었다. 길가에 막대기 두 개를 걸쳐, 그 장소를 표기해 두고 그와 작별했다.

세석산장에는 밤 9시 30분에 도착했다. 산장 관리인이 우리를 보자 도중에 만난 사내에 대해 물어왔다. 119구조요청이 들어왔단다. 나는 배낭도 풀지 못하고 약도를 그리며 상태를 설명했다. 걸쳐 둔 막대기도 일러주었다. 10여분 후 구조대원 두 명이 출발했다.

선배와 함께 사발면을 사 먹고 과자도 샀다. 산장 관리인은 촛대봉에서 새해 일출을 보려면 7시쯤에는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선배랑 그쯤에 일어나기로 하고 잠이 들었다.


“천왕봉까지 가자”

전날의 피곤함에 침가지 흘리며 자고 있는데 선배가 깨웠다. 3시랬다. 다리에 가래톳이 나서 걸음도 불편한 선배가 그렇게 내 나이 서른의 첫날 아침을 일으켰다.

‘까짓 것 그리지 뭐.’

어둠 속에서 짐을 꾸리고 쵸코파이만 한 개 먹었다.


1999년 1월 1일 새벽 3시 30분. 내 나이 서른살을 맞이한 첫날의 새벽산행에 나섰다. 7시 30분에 해가 뜨니 그 시간까지는 청왕봉에 가야 했다. 바람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이따금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앞질러 걸었다. 세석산장에서 출발 한 지 2시간 40분 만에 장터목산장에 도착했다. 그곳에 배낭을 부려 두고 카메라만 들고 천왕봉을 향해 나섰다. 오르는 길에 여명이 서서히 밝아왔다. 동녘은 노랗게 빨갛게 물들었다. 


‘저러다 불쑥 해가 솟아버리면 어쩌나’

일출을 20여 분 남겨둔 곳에서는 사람들이 밀려 줄을 서 올랐다. 드디어 천왕봉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출을 볼 만한 자리엔 먼저 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다. 선배와 함께 바위난간에 매달리다시피 하고선 일출을 기다렸다. 서른의 첫날, 첫 해돋이를 보기엔 날씨는 완벽했다. 하늘엔 구름한 점이 었었다. 오래지 않아 해가 쏟았다. 짐작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수평선. 그 선을 해는 순식간에 타 넘었다. 비로소 첫 날이 열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모두들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밤새 어둠과 바람에 부대끼던 나무들도

빈 가지 들고 산등성이로 오르고

바다 깊숙이 잠자던 섬들도

아슴아슴 고개 들고 물위로 떠올랐다.

하늘은 애써 가쁜 숨을 죽이며

홍조빛 얼굴로 수평선, 지평선을 부추겨 깨웠다.

별들과의 은은한 만남을 접고    

서녘 어디매로 사라진 보름달이 내 준 빈 하늘, 그 동녘에서

어 

해가 뜬다.

세상을 깨우는 소리가 들린다.


첫 햇살이 지리산 천왕봉에 닿으니

비로소 새해 새 아침이 열린다.

새 하늘이 열린다.

그 하늘에 감싸인 산줄기들이

나머지 햇살을 받아 더 큰 세상을 연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온전히 몸을 바쳐야 했다.


바람이 얼굴을 들이칠 땐 차라리 가슴을 내주고

언 땅에 맥없이 발이 미끄러질 땐 두 무릎을 굽혀 

한 걸음이나마 내딛었다.  

땅에 박힌 채 어둠과 싸워

몸을 드러낸 돌들을 발판 삼아

어둠을 올라야 했다, 바위를 넘어야 했다.

장터목에서 세석평전에서 백무동에서 치밭목에서

멀리서 온 걸음일수록

더 차갑고 더 깊은 어둠을 내딛으며 오른 천왕봉

어 

해가 뜬다.

사람을 깨우는 소리가 들린다.


곧게 뻗은

한 햇살이

바위 난간에 매달린 사람들의 얼굴에 맺히니

비로소 

지친 몸뚱이에 밝은 웃음이 퍼진다.

언 입가에서 함성이 터져 더 많은 사람을 깨운다.

사람이 만든 인봉(人峰)이

지리산 한 봉을 이뤄 보다 높은 산이 된다.


 

일상처럼 

하루해가 솟았다 말하지 마라.

몇 백일을 감싸던 구름마저 비켜서지 않았더냐.

어느 풀뿌리 하나에게도 내 주지 않던 봉우리를

새벽부터 사람들에게 내어주지 않았더냐.


잠깐이면 마칠 그 솟아오름을

밤새 애태우던 이들의 가슴엔 차마 못 담아

그냥 빈 하늘에 맡겨 두지만,

세상을 만드는 것은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깊이 고인 사람의 마음이라는,

첫 햇살의 뜻만은

긴 자락 펼쳐 품안에 안은 지리산이 알고 있다.

결코 넘지 못할 산을 오른 사람들이 알고 있다.


누구보다 먼저 들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높은 곳에서 굽어보려는 오만함도 아니다.

오로지 

속세를 뒹굴던 손이나마 먼저 내밀고 싶을 뿐이다.

들이밀지 않고 살며시 다가서는 햇살의 여유에서

잠시나마 

어느 산자락에도 걸치지 못한 생활을 다독이고 싶을 뿐이다.


어제처럼 

오늘이 시작됐다 말하지 마라

세상을 깨우는 소리를 듣고

새 세상을 열려는 새사람들이 있는 한



매일 뜨는 해지만, 오늘은 내 서른 살의 첫 아침을 밝힌 의미있는 해였다. 스물아홉의 마지막 날, 한파를 헤치고 부지런히 발길을 내디딘 보람은 일출을 본 것으로 충분했다. 3대가 공적을 쌓아야만 맞이할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인데 운 좋게도 이번이 두 번째였다.



장터목산장으로 되돌아와서는 곧장 백무동쪽으로 하산했다. 산장에 사람들이 밀려들어 아침을 지어먹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백무동에 다다라 선배가 마음에 익숙한 얘기를 꺼냈다. 

“살다가 한 번 쯤은 깨지고 살아야 된다. 그래야 힘들어도 지치지 않는다. 이렇게 고생하고 나면 힘이 나기도 하고….” (19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