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앞에 두 권의 소설책이 있습니다. 열흘 전쯤 서점에 들렀습니다. ‘서른 살'을 제목에 담은 책은 무턱대고 모두 구입했지요. 그날부터 틈틈이 책장을 넘겼습니다. 뒤적거림. 그것은 서른 살을 맞은 제 삶의 현재이기도 했습니다. 담담함 밖에 보이지 않는 서른 살 일상을 무너뜨리려는 작은 꿈틀거림이었습니다. 무모하게 책을 구입했듯이 말이지요.
아무튼 지금 두 권의 책을 두고 이 글을 씁니다. 이 책들에는 제 나이 또래들이 여러 명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책들에서 당신을 만났습니다. 당신은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이더군요.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이라 부르는데, 소설 안의 사람들은 당신을 ‘결혼’이라고 부르더군요. 다만, 이젠 ‘결혼’이란 그 이름이 그리 낯설지 않더군요. 저도 이제 서른 살이니까요.
소설을 읽으며 우울했습니다. 당신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당신을 품은 사람들이 불안해 보였습니다. 저마다 가슴속에 당신이 엮은, 스스로 풀지 못한 매듭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 매듭엔 결코 녹록치 않은 서른이란 세월이 얹혀 졌더군요.
소설에는 이런 이가 있었습니다. 지주의
아들. 서른 살인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무렵 그 주위엔 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집안의 딸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서 당신을 찾았습니다. 빈민과 노동자를 무산계급이라는 연대의 끈으로 묶고는 결혼이라는 새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곧 당신은 불행해지더군요. 당신을 찾았던 그는 이데올로기가 붕괴하자 여인을 버렸습니다. 여인은 당신을 오지에 남겨 두었습니다. 버거웠겠지요. 너무 쉽게 허락해버린 결혼이. 이데올로기만으로 맞이하기엔 당신 안에 여린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당신은 그리 쉽게 사람들을 묶어 버리나요? 그 소설에서 그들 남녀를 만나고 나서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사람들을 눈멀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투쟁도 아니고, 자본도 아닙니다. 더욱이 이데올로기도 아닙니다. 당신 스스로가 존재이유입니다. 당신은 철저히 생활에 기대어야 합니다. 생활은 당신의 생명력을 강하게 해 주는 힘입니다.
당신이 생활을 애써 외면해 버리면 당신의 또다른 분신인 결혼도 사람에게 외면당하게 마련입니다. 당신이 수단이거나 전리품이 돼버릴 때 당신은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따라서 당신이 생활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결혼에 인색해야 합니다. 그게 당신을 윤택하게 가꾸는 방법입니다. 당신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소설에서 또 이런 사람도 만났습니다. 남편과 “건조한 섹스”를 하고 아이를 돌보고 가게 일을 꾸려 가는 서른살 된 한 여인이 있더군요. 그 여인은 무료한 일상에 지쳐 독백하더군요. “서른 살이란 아무도 돌아나간 적이 없는 긴긴 동굴 같다”고. 정말 무료했었던 것일까요. 그녀는 예순 번째 맞는 아버지의 생일날, 잔치에 내려가던 길에 그 무료한 일상에서 탈출하지요. 어릴 적 바라보기만 했던 산을 오르면서요.
당신을 결혼이라고 부른 또 다른 서른살의 여인은 그런 무료한 일상에서 외치더군요.
“탈출구가 없는 서른의 나이가 나를 돌게 만들어! 내가 무능해서 그렇다구? … 내가 무능하게 된 것은 내 탓만은 아니야. 그렇게 만든 더 큰 괴물 같은 것들이 있다구.”
두렵지 않나요. 결혼이라고 불렀던 당신을 혹시 ‘괴물 같은 것’이라고 부르지 않나 해서요.
두 여인들 모두 당신을 결혼이라고 부르고 나면 행복할 줄 알았나 봅니다. 당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 줄 모르고 생각한 것이겠죠. 결혼이란 늘 비싼 대가를 치르니까요. 원하진 않겠지만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가두어 버리잖아요. 아니, 당신이란 이상하게도 새 이름으로 부르면 그 부르는 이들마저 구속해 버리잖아요. 그러니 그렇게 자기를 닫고서 당신에게 매달리지요. 애원하듯이. 편안했던 당신이 구속이 되고 마는 그 이면이 어쩌면 당신의 참모습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런 얘기를 속 시원히 드러내놓고 하지 못하고 있지만. 물론 그렇게 ‘양심선언’을 해 버리면 당신은 결혼 이전의 모습마저도 지워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서른살이 감내하긴 쉽지 않죠. 두렵기까지 하니까요.
하지만 소설 안의 여인들이 결국 제 길을 가듯이, 서른 살엔 닫고만 살 수 없지요. 당신이 생활이어야 하듯 그 생활은 세상과 호흡하며 그 자체니까요. 그러니 당신이 버거워지는 것이지요. 그 안에 갇혀 당신의 원초성 마저 잃어버리는 서른 살의 삶 때문에.
다시 말합니다만 서른살 사랑, 당신은 결혼에 인색해져야 합니다.
혹여 궁금해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제가 당신에게 이처럼 야멸차게 대드는지를 말이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소설 안의 사람들처럼 저 역시 서른살이고, 당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제가 ‘여친’이라 이름지은 이를. 당신을 당당히 ‘결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애인’이라 불러도 좋을 그이를 말입니다.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당신에게 인색하게 굴었는지. 그리고 여친이 나타났을 때, 제 마음에 당신이 얼마나 크게 자리 잡았는지.
하지만, 저는 소설 안의 사람들처럼 당신을 무턱대고 결혼이라고 부를 마음은 없습니다. 당신을 붙잡아두는 길이 결혼밖에 없다는 것도 다시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서른살은 제가 당신을 제대로 만나는 때입니다. 당신을 결혼이라 부르는 때가 아니라, 여전히 사랑이라고 부를 때입니다. 때론 큰 싸움도 감내하며, 가끔은 작은 짓들에서 당신의 애티를 볼 수 있을 겁니다. 그것들을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서른의 키만큼 쌓을 때입니다. 소설 안의 사람들처럼 마음에 매듭이 생기지 않으려면 그래야 합니다. 그게 더 깊이 더 오래 더 가까이 당신을 붙잡아두는 방법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제 나이 마흔이 되어서도 당신에게 이런 얘기를 할지는. 다만 그때까지 저는 묵묵히 제 길을 가며 당신에게도, 여친에게도, 세상에게도 열 것들은 열어두고 살렵니다. 그때쯤엔 어지간히 생활에 기댄 당신의 모습을 만나면 좋겠군요. 사랑이든 결혼이든.
밤이 깊어버렸습니다. 창문 틈을 채운 기운이 어느새 어둠보다는 빛을 많이 드러내는군요. 이제 두 권의 책을 덮어야겠습니다. 제 서른 살의 하룻밤을 새운 두 권의 책이름이나 알려 줄까요. 혹시 저처럼 덤덤하게 서른살을 맞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지요. 9인 소설집 <서른살의 강>(문학동네)과 소설가 공선옥씨의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삼신각)입니다.
이제 책을 덮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덮여지지 않는 게 있군요. 제 삶의 뒤적거림. 십여 년을 해 온 이 몹쓸 장난 같은 짓들이 오늘밤 따라 유난히 끈적거립니다. 당신과 저의 첫 만남처럼. (1999.1)
<사진 설명>
소설가 공선옥씨의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삼신각)과 9인 소설집 <서른살의 강>(문학동네)의 표지를 일부분만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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