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턴
회사에 두 달 계약으로 새로 들어온 인턴이 있다. 올해 4학년 되는 여학생이다. ‘빙그레 쌍년.’ 웃으면서 할 소리는 다 하고 살아서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란다. 그런데 이 친구와 언젠가부터 ‘단짝’ 돼 버렸다. 순전히 근무하는 자리 위치 때문이다.
인턴이 내 옆 자리에 앉게 되니 자연스레 수다가 오간다. 회사에 궁금한 것도 내게 묻고 가끔 웃기는 얘기라며 들려준다. 요즘엔 ‘천하무적 홍대리’ 만화를 보고는 얘기해 준다. 회사에서 벌어지는 상사와의 관계 등을 다룬 만화인데, 자기 생활하고 똑같단다. 들어온 지 보름도 안 돼 회사생활을 익혔다니 조금 믿기진 않지만.
며칠 전엔 신간안내 기사의 초교지에 뻘겋게 그려진 교정을 보고 투덜거리더니, 오늘은 퍼즐기사에 그려진 초교지를 보고 투덜댔다. 키는 멀대처럼 큰 녀석이 투덜대는 거도 재밌다.
그런데 이번엔 울먹이는 수준까지 갈 상황이 벌어졌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내가 난감해졌다. 데리고 나가 자판기차라도 한 잔 사주면 좋을 것도 같은데, 열심히 머리 굴리다가 간접 방법을 쓰기로 한다. 마감에 바쁜 미술부로 가서 상황을 얘기하고 좀 달래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잠시 후 미술부 선배가 음료수를 하나 뽑아다 줬다. 그 이후 녀석의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훗날 인턴에게 얘기를 들었는데, 선배가 음료수 놓고 갈 때 눈물이 절로 나더라나.
나로서는 잘 대해주려 한다. 지난번 그만 둔 인턴은 사무실 사람들이 너무 사람을 챙기지 않는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적어도 이 친구에겐 그런 얘기를 듣지 않아야 할 듯 싶다. (1999.1.15.)
여전히 모자란 기사쓰기
1월 18일 아침 10시다. 오늘부터는 다시 긴 ‘방학’이다. 어제 1차 필름 교정을 보고 새벽 1시쯤 들어왔다. 다른 기자들은 어제도 밤샜다. 아마 오늘 오전쯤 모든 원고가 마무리될 것 같다. 이제 마감후기를 쓴다.
2월호엔 특별히 어려운 기사는 없었다. 대부분이 인터뷰기사였다. 피아골 산장지기 함태식(4쪽), 대학가스타(2쪽), 김진균 교수 인터뷰(2쪽), 문화현장(2쪽). 미리 보는 책(6매), 말이 만난 사람(2매).
이 가운데 함태식 선생 인터뷰가 조금 어려웠다. 애초 기사를 8일 이전에 넘기려 했는데, 틀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 취재하면서 처음으로 녹취까지 했는데 형식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이럴 땐 방법이 없다. 그냥 머릿속에 버려둔다. 이 생각이 마감에 쫓겨 그런 대로 모양을 갖추면, 그때야 다시 끄집어내 쓴다. 이번 산장지기 기사도 그렇게 한 사흘을 버려두었다.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느낀 문제는 기사 형식들이 엇비슷해진다는 거였다. 준데스크가 원하는 게 현장성이다 보니 꼭 기자가 개입한다. 예를 들면, ‘기자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었다’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 자체로 기자의 시각을 담아 낼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은데, 형식이 비슷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기사의 형식도 제대로 기획되어야 제값을 받을 수 있는 시대인데,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내 색깔을 잃어버릴 것이다.
인터뷰 기사를 작성하면서 매수에 따른 변화에 적응하는 것도 풀어야 할 과제다. 200자 원고지 30매 짜리 인터뷰는 지금까지 2꼭지 정도 썼다. 일단 신문인 캠라와는 달리 잡지에 쓰는 원고는 분량이 길다보니 변화가 필요하다. 호흡도 달라야 하고, 구성에서도 느슨해지기 쉬워 그만큼 긴장감도 필요하다.
인터뷰 할 때 도발적인 질문법도 배워야 한다. 그동안에는 좋은 의미의 사람소개다 보니, 그런 질문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문제되는 인물을 인터뷰한다면 다소 비판적인 거리를 두는 것도 해봐야 할 취재법이다.
2월호 기사에서 취재기사가 없는 것은 기획안의 부재다. 애초 기획에서는 무료병원을 잡았다. 서울방송 뉴스에서 잠깐 언급된 것이었는데, 병원비를 받지 않고 의료보험비만으로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며칠간 전화 취재를 했다. 대전방송에 전화해 담당기자의 얘기를 듣고 가닥을 잡았는데, 알고 보니 전국에 1백여 개가 넘게 그런 병원이 있단다. 처음 생긴 때도 적어도 3~4년은 되었단다. 그래서 취재하는 것을 중간에 접었다. (1999.1.18.)
쓰레기통 된 냉장고
일요일, 모처럼 잘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8시가 넘었다. 회사에는 10시 정도까지 가면 될 듯 싶다. 방바닥이 따뜻하다. 역시 몸을 지지는 게 좋다. 이틀 전부터 침대에서 내려와 방바닥에서 잤다. 아침에 일어나면 방바닥이 따뜻하고 몸이 좀 풀어진 듯하다. 예전엔 못 느끼던 기분이다. 그동안 겨울인데도 평소엔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서야 켠다. 그것도 최근이다. 예전엔 웬만하면 그냥 잤다. 습관에 기댄 삶의 방식이다. 고집스레 밀고 나가는.
내방 꼴이 말이 아니다. 가장 결정타는 역시 수돗물이다. 여기에 <말> 마감일이 겹쳤다. 12일 밤을 새고 난 후 내 원고는 일단 끝났다. 나머지는 교정보는 것 정도면 됐다. 다른 기자들은 아직 마감이 안 끝났다. 그래서 다른 기자들의 기사 교정을 거들었다.
마감 땐 밤을 지새기가 일쑤인지라, 그냥 이번 주는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살았다. 그래도 밤 11시 정도면 퇴근해 12시에는 집에 도착했다. 피곤한 것 같은데 바로 잠이 오지 않는다. 그냥 누우면 잘 것 같은데 눕기가 싫다. 뭐 이렇게 살아야하나 싶으면 은근히 화가 난다. 그래서 컴퓨터를 켠다. 그리고는 몇 글자라도 자판기로 뚝딱거린다. 그밖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냥 방에 몸만 부려 뒀다가 아침에 새워서 들고 나온다. 그러니 방이 어수선할 수밖에.
며칠동안은 집에 오자마자 수도꼭지부터 돌렸다. 물이 찔끔거린다. 아직 다 녹지 않았다. 물이 깨끗하지 못하다. 받아 두면, 밑에 흙같은 침전물이 생긴다. 다행히 한 일주일 동안 집에서 물을 먹어본 적이 없다. 머리 감는 데만 물을 쓴다. 요 며칠은 머리도 격일로 감았다.
집에서 밥을 먹어본 지도 일주일이 넘었다. 밥솥엔 2인분 정도의 밥이 썩고 있다. 겨울이라 부패가 ‘서서히’ 이뤄진다. 버려야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종량제 봉투를 다 채울 쓰레기가 있을 때까지는 내 방에서 대기 상태로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가끔 냉장고가 쓰레기통이 된다. 부패된 음식물을 얼려 둔다. 밥은 내일 정도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999.1.18.)
김광석을 듣다
김광석. 김광석 추모 몇 주기가 되나보다. 추모콘서트도 한단다. 그의 노래에선 잔잔한 삶의 냄새가 난다.
그래서 서른에도 <서른 즈음에>를 들을 수 있다.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지만, 그의 노래는 <나의 노래>처럼, <거리에서> 불린다. 세상을, 삶을 <사랑했지만> 떠날 수 있는 힘. 어쩌면 그가 꿈꾼 세상엔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밤새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세상. <그날들> 속엔 <나른한 오후>에도 <혼자 있는 밤>에도 세상을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 그가 즐겨 읽었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보내는 <이등병의 편지>.
그 안엔 <그대 웃음소리>를 <꽃>처럼 듣다가도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하는 충고도 남아있다. 그는 지금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말한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사랑이라는 이유로> <기다려 줘>라는 부탁도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말하지 못했다고. (1999.1.19.)
다시 침묵
사귄 지 2년. 나이 서른, 서른 하나. 이쯤 되면 결혼해야 한다고 말해야 하나. 그래서인가. 답답해진다. 9시가 조금 넘어 야근이 끝날 쯤해서 전화가 왔다. 내가 부탁한 전화였다. 몇 마디 얘기하는데 바쁘단다. 결국 얘기하다가 내가 화를 냈다. 어쩌자는 거냐고. 서로가 바쁘면 평생 안 보는 거냐고. 알아서 하라고. 그러고 나니 또 미안해진다. 지금 보러 간다고 해도 다음에 보자고 하고. 그러면서 모레 전화한단다.
정말 이럴 땐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굴뚝같다. 뭐 얼굴이라도 봐야 얘기하고, 사태를 정리하든가 말든가 하지 전화로는 도저히 갑갑해서 말을 못하겠다. 어찌 생각하면, 내가 맘 편하게 며칠 지나면 화가 풀리겠지 하고 기다리면 되는데, 내 성격이 모나서 그러지도 못한다. (1999.1.19.)
일주일간의 술자리
일주일에 걸쳐 술을 마시고 있다.
월요일, 여친과 마신 술.
회기동 채원극장에 가서 ‘미술관 옆 동물원’과 ‘풍운’을 보았다. 채원은 5천원에 두 프로를 상영하는 극장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근처 술집으로 갔다. 치킨과일을 시키고 맥주를 마셨다. 그 자리에서 몇 가지 얘기를 했다. ‘결혼’과 관련된, 늘 결론도 없이 변죽만 울리고 마는 얘기지만. 일단 나로선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들은 모두 해줄 심산이었다. 나중에 어떤 판단을 하더라도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으면 오해는 없을 것이란 생각에. 이날 영화비는 내가 내고 술값은 여친이 냈다. 내 한 달 수입을 빤히 아는 지라 그렇게 산다.
화요일, <말> 사회팀과 마신 술.
6시에 사무실 근처 카스타운으로 갔다. 선배 생각 같아선 감자국에 소주가 좋을 것 같았는데, 나를 포함해 젊은 친구들이 있다보니 맥주집으로 갔다. 자연스레 저녁은 생략됐다. 그런데 실상 돈을 아끼겠다고 한 이 전술은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다. 자리가 끝나고 계산을 하려는데, 시킨 안주가 대여섯 개는 되었다. 무척 비경제적인 술자리였다.
이 자리에서는 나를 비롯한 계약직 근무자들에 대한 얘기들이 가볍게 오갔다. 선배들로서도 신경만 쓰일 뿐,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보니 서로 그 일은 서먹하기만 할뿐이다.
술자리 종반엔 <말>의 위상에 대한 얘기들이 오고 갔다. <말>의 지형을 그대로 지키자는 주장도 있었는데, 나로선 눈높이가 필요한 것 아니겠느냐고 얘기했다. 이 문제는 끊임없이 지속될 문제인 듯 싶다.
수요일, <말> 동기들과 마신 술.
<말> 입사 동기는 모두 넷이다. 10월 말, 환영회 술자리에서 한 번 보고는 모두 함께 모여 술을 마실 기회가 없었다. 셋이 보름 근무를 하다보니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날을 잡은 것인데, 이날도 결국은 한 명이 빠졌다. 어제 데스크와 밤 2시를 넘기면서까지 술을 마신 동료 기자가 술자리를 미루자는 얘기를 계속했다. 다른 동료는 강행하자는 분위기. 결국 절충안으로 7시에 종로에서 하자는 술자리를 5시에 마포로 옮겼다. 장소도 삼계탕집. 술집에 들러 각자 황기삼계탕을 시키고 소주를 마셨다.
3월호 기획안에 대한 얘기가 있었고, 동기들이 좋다는 한 동기의 듣기 좋은 소리와 근무환경에 대한 얘기도 약간 곁들여졌다. 술자리에 오른 수다거리가 회사를 벗어나는 게 쉽지 않았다.
푸짐한 삼계탕 안주에 소주 세 병을 비웠다. 각자 9천원씩 걷어 계산을 하고 나온 시간이 7시 30분. 어제 술 마신 동기는 집으로 가고 다른 동기가 나를 유혹한다. 종로에서 중학교 동기들 만난다고 2차를 한 잔 하잔다. 결국 종로로 가서 술자리에 함께 앉았다. 10시쯤 나만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목요일, <말> 정치팀과 마신 술.
애초 우리팀이 아니라 분위기가 조금 잡히면 슬쩍 낄까 생각했는데, 정치팀이 다 모이지 않았다. 나는 30여 분쯤 뒤에 술자리에 참석했다. 마포에 있는 술집에서 매기매운탕을 먹었다. 역시 정치팀이라 한 시간 가까이 정치얘기만 오고 갔다. 나는 멀뚱히 앉아서 듣기만 했다. 이윽고 선배가 사적인 얘기들을 풀어놓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밤 9시에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제 함께 마신 동기가 버스안에서 다시 유혹한다. 하지만 오늘은 안되겠다 싶어 거절하고 집으로 갔다.
금요일, 다시 여친과 마신 술.
그 동안 소원해진 관계회복을 위해 연애 생활에 주력해야 했다.
내일 다시 마실 술.
대학교 학과 동문들로 구성된 <백두산> 모임이니 어찌 술을 그냥 비껴 갈 수 있으리오.(1999.1.29.)
감성시대
백두산 모임. 두어 달 동안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이러다 모임 깨지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오늘은 그런 대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10명이 모였다. 석 달 정도 미뤄 온 99년도 산장 선거를 했다. 대진이가 당선됐고, 나는 총무를 계속하게 됐다. 은실누나 말마따나 총무가 되지 않더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은 여전했다. 아마 그 이상의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올해는 과도기가 아니던가. 조직이 변화할 때 중심을 잡지 못하면 그대로 넘어진다. 그것을 막아야 한다. 아울러 올해는 단 한 명이라도 백두산 여행을 갈 수 있도록 모임이 도와주는 것도 중요한 거다. 그게 애초의 표면적인 목표였으니까.
새벽 세 시다. 이제야 집으로 돌아왔다. 7시에 모임을 시작했는데, 3차 노래방까지 가고 보니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중간에 훌쩍 도망 나올 수도 있었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모두들 외로워하고 있었으니까. 무엇인가 해야 할 얘기들이 많았는데, 그 얘기 대신 노래만 불렀다. 마치 노래가 모든 것을 대변해 줄 것처럼.
‘감성을 죽이고도 21세기가 찾아올까?’
노래방에서 든 생각이다. 사람들이 선곡하는 노래를 들으며, 내가 선곡한 노래를 부르며. 우리들은 술의 깊이만큼 감성적인 노래를 불렀다.
어느 선배는 그런 감성을 비판한 조직이 싫다고 했다. 무척 철저하게 조직된, 계획된 삶을 살았다는 그 선배가. 가끔은 그 선배의 감성적인 모습을 보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고백 같은 그 말을 떠올리게 된다. (199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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