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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파트 재계약의 조건 84년 남원에서 서울이란 낯선 도시로 우리 가족이 이사 왔을 때, 첫 터전이 상계동이었다. 당시 지금의 상계역 근처엔 기와집들이 즐비했다. 우리 식구가 살 집은 방 두 칸짜리 전셋집으로 250만원이었다. 그 후 지하철 4호선이 들어선 상계동은 ‘상계동올림픽'이라는 철거민의 역사를 뒤로 한 채 곳곳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터전에 살던 원주민들은 철거에 밀려 쫓겨났지만, 우리 식구는 아파트들이 형세를 넓힐 때마다 밀리고 밀리면서도 단독주택을 찾아 이사했다. 매년 전세값은 올랐지만, 용케도 부모님은 빚지는 일없이 개발의 파편들을 묵묵히 피해갔다. 그런 우리 식구들에게도 그 개발의 혜택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마침내 아파트 건설 바람은 우리가 살던 전세집에도 불어왔다. 곧장 쫓겨날 처지였지만 그래도 얻.. 더보기
병문안의 목적 “처남? 아직 제주도야?” 지난 2월 19일 제주인권학술회의(2001) 마지막 날 오전. 큰 매형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예, 오늘 저녁 때 올라갈 것 같은데요. 왜요?” “응, 아냐. 올라오거든 나한테 전화해 줘.” 평소에 우리 집 큰 아들 몫을 톡톡히 하는 큰 매형의 전화는 그렇게 간단히 끝났다. 그런데 전화 뒤끝이 이상했다. 평소 연락이 잦았던 것도 아닌데, 단지 내가 제주에 있다는 것만을 확인하려고 전화를 했을 리는 만무했다. 궁금하던 차에 점심 무렵, 큰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대신 조카가 받았다. “엄마 지금 없어. 할아버지 입원한 병원에 간다고 가셨는데….” 짐작이 맞았다. 아버지에게 뭔 일이 있었던 거다. 전화를 끊고 동생과 통화하고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1.. 더보기
“벌써부터 자식들 신세져서 쓰것냐?” 며칠 동안 쌀쌀한 날씨였다. 여전히 얼어붙은 눈들이 곳곳 응달진 골목에 남아 있어 외출하기엔 쉽지 않아 보였다. 지난해 10월. 새벽 4시 무렵에 어둠 속에서 전화가 울렸다. 아버지가 호흡을 하기 힘들다며 전화를 거셨다. 곧장 옷을 챙겨 입고 혜화동에서 택시를 타고 상계동으로 향했다. 택시는 어둠 속을 헤치며 빠르게 달렸다. 마음은 평안했지만, 그러나 그 평안한 틈틈이 여러 생각들이 잔파도를 일으켰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도 불현듯 스쳐갔다. 타고 온 택시를 잠시 세워두고 집에 도착해 보니 아버지는 아랫배가 통통하게 불러 있었다. 주섬주섬 옷을 입히고는 택시를 탔다. 그 길로 상계동 백병원 응급실로 갔다. 그것이 병원생활의 시작이었다. 응급실 직행 후 이뤄진 입원은 며칠 만에 끝났다. 그러나 며칠 후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