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남? 아직 제주도야?”
지난 2월 19일 제주인권학술회의(2001) 마지막 날 오전. 큰 매형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예, 오늘 저녁 때 올라갈 것 같은데요. 왜요?”
“응, 아냐. 올라오거든 나한테 전화해 줘.”
평소에 우리 집 큰 아들 몫을 톡톡히 하는 큰 매형의 전화는 그렇게 간단히 끝났다. 그런데 전화 뒤끝이 이상했다. 평소 연락이 잦았던 것도 아닌데, 단지 내가 제주에 있다는 것만을 확인하려고 전화를 했을 리는 만무했다. 궁금하던 차에 점심 무렵, 큰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대신 조카가 받았다.
“엄마 지금 없어. 할아버지 입원한 병원에 간다고 가셨는데….”
짐작이 맞았다. 아버지에게 뭔 일이 있었던 거다. 전화를 끊고 동생과 통화하고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18일 아침, 아버지는 배가 아프다고 동생에게 연락했다. 내가 서울에 있었다면, 나에게 했을 터인데 아버지도 내가 제주도에 간 줄 아셨다. 동생은 다시 둘째 매형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를 모시고 상계백병원으로 갔다. 응급실에서 진찰한 의사는 맹장이 터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그 병원에는 입원실이 없어서 다시 30여분을 달려 위생병원에 입원했단다.
집에서는 제주에 있는 내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맹장수술이 그리 큰 수술도 아니고, 내가 제주에 머물고 있으니 서울로 오면 얘기해도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지난해 수술한 이후, 나는 혹시나 싶어 매시간 핸드폰을 잊지 않고 챙겼다. 제주에 가 있는 그 며칠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니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그 틈을 노렸나 싶었다. 무엇이든 예비하고 살자는 내 다짐을 시험하려는 듯이 이렇게 일이 벌어진 게, 내가 잠시 서울을 비운 사이로 그 일이 비집고 들어온 게 오히려 나를 담담하게 만들어 버렸다.
저녁 7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 길로 곧장 지하철을 탔다.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맹장수술이라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국철 회기역에서 내려 위생병원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달리 병원까지 가는 교통수단도 마땅치 않아 20여분을 걸었다. 야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 병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내린 어둠이 발길에 채였다. 씁쓸했다. 예순을 넘은 몸이 병원에서 퇴원한 지 반 년도 안 돼 다시 병원신세를 졌다.
개량한복을 입은 채로 병실로 들어서니, 여섯 명이 쓰는 병실 창가 쪽에 아버지가 입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계셨다. 훌쭉해진 얼굴로 나를 아는 체 하셨다. 나 역시 애타는 표정보다는 ‘뭐 이런 일로 입원했느냐’는 듯 웃으며 다가갔다.
“몸도 성하지 않으면서 뭘 그렇게 다 떼어내 버리세요?”
별 것 아니라는 듯, 그렇게 한 마디 묻고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링겔 병에서 약물이 한 두 방울 떨어져 호스로 떨어졌다. 맹장수술은 일단 잘되었는데, 창자 끝이 터져서 꿰매었기 때문에 오늘 내일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의사가 말했단다.
수술한 배 주위엔 두툼하게 붕대를 감았다. 물이 차서 그것을 빼느라고 호스를 연결해 놓았다고 했다.
“간호사가 이것도 잘못 꽂아 가지고 손목을 움직거리들 못 허것어.”
하필이면 손목 부위에 링겔 주사바늘을 꽂아 손목이 움직일 때마다 바늘이 걸리적거렸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얘기가 이어졌다. 나는 묵묵히 들었다. 누군가 동전을 넣었는지도 몰라도 켜 있는 티비가 간혹 내 시선을 붙잡곤 했다.
“아파요?”
붕대로 감싼 수술 부위에 슬며시 손을 대며 말했다.
“몸을 움직일 때면 상당히 아프다니까… .”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생살을 째었으니 당연히 아프지. 더구나 아버지는 성한 사람의 몸도 아닌데….
그때, 난 왜 당신의 스산했을 마음만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몸이 아프면 마음도 덩달아 아프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몸이 아픈 걸 먼저 생각하지 못했을까? 몸이야말로 세월의 흐름을 가장 잘 확인해 주는 것 아니던가. 홀쭉해진 얼굴부터 뼈만 잡히는 다리까지, 세월은 구석구석 제 존재를 몸에 남기고 떠나는데. 그 흔적을 보고 당신의 마음도 세월을 따라 가는 걸 텐데.
병문안을 오기 전 여러 복잡한 마음이 함께 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맹장이라고 하지만 수술이라는 점에서 아버지는 두려움을 가졌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가까이 있다는, 적어도 제주도에서 돌아왔다는 것은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두려움과, 어쩌면 그 한 편에서 자랐을 쓸쓸함을 조금이라도 거둘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병문안의 목적은 ‘아들’이 가까이 있다는 그 사실을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 당신 나이의 아버지들이 가진 아들에 대한 기대치를 아버지 역시 갖고 있는 이상, 그것이 내 현실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하는 이상, 난 가부장적 체제 안에서 과도기적인 정체성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다.
현실에 대한 도피로서 갖는 마음이지만, 아들이 한 명 더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가끔 고개를 치켜드는 것도 이런 때다. - 병문안을 갔을 때 아버지가 화장실이라도 갈라치면 옆에서 조금 부축해 주긴 했지만, 적적할 병실 생활에 잠시나마 말상대로 앉아 있을 수는 있지만, 결국 내가 병원에서 끊임없이 아버지에게 건네는 무언의 말은 그것뿐이었다.
‘몸이 허락하는 한 편할 수 있는 만큼 편하게 계세요.’
다시 내일부터 이어질 회사 생활 등 ‘현실’이라는 핑계를 가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지를 늘 재면서, 그런 묵상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간혹 옆 침실에서 아버지에게 말을 걸어오는 환자들이 있으면, 그렇게 나름대로 적응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감사하기도 했고, 대견스러워 - 참 버릇없게도 난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 보이기도 했다.
두어 시간 정도 머물다가 병원을 나섰다. 여전히 마음은 찹찹하고 나란 존재가 넘지 못
할 벽이라는 게 여전히 많았다. 이쯤 되면 늘 봄날 햇볕에 고개를 내민 싹처럼 돋아나는 생각이 있다.
‘어쩌면 지금이 내가 시골로 가야 할 때가 아닐까. 아버지를 모시고 어머니를 설득해 그렇게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최소한 올 가을 이사할 때는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횡단보도를 건너고 다시 회기역으로 지하철을 타러 가는 나는 발길을 재촉해야 했다. 어쩌면 막차가 끊겼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느새 병원에 있는 아버지는 현실 밖으로 벗어나 버렸다. (200103)
<사진설명>
아버지가 30대를 보낸 동네에 있던 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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