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 지나가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내려 수유시장을 지나 왔다. 재래시장이다. 긴 골목 양옆으로 가게들이 펼쳐졌다. 난전이다. 길가에 쌓인 물건들을 구경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먹을거리다. 푸성귀들은 입맛만 다실 뿐, 반찬으로 만들 재주가 없는 나로선 눈요깃거리에 불과하다.
혼자 살아서 그런지 모든 게 생활로 보인다. 불쑥 솥뚜껑삽겹살구이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내 얼마나 고기를 구워먹는다고 저런 걸 사나 싶어 그냥 지나친다. 진열된 계란은 슈퍼에서 구입하는 계란보다 커 보인다. 뭔가 먹고 싶은데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한참을 그렇게 구경만 하고 시장골목을 빠져 나올 쯤, 살짝 의구심이 인다. 무엇 하나 단박에 고르지 못하는 게 빈약한 요리 실력 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빈곤 때문이지 않을까. (1999.2.1.)
가장 오래 타오를 것
갑작스런 말지 회식. 호출기에 녹음된 음성을 듣고 참여했다. 모처럼 <말>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1차로 고기집에서 잘 먹고는 2차로 맥주집에 들렀다. 서로가 술이 거나하게 들어간 상태다. 데스크가 갑자기 물었다.
“네 꿈은 뭐냐?”
“?……!”
“네 꿈은 뭐냐?”
데스크가 다시 물었다. 이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뭐 그렇다고 한 마디로 딱 말할 것이 없다.
“우선은 마흔에 시골에 내려가는 거요. 그 다음은 <말>에서 할 일인데, 20대 독자층을 향한 발걸음을 내가 먼저 시작해 보는 거지요.”
취기가 오른 데스크는 시큰둥하다. 이번엔 앞에 앉은 선배에게 묻는다.
“꿈이 뭐냐?”
선배는 말한다. “혁명”이라고. 데스크는 자기의 꿈은 “개혁”이라고 말한다. 끌끌, 재미없다. 잠시 술잔이 오가고
데스크가 다시 내게 묻는다.
“네 꿈은 뭐냐?”
이 재미없음을 해소하기 위해 나는 말을 돌린다.
“세 명(데스크와 선배, 나) 중에서 제가 가장 오래 타오를 것입니다.”
동문서답? 진심이었다. 내 꿈은 그런 것이니까.
혁명, 개혁. 내 삶에 선배들이 던진 말이다. 그걸 뛰어넘고 싶다. 아니 ‘싶다’가 아니라 할 거다. 지금도 하고 있다.
골똘해졌다. 내 꿈, 그게 뭔가! 그래서 며칠 동안 내 삶을 이리저리 뒤적여 보았다. 잠정적으로 얻은 답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살고 싶다. 그 첫 단계는 내 희망을 내 삶에 제대로 심는 일이다. 적어도 내겐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아니다. 그보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남에게도 희망이다’가 더 낫다. 그럼 내 희망은? 마흔번 째 내는 세풀을 보면 들어 있지 않을까!
회식 술자리에서 선배들이 얘기를 나눈다. 조금 씁쓸하다. 어려운 여건에서 <말>을 지켜온 이들이다. 선배들 역시 내게 희망이지만, 나 역시 선배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말>이 처한 시장 환경, 시대 상황이 쉽게 풀릴 것 같진 않다. 기자가 기사만 고민해야 할 때는 지나지 않았는가 싶다. (1999.2.19.)
아버지의 입원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 동안 약주가 과하셨는데, 결국 탈이 생기셨다. 새벽에 쓰러진 아버지를 들쳐 업고 택시를 잡는데, 택시가 서질 않는다. 취한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나보다. 병원이라고 큰소리를 친 후에야 택시를 탈 수 있었다. 응급실로 일단 들어갔다. 인턴에게 몇 가지 간단한 진단을 받은 후, 아침 6시까지는 대기상태였다. 밤의 응급실은 TV에서 본 것과 달리 긴박하진 않았다.
내가 서른이 되고 아버지가 예순을 넘어 아프시니, 천상 아버지가 아기가 됐다. 이 달 말쯤 퇴원하시지 않을까 싶다. (1999.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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