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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0+31

밤을 꼬박 지샌 소개팅

 

오후에 학교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전에 만났을 때 소개팅을 시켜달라고 했는데, 대략 이번 주 일요일쯤으로 날짜를 잡자고 했다. 그래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그런데 일요일날 약속이 있다며, 어렵다고 했다. 끌끌. 중매인이 빠지려 들다니. 잠시 고민하다가 소개팅 해주기로 한 그 후배를 오늘 만난단 얘기를 듣고 함께 만나기로 했다. 저녁에 김경환 선배 형수와 약속이 돼 있어서, 장소를 건국대 근처로 잡았다.
5시 30분 정도에 만나 이른바 소개팅을 했다. 그러나 이걸 소개팅이라고 말하긴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그냥 현장 분위기를 그대로 말하자면, 후배를 만나러 갔다가 함께 온 다른 이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한 시간 정도 차를 마시며 내가 주로 수다를 떨었다. 상대방은 내 후배와 예전에 연출가와 구성작가로 만나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4년 가량 연출 일을 했단다. 그러다 ‘이대로 가면 전망이 없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고 했다. 내년에 유학을 갈 계획이라고 했다. 그녀는 감기가 걸렸다며 가능한 말을 아꼈다. 더욱이 그 날은 시험을 마치고 온 날이라 피곤하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훌쩍 한 시간을 얘기하고 헤어졌다. 나는 곧바로 형수를 만나기 위해 성내역으로 갔다. 성내역에서 형수를 만나고 헤어진 시간이 11시. 왠지 기분이 꿀꿀했다. 자잘한 감정들이 검불처럼 마음에서 일었다.   

다시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그들은 아직 건대근처에 있었다. 막 2차로 술집에 들어갔다고 했다. 형수를 함께 만났던 동료 기자를 떼어놓고 술자리에 합석했다. “가을 밤바람이 그냥 집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해서 왔다”는 핑계를 댔다. 나는 그때까지도 술을 조심하고 있었다. 구안와사 이후 여전히 뒤통수가 멍한 기운이 있었기 때문이다. 술집에 손님이라고는 우리 테이블에만 남아 있을 때까지 술을 마셨다.


나는 말이 많았다. 그녀가 워낙 말이 없기도 했지만, 실은 내 마음이 그만큼 허방을 짚고 있기도 했다. 허방. 요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런 허방을 파고 있었다. 그 허방에 빠져 말이 많아졌다.


슬슬 술자리를 정리하고 나선 시간이 2시 30분. 그야말로 시간은 자정 넘어 새벽으로 가고 있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아랑곳없이 노래방으로 가서 30분간 노래를 불렀다. 집에 가겠다는 그녀를 붙들고 간 곳은 다시 술집. 술을 마시지 않겠다기에 그럼 그냥 앉아서 자라고 하고는 억지를 부렸다. 그녀는 무척 졸린 모양이었다. 밤 3시 넘어 창밖으로 비가 내렸다. 그때부터 나는 술을 마셨다. 밤에, 비가 내리고, 술이 있고, 오늘 처음 만난 이까지 있으니, 그보다 내 감성에 맡는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4시 30분. 그녀가 택시 타는 것을 보고는 후배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후배는 내가 여친과 헤어졌다는 것을 몰랐다. 바래다주는 길에 간략하게 얘기했다. 혹여 소개팅과 관련해 ‘임자 있는 이 선배가 왜 이러나’ 싶을까 봐.

어찌되었든 처음 본 사람 비위 맞추느니라 그녀가 고생했다.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잘 들어갔나 전화를 했더니, 나더러 미안하단다. 처음 본 사람 앞에 두고 졸아서? 끌끌. 착한가! (1999.9.17.)